소설리스트

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30)화 (30/154)

30.

루가르의 노골적인 표정은 그 의미가 빤했다.

대견하다. 혹은 우리 대장님 참 잘했어요. 등등.

가볍게 무시하고 넘긴 에르네가 말했다.

<폐하께서는 정원 안쪽에 네이라 님과 함께 계신다. 혼자 들여보내.>

루가르는 고개를 끄덕이곤 플로라에게 말을 전했다.

“플로라 님, 이 안으로 쭉 들어가시면 폐하가 계실 거예요. 저희는 이곳까지만 출입이 가능해서 혼자 가셔야 할 것 같아요. 안에는 대마법사이신 네이라 님이 함께 계신다고 합니다.”

‘……응? 대마법사님이요?’

순간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 뭔가 잘못 들은 것 같다.

갑작스레 에르네와 대련을 시켰을 때 느꼈던 그 기분이 들었다.

‘대마법사님은 왜?’

대체 왜? 하고 되묻고 싶었으나 에르네의 서늘한 시선에 꾹 참았다.

그러다 문득 지난날, 광장에 다녀오면서 시몬이 했던 것 같은 말이 떠올랐다.

‘네게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 다음에도 같이 오자.’

워낙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뉘앙스의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누군가를 소개해 주고 싶다고.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이…… 설마, 대마법사 님인 건가?

아니면 설마, 지난번 시험에서 최상급 마법석을 깨트린 일로 혼이 나는 건가?

플로라가 굳어선 채로 움직이지 않자, 곧 에르네가 뭘 하고 섰냐는 듯 따가운 눈빛을 보냈다.

그녀는 결국 생각을 접고 후다닥 정원으로 들어갔다.

에르네에게 죽느니, 대마법사에게 혼나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 * *

플로라의 발걸음에 망설임이 묻어났다.

시몬을 만난다는 기대와 대마법사를 만나는 두려움이 반반이었다.

마법사는 플로라에게 언제나 미지의 존재였다. 그동안 마법을 얻기 위한 크고 작은 노력이 있었지만 결국은 그녀가 손댈 수 없는 영역이었다.

어떤 사람일지 불현듯 호기심이 들었다.

루가르가 일러준 대로 정원 안으로 쭉 들어가자, 시몬의 모습이 보였다.

플로라의 시선은 자연스레 그의 맞은편으로 향했다.

구불구불한 금발 머리가 허리까지 닿고, 몸은 호리호리해서 톡 건드리면 쓰러질 것만 같은 자태의 여인이 앉아 있었다.

‘저 사람이 하네칸의 대마법사 중 한 명……?’

그녀는 몸매가 제대로 드러나는 하얀 머메이드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행색이나 외모만 봐서는 전혀 대마법사로 보이지 않았다.

루가르가 뭔가 잘못 알고 말해준 게 아닐까 싶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신 아르제카가 지상에 강림했을 때, 세계를 혼란에 빠트리던 마수를 물리치고 올바른 균형을 위해 인간에게 힘을 나눠 주었다.

제국의 기둥이 될 태양에게는 마족의 신이었던 ‘페이몬’을 봉인해 사역마로 심었고, 세 명의 인간에게는 더 강한 마력을, 신전의 아이들에게는 신의 힘을 일부 주었다.

벌써 천년도 더 된 일이니, 고대의 신화 같은 이야기였지만 현재까지도 계승되고 있는 일이었다.

루가르의 말대로라면 저 여인은 그 세 명의 대마법사 중 한 명이리라.

“플로라, 왔군.”

다정하게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던 시몬이 기척을 느끼고, 플로라를 보았다.

플로라는 잠시 숨을 멈췄다.

그의 석양 같은 눈을 마주하자마자 심장이 동요했다.

오늘은 하얀 제복을 입고 있었는데, 정원의 싱그러움과 어우러져 그 자태가 한층 더 멋있어 보였다.

‘잘생긴 남자에게 가슴이 뛰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야. 다른 뜻은 없어.’

플로라는 제 감정을 그리 정의 내리기로 결심했다.

외모만 밝히는 속물이 되어버렸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또 혼란에 갇혀 정신을 못 차릴 게 뻔했다.

그녀는 결의에 찬 얼굴로 주먹을 꽉 쥐었다가 두 사람을 향해 차례로 정중하게 인사했다.

“하네칸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폐하께 무한한 영광과 축복이 깃드시길.”

“…….”

“또한 고결하고 지혜로우신 하네칸 제국의 대마법사 네이라 님을 뵙습니다.”

“플로라, 이리 앉아.”

시몬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까이 놓인 의자를 빼주었다.

“감사합니다. 폐하.”

조심스레 자리에 앉고 나니 곁에서 저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플로라는 대놓고 빤히 닿는 시선에 어색하게 눈을 굴렸다.

금발에 붉은 눈을 한 ‘대마법사’님께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행히 그녀의 시선에 적의는 담겨 있지 않았다.

다만 어딘가 자신을 신기해하고 있는 눈치여서 시선을 받아내기가 몹시 불편했다.

“안녕하세요? 제 소개를 못 했네요. 네이라 리에르고에요.”

곧 그녀가 자신을 소개하며 옅게 웃었다.

확실히 플로라가 그동안 만나왔던 마법사들과는 느낌이 달랐다.

“자, 그럼 바로 본론에 들어가 볼까요. 자리를 오래 비우면 소피 님께 혼나서요.”

“…….”

“플로라 님. 본인에게 마력이 있는 건 알고 있나요?”

최상급 마법석 이야기를 꺼낼 줄 알고 긴장했는데 다른 말이 들려왔다.

플로라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있다고 듣긴 했습니다. 다만 그 마력을 쓰지는 못해요.”

“한 번도 써본 적 없나요?”

“아니요. 어떤 마법사에게 잠깐 마법을 배웠던 적이 있어요. 그때 손가락에 불을 피우는 걸 성공했어요.”

네이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마력에 대해 물으니, 의아하면서 막연한 두려움이 생겼다.

“그럼 마력 제어를 해줄 테니 한번 해볼래요?”

그건 벌써 몇 년이 지난 일이었다.

그때의 스승이 손가락 끝에 고작 작은 불 하나 피운 거로 천재니, 뭐니 요란을 떨어 대서 그 뒤로 발길을 끊었었다.

지금은 그 돌팔이 마법사의 얼굴 말고는 제대로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할 수 있을까…….’

플로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네이라가 손을 뻗어왔다.

플로라의 손목을 쥔 네이라가 살짝 힘을 흘려보내자, 기이한 감각이 들끓기 시작했다.

플로라 안에 흩어진 마력들이 자신을 방어하려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네이라를 위협했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스산한 한기는 어떤 경고 같았다.

그 틈으로 조금 불길한 기운이 섞여들고 있었지만, 네이라가 아는 부류는 아니었다.

결국 플로라는 불을 피우지 못했다.

“죄송해요.”

마법에 있어서는 문외한이었기에 그만큼 자신감도 없었다.

주눅이 든 플로라가 작게 사과하자, 네이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과하실 일은 아니에요.”

네이라는 고개 숙인 플로라를 빤히 보았다.

마법을 쓰려고 할 때 그녀 주변에 나타나는 마력의 기운은 좀 더 짙어진다.

하지만 마법은 발현이 되지 않는다.

그런 경우는 두 가지라고 고대 마법사의 연구일지에서 읽은 기억이 있었다.

심리적 문제, 그리고 스스로 마력을 봉인한 것.

타인은 마법제어는 해줄 수 있을지언정 쓰지 못하는 상태까진 만들지 못하니, 아마 후자의 경우라면 본인이 직접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 마력은 쓰지 못해도 최소한 자신이 봉인했다는 기억은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플로라는 그조차도 전혀 모르고 있는 눈치였다.

그런 경우라면 기억까지 지웠거나, 연기를 하고 있거나, 아니면 진짜 심리적 문제였다.

심리적인 압박이 강해 마력을 가지고도 마법을 쓰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보기에도 애매한 점이 있었다.

심리적으로 마법을 쓰기 두려워하거나 어려워하는 상태라면 불을 피우려 했다고 가정했을 때, 작은 불씨까진 켜졌다가 한순간에 사그라지게 된다.

종종 시험을 앞두고 점수를 잘 받으려는 아카데미 마법반 아이들에게서 많이 봤다.

하지만 플로라는 아예 그 작은 불씨조차 발현되지 않았다.

‘음, 그럼 어느 쪽이지?’

네이라는 가늠하듯 플로라를 보았다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네가 보기엔 어떻지?”

플로라도, 시몬도 궁금한 듯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력을 봉인했거나, 어떤 심리적 요인으로 쓸 수 없거나?”

“…….”

“각성을 안 한 건 아니에요. 본인도 마력이 있다는 걸 알고 있고, 주변 사람들도 말해줬다고 하니 마법을 써보긴 한 것 같은데요.”

자신이 정확한 판단은 할 수 없기에 네이라는 그런 경우들이 있다고만 말해주었다.

플로라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마법을 쓴 기억이라곤, 정말로 손끝에 불을 피우던 것밖에 없어서 황당했다.

“저어, 네이라 님. 질문을 하나 해도 될까요?”

플로라가 조심스레 말을 걸자, 시몬과 네이라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네.”

네이라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력은 마력을 가진 사람만 볼 수 있는 건가요?”

“그렇죠.”

“하지만 저는 다른 분들의 마력은 보이지 않는데요. 어떻게 된 걸까요?”

어떤 마법사를 만나도 이런 얘길 해주는 경우는 없었다. 그래서 흥미가 생겼다.

플로라가 눈을 반짝이며 궁금한 것을 묻자, 네이라가 옅게 웃었다.

그녀의 모습이 마치 자신이 가르치는 마법사제 같았다.

“……음. 무의식중에 흘러나오는 걸 빼면 지금 플로라 님은 마력이 아예 없는 상태라고 봐도 돼요. 손끝에 불 한 번 피웠었다고 했죠? 아마 그때 마법을 가르쳐줬던 선생은 꽤 유능했던 것 같은데요? 마법진 없이도 억지로 마법을 끌어낸 것 같으니. 그거 마력 소비가 엄청 많이 되거든요.”

그 돌팔이가……?

놀라운 얘기에 플로라는 늙은 마법사의 얼굴을 떠올리며 눈을 찡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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