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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29)화 (29/154)

29.

“귀족들은 어떻게든 약점을 잡아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어. 어차피 그들의 자제들도 가문과 직위를 물려받을 텐데, 자신들의 자리를 빼앗긴다고 생각하는 것 같더군.”

“폐하의 세력이 차츰 늘어나는 것 같아 두렵기도 하겠죠. 자신들이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될까 봐.”

“그래. 그런 것도 있겠지.”

“결론은 폐하께서는 지금 제 지지가 필요하단 말씀이신 거죠?”

콕 집어 묻는 네이라의 말에 시몬이 헛웃음을 흘렸다.

하네칸에서 대마법사의 권위는 대신관 못지않게 높았다.

일반 사람들보다 마력을 몇 배로 가지고 있어 그 위력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황제보다 대마법사를 따르고 섬기는 귀족 가문도 있었다.

대마법사의 지지는 황제의 권력에 훌륭한 영향을 끼쳤다. 자연스레 그를 따르는 귀족의 지지도 얻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

“이게 다 뇌물이었군요?”

네이라가 먹음직스러운 디저트들을 둘러보다 눈을 흘겼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딱히 부정할 수도 없군. 기분이 나빴다면 사과하지.”

시몬이 잠시 당황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농담이에요. 다만 앞으로는 별다른 일이 없어도 절 종종 불러 주시겠어요? 이런 일이 있을 때만 절 찾으시니 가끔은 정말 서운해요. 예전이 그리워요.”

시몬은 옅게 미소를 흘렸다.

“그래. 앞으로는 종종 식사도 같이하지.”

“약속하신 거예요.”

네이라는 새침한 표정으로 대꾸하며 케이크를 한 입 더 먹었다.

“……그리고 전 언제나 폐하의 편이에요. 제게는 무엇이든 편히 말씀하셔도 돼요.”

그녀의 말에 시몬의 표정이 조금 풀어지는 게 보였다.

네이라는 자신을 향한 시선을 마주 보다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항상 고마워. 네이라. 좋은 친구가 옆에 있어서 든든하군.”

좋은 친구. 네이라는 그 말에 옅게 웃었다. 웃을 수밖에 없었다.

시몬과 그렇게라도 엮여, 조금 더 가까운 사이가 될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스러웠다.

네이라는 혹여 제 감정이 드러날까, 얼른 화제를 바꿨다.

“플로라 그분은 저도 한 번쯤 만나 뵙고 싶었어요. 하도 얘기를 많이 들어서요.”

“너도 보면 좋아할 거야.”

플로라의 이야길 하며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는 시몬의 표정은 생경했다.

뭘까. 이 기시감은?

네이라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에게 시몬을 향한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아카데미를 다닐 때부터 네이라는 명문가의 여식인 칸나의 그늘에 있었기 때문에 한 번도 시몬에게 사적인 감정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모두가 시몬은 칸나와 혼인할 거라고 했다. 실제로 둘은 약혼을 한 사이기도 했으니 당연한 말이었다. 네이라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비록 지금은 두 사람이 파혼을 하긴 했어도 결국은 그녀와 혼인하게 될 것이라고 짐작해왔다. 그 뜻이 흔들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원래 고귀한 황가의 핏줄이나 귀족 가문의 핏줄을 이어받은 자는 결혼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니까.

칸나를 사랑하지 않더라도, 칸나의 가문은 시몬의 권력에 큰 힘을 보탤 것이다.

“폐하.”

“응?”

슬슬 황제의 혼인 얘기가 나오고 있었다.

플로라라는 여자의 이야기와 더불어 황제의 혼인에 대한 넋두리까지 잔뜩 늘어놓고 간 귀족 탓에 많은 걸 알 수 있었다.

시몬은 한때 노예 계집을 자주 곁에 두어 그 일로 칸나와 파혼했다.

그 때문에 황제가 주색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린단 소문도 생겼다.

지금도 성 밖에서 그 여자와 자주 만난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두 사람의 모습을 직접 보지 못해 그런지 조금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그 여자는 그저 혼인을 미루기 위한 ‘방패막이’가 아닐까 하는.

네이라는 시몬에 대한 소문을 믿고 싶지 않았다.

네이라가 본 황제는 누구보다 성실하고, 제국민들이 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개혁에 집착하는 청년일 뿐이었다.

황실의 대를 이어야 하기도 하고, 주변에서 성화를 할 테니 언젠가 혼인은 해야겠지만 사실 이성에도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어쩌면 시몬의 삶에 사랑이란 감정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닐 수도 있겠단 생각도 한 적 있었다.

누군가를 짝사랑하다 보면 별별 생각을 다 하는 법이니까.

“궁금한 것이 있어요.”

“응. 편하게 얘기해.”

그런 황제가 어떤 여자를 성에 들였다.

성에 들인 것은 시몬의 안목이 뛰어나니까 잠재 능력을 봤다고 쳐도, 그것과는 달리 필요 이상으로 신경 쓰는 기색이 보였다.

그가 직접적으로 플로라에게 무언가를 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 눈앞에 보이는 표정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다.

한 사람을 오래 보다 보면, 그의 표정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무례하다고 하실 수도 있지만, 너그럽게 받아들여 주세요.”

시몬의 낯선 표정. 그 이유가 궁금했다.

“혹시 그 여자분에게 다른 뜻이 있으신가요?”

* * *

휴가 4일 차의 점심 식사 직후.

플로라는 부른 배를 부둥켜안고 평화로움을 만끽했다. 열어둔 창문 사이로는 따뜻한 햇살이 들이치고, 불어오는 바람은 뺨을 간질였다.

만연한 평화에 눈꺼풀이 스르르 내려앉던 찰나였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적막을 깨웠다.

침대에서 일어난 플로라가 ‘네.’하고 짧게 대답하자 문이 열렸다.

“플로라 님!”

방문객은 루가르였다.

“루가르 님.”

“잘 지내셨나요? 몸은 괜찮아지셨어요?”

“네. 전 잘 지냈어요. 루가르 님은요?”

이제 그녀가 검을 차고 단복을 입은 모습이 퍽 익숙하게 느껴졌다.

시녀복을 입었던 때는 아득히 먼 일 같았다.

“저야 뭐 항상 똑같죠. 훈련하고 구박받고.”

루가르가 볼에 바람을 불어 넣으며 지긋지긋하단 얼굴을 했다.

“구박은 아마도 에르네 단장님이 하시는 거겠죠?”

“맞아요. 그 양반.”

루가르는 으, 하며 질색하는 표정과 함께 눈을 찡그렸다.

그러나 결코 에르네를 싫어한다거나 험담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행동에서 애정이 뚝뚝 묻어나는 듯했다.

“근데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이세요?”

보통 루가르가 찾아오는 건 저녁때였다. 한데 지금은 고작 오찬이 끝난 직후였기에 플로라는 그녀의 방문이 좀 신기했다. 휴가라도 받은 것일까.

“아! 오늘은 명을 받아서 왔어요. 폐하께서 플로라 님을 데려오라고 하셨거든요.”

“네? 폐하께서요?”

그녀의 말에 나른했던 정신이 번뜩 깨어났다.

한동안 죽은 사람처럼 잠잠했던 심장이 다시 제 기능을 시작한 것 같았다.

“네. 가시죠!”

플로라는 밀려드는 온갖 생각들을 꾹 억누르고 루가르를 따라나섰다.

숙소를 벗어나 성으로 향하며 루가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백기사단에 입단하게 된 이야기를 하자, 그녀가 돌연 울먹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요. 그거! 저만 몰랐다고요! 저만. 플로라 님과 아무 연고도 없는 우리 선배들도 알고 있더라니까요!”

“말하려고 했는데 기회가 없었어요.”

“하기야 그건 그렇죠. 며칠 오후 훈련을 했더니 끝나고 나면 바로 기절인 거 있죠. 그래서 방문할 시간이 없었어요.”

“…….”

“뭐, 서운하긴 했지만 잠깐이었어요. 입단 축하드려요! 그럼 저 앞으로는 백기사단 숙소로 놀러 갈게요. 근데 길이 어디더라?”

루가르가 고개를 갸웃했다.

“네. 자주 오세요.”

“얼른 플로라 님이 단복 입은 모습을 보고 싶어요!”

어느새 익숙한 성 앞에 도착했다.

하지만 루가르는 성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곳으로 플로라를 안내했다.

“폐하께서 정원에 계신가요?”

“그런 모양이에요. 저도 대장님께 명령받고 온 거라 잘 모르겠어요!”

허락되지 않은 사람은 출입이 불가한 정원이었다.

근위대 기사들이 저지하지 않는 것을 보니, 확실히 사전에 협의가 된 일인 듯했다.

두 사람은 정원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멀리 에르네가 보였다.

하지만 그의 곁에 시몬은 없었다.

“대장님!”

루가르가 먼저 에르네를 향해 인사하며 해맑게 웃었다.

플로라는 그런 그녀를 경이롭게 보았다.

저리 시시때때로 살기를 내뿜고 있는 사람에게도 스스럼없이 대하는 것이 대단해 보였다.

에르네는 차가운 눈으로 루가르를 내려다보더니, 이내 플로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와 눈이 마주친 플로라는 잠깐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역시 무섭다. 이제 타인을 향해 미소를 짓는 것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에르네의 앞에선 입꼬리가 뻣뻣하게 굳어 꼼짝도 하지 않았다.

플로라는 그의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해 얼른 허리를 굽혔다.

“안녕하십니까. 에르네 단장님.”

에르네는 제게 인사하는 플로라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그녀가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지만, 묵례를 하는 것으로 예의는 지켰다.

그런 대장의 모습을 본 루가르는 상당히 감동받은 얼굴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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