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28)화 (28/154)

28.

에르네는 궁금증을 거두고 다른 대답을 했다.

<오늘은 이만 잠자리에 드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주무셔야 할 시간에 성 밖에 다녀오시느라 피곤하셨을 텐데요.>

“괜찮아. 이 안건은 다 봐야지. 아니면 무슨 개짓거리를 할지 몰라.”

<…….>

“서류만 봐도 신이 난 게 보여. 이것 봐. 곧 있으면 건국제 계획을 세운다는군. 속도 좋지.”

시몬이 비아냥거리며 서류 뭉치를 책상 위에 던지듯 거칠게 내려놓았다.

분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내가 알아보라 했던 것은? 외곽의 수로 공사는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 건가?”

<예. 조사해본 결과 고용인들에게 임금은 적게 주고, 높은 강도의 일을 시키는 것 같았습니다. 고용인은 주로 왕국을 잃은 이민자들이었습니다.>

“참. 어디 하나 정상적으로 진행되는 일이 없군. 예산안에 장난을 못 치게 하니, 사람한테 장난질을 해.”

시몬이 미간을 구겼다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제자리걸음이야. 어디서부터 어떻게 바로 잡아야 할지 감이 안 잡혀. 그냥 싹 베어버리고, 새로 시작할 수 있으면 좋겠어.”

<폐하께서 명하신다면 언제든 준비되어 있습니다.>

에르네의 진지한 대답에 시몬이 헛숨을 삼켰다.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마. 나는 세기의 폭군이 될 생각은 없어서 말이야.”

에르네 덕분에 기분이 좀 풀린 시몬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리비에르에게선 연락 없나?”

<빠른 시일 내에 방문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전에 네이라에게 연락해줘. 먼저 만나봐야겠어.”

<예.>

시몬은 에르네의 대답을 듣곤 다시 서류를 살피는 것에 몰두했다.

머릿속엔 여전히 은빛 머리칼과 검은 눈동자가 어른거렸으나, 겨우 이성을 붙들었다.

* * *

이든을 따라 방문한 아르제카 신전은 외관부터 웅장했다.

거대한 원형의 기둥들이 지붕을 받치고 있었고, 신전의 외벽 곳곳은 황금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또한 건물 외벽에는 아르제카 신의 모습이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었는데, 어제 광장의 분수에서 보았던 것보다 그 형체가 뚜렷해서 훨씬 아름답게 느껴졌다.

높은 계단을 올라 신전 안으로 들어서자 겉에서 보던 것보다 더한 장관이 펼쳐졌다.

천장에는 아르제카를 찬미하는 그림이 빼곡하게 그려져 있었고, 복도에는 천사의 형상을 한 석상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곳곳에는 이든과 같은 로브를 입은 신관들도 많이 보였다.

“이쪽으로 오세요.”

신전을 방문하는 귀족이나 기사에게는 하나의 기도실만 개방되어 있었다.

플로라는 이든의 안내에 따라 허락된 기도실로 들어갔다.

원형의 기도실 가운데에는 아르제카 신의 형상을 본떠 만든 동상이 있었고, 그 동상을 에워싸는 형태로 의자가 놓여 있었다.

이미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든도 아르제카 신을 보자마자 성호를 그리며 눈을 감았다.

경건한 분위기에 플로라도 얼른 아르제카 신께 기도를 올렸다.

별다를 건 없었다. 그저 신념을 지키는 기사로 살게 해달라는 기도였다.

* * *

“오셨어요? 폐하.”

먼저 티가든에 도착해 있던 네이라가 일어나 시몬을 맞이했다.

함께 온 에르네는 대마법사인 네이라에게 정중히 인사한 뒤 멀찍이 물러섰다.

황제의 정원 한가운데 위치한 티가든은, 날이 좋을 때면 시몬이 즐겨 찾는 곳이었다.

새 지저귀는 소리가 하모니처럼 들리고 선한 공기와 햇살이 잘 어우러져, 향이 그윽한 티와 함께 공상에 잠기면 앓고 있던 고민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

웬만해선 타인을 데려오지 않아, 늘 혼자였던 공간에 오늘은 네이라가 함께 있었다.

“응. 네이라. 일찍 와있었네.”

“저도 방금 왔어요. 여긴 여전히 아름답네요. 제가 성에 들어와 의식을 받은 날 이후로 처음이죠?”

“아마도.”

아카데미 졸업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네이라가 대마법사로 의식을 받게 되었다.

아카데미에 다닐 때도 마법 분야에서 시몬보다 좋은 성적을 받아왔고, 잠재된 마력의 가치가 어마어마해 나이는 어렸지만 대마법사의 자리에 오를 수 있게 됐다.

대마법사 의식이 있던 날 시몬은 친한 친구를 다시 만난 기념으로, 또한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이곳에서 차를 대접했었다.

그때도 이런 눈빛으로 이곳을 봤었다.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맑은 눈동자로.

자신이 아끼는 공간을 타인도 좋아해 주는 건 괜히 뿌듯해지는 일이었다.

“할 일이 많지?”

시몬은 티와 디저트가 준비되기가 무섭게 네이라를 부른 본론에 들어가기 위해 운을 뗐다.

“할 일이야 늘 많죠. 그래도 재미는 있어요.”

“재미라도 있어서 다행이군. 리비에르가 없어 소피와 네 일이 두 배일 텐데.”

“제가 없었을 때 소피 님은 어떻게 견디셨는지 모르겠어요. 정말 대단하신 분이에요. 폐하 다음으로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랍니다.”

“네이시스 후작이 서운해하겠는걸.”

먹음직스러운 케이크에 자연스레 손이 가고 있던 네이라가 시몬의 말에 몸을 움찔했다.

“얼른 먹어. 맛있을 거야.”

그녀의 행동을 빠르게 읽어낸 시몬이 디저트를 권유하며 멋쩍게 웃었다.

네이라는 포크로 디저트를 한 입 먹고 난 뒤에야 시몬에게 다시 말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절 찾으신 건가요?”

네이라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아. 네가 한 번 봐주었으면 하는 아이가 있어서.”

“혹시 성 내에 소문이 자자한 그 여자분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뭐. 맞는 것 같군. 너도 알고 있을 줄은 몰랐어.”

시몬이 어깨를 으쓱이자, 네이라가 옅게 웃었다.

“모를 수가 없죠. 이번 황실 기사단 시험으로 차출되었던 마법사들이 한참 그 일로 수군거리던걸요. 최상급 마법석을 정화시켰다고요. 귀족들도 계속 떠들어대고요.”

“귀족들이?”

“폐하께서 왜 데려왔는지 아느냐, 마력이 있다는데 사실이냐, 별별 것을 다 제게 묻던데요? 누굴 신으로 아나 봐요. 저도 폐하를 뵙는 건 마도구 일 이후로 처음인데 말이에요. 제대로 된 응답이 듣고 싶으면 아르제카 님께 진심 어린 기도나 올릴 것이지, 왜 제게 하는 걸까요?”

“…….”

“어제는 카신 경까지 찾아와서 그분 얘길 했어요. 하도 들어서 이름도 외웠어요. 플로라 님. 맞죠?”

“그래.”

“아, 그런데 그분은 기사 시험을 치르신 것 아닌가요? 마스터가 되실 분을 왜 제게…….”

한참 짜증스레 말을 늘어놓던 네이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마력이 있는데 쓰질 못해. 아마 마력이 있다는 것조차 자각하지 못한 것 같아. 그래서 정확히 어떤 상태인지 봐줄 수 있나 해서.”

“아…… 그렇군요.”

“괜찮겠어?”

“저는 상관없어요. 아직 배움이 부족해서 잘 봐 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런 이유라면 저 말고 차라리 소피 님께 보여 드리지 그러셨어요?”

“소피는 나만 보면 불같이 화를 내서 말이지. 통제가 안 돼.”

“리비에르 님을 데려오라고요?”

“그래.”

네이라가 이해한다는 듯 시선을 찻잔으로 내리깔았다.

“리비에르에게도 연락은 해뒀지만, 언제 다시 들를지는 모르겠군. 워낙 종잡을 수 없는 양반이니.”

순간 네이라는 기분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설레지 말고, 착각하지 말자고 수도 없이 다짐해놓고, 막상 시몬이 일에 대한 얘기만 늘어놓으니 역시 서운해진 탓이었다.

그래도 시몬이 하는 일에 항상 귀를 기울이고, 성 내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결과로 멍청하게 진짜 착각만 하고 나오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어느 정도는 그 여자에 대한 얘기를 꺼낼 거라고 예상했다.

네이라는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제가 들었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요, 카신 경은 아직 플로라 님이 폐하께서 데려온 이방인이라는 걸 모르는 것 같고. 그 플로라 님은 카신 경의 부하가 되었고. 그녀에겐 마력이 있는데 마력을 쓰지 못하는 상태. 맞나요?”

“정확해.”

“그런데 어디서 데려오셨어요?”

“산에서 주워왔어.”

“……네?”

“산속에 숨어서 살고 있더군. 그래서 데려왔어.”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시몬의 표정이 진지했다.

“평민을 성에 들였으니 귀족들은 계속 난리를 칠 거야. 그래서 애초에 작위라도 얹어줄까 고민했는데…… 그건 그거대로 더 난리 날 테니까.”

네이라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에르네를 들였을 때도 한바탕 난리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 황태자였던 시몬은 마굴 토벌에 참여하다 만난 에르네를 성으로 들였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곧장 자신의 호위 기사로 임명했다.

그리고 시몬이 황위에 오르자 그는 근위대장이자 여명기사단의 단장이 되었다.

귀족들은 입으로는 황제를 걱정하는 척했으나, 사실 황제의 안위와는 관계없이 황실의 주축이 될 법한 인물들을 일단 자신의 적이라 생각하고 견제했다.

아무리 신입 기사여도 황제가 데려왔다는 이유로, 플로라 역시 귀족들 사이에서 한동안 구설수에 오를 것이 분명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