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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27)화 (27/154)

27.

레바는 겨우 감정을 추스른 듯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앞으로의 삶도 평탄치는 않으실 겁니다.”

“…….”

“무엇보다 연인과의 사랑을 이루는 것이 가장 위험하고 아플 거예요. 많이 힘드실 겁니다. 지금까지 겪어온 삶보다 더 험난하게 느껴지실 테죠. 하지만 그 역경을 이겨내신다면 꿈꾸던 모든 것을 이루실 수 있을 겁니다.”

메말랐던 감정에 단비가 뚝뚝 떨어져 내리는 것 같은 기분은 들었으나, 딱 그뿐이었다.

연인과의 사랑.

플로라와는 거리가 먼 소리였다.

“죄송하지만 제 인생에 사랑이나 연인, 그런 건 없을 거예요.”

그녀의 단호한 대답에도 레바는 당황하지 않고, 부드럽게 눈을 휘어 웃었다.

“아가씨. 우리의 인생에 장담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답니다. 당장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만난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실 수도 있어요.”

“…….”

“하지만 뜻이 확고하시다면 그건 다행인 일이지요. 앞으로 아가씨를 가장 힘들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오지 않는다면, 삶이, 마음이 얼마나 평화롭겠어요?”

노파의 눈빛이 일순 반짝였다.

그것이 플로라의 눈에는 꼭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비춰졌다.

마음 끝에 무언가 가시처럼 걸려들었다.

꼭꼭 숨겨둔 어떤 사람이, 또 그의 따뜻함이.

낯선 사람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들킨 기분은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플로라는 결국 레바의 시선을 먼저 피하고 말았다.

말이 끝난 듯하자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시몬이 움직였다.

“고맙군. 레바. 재미있는 얘기였어. 값을 지불하지.”

“괜찮습니다. 폐하. 저의 미천한 능력이 폐하께 도움이 되었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레바가 끝까지 고집을 부리는 덕에 시몬은 결국 그냥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인사를 나누고 가게를 나가려는데, 등 뒤로 레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

“아르제카 신께서는 우리의 삶에 늘 선택지를 주십니다. 제 말은 어디까지나 무수히 많은 선택지 중 하나일 뿐. 옳은 선택을 하셔서 부디 행복해지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레바.”

마지막 대화를 끝으로 시몬과 플로라는 가게를 빠져나왔다.

영 쓸데없는 소릴 들었더니 계속 찝찝하고 이마에 열이 올랐다.

그 순간 왜, 시몬의 얼굴이 떠오른 걸까.

플로라는 자신의 감정 하나 갈무리하지 못해 모든 것을 들켜 버린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애초에 시몬을 향한 감정이 남들보다 특별하고 이상하다고 느끼긴 했지만, 그게 노파가 말한 ‘사랑’일 거라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근데 왜…….

“괜찮아?”

시몬이 길을 잃은 아이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그러쥐었다.

허리를 굽히고 시선을 맞춰오는 시몬을 넋 놓고 바라보던 플로라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괜찮아요.”

“내가 보기엔 전혀 안 괜찮아 보이는데.”

“쓸데없는 말만 들어서 머리가 띵하네요. 정말. 마법으로 과거나 미래를 본 것도 아니면서요.”

플로라는 요동치는 감정을 어쩌지 못해 일부러 툴툴거리며 애써 그 기색을 지워 내려 노력했다.

“마음에 담아둘 것 없어. 네가 들어가기 전에 그랬잖아. 그런 거 믿지 않는다고.”

“그래도 들어 버렸으니 찝찝하네요.”

“위험해. 얼른 잊어버려.”

“왜 위험해요?”

“조금이라도 네 삶에 비슷한 일이 일어나면, 저 말을 진짜라고 믿게 되고 또 찾게 될 테니까.”

“……비슷한 일이라면, 음, 제가 지금 성으로 돌아가다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가능성이 있을까요?”

시몬이 눈을 빤히 맞춰왔다. 그 시선이 오늘따라 뜨겁게만 느껴졌다.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당황한 플로라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선 찰나였다.

“……플로라.”

손목이 붙들리고, 가볍게 몸이 당겨졌다.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덧 따뜻한 품속이었다.

“괜찮아?”

누군가 뛰어가는 소리를 미처 듣지 못했다. 부딪칠 뻔한 걸 시몬이 붙잡아준 모양이었다.

타닥. 타닥. 멀어지는 누군가의 발소리를 들으며 플로라는 자신의 심장도 세게 뛰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다정한 목소리, 그리고 걱정하는 눈빛과 포근한 품속. 이마에 사뿐하게 닿아오는 따뜻한 숨결까지.

정말 모든 것이 완벽했다.

사랑에 빠지기 딱 완벽한 순간이었다.

그건 마치 신의 장난 같았다.

* * *

어떻게 성으로 돌아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냥 다음 약속을 기약하고, 방으로 도망치듯 들어왔다는 것밖에는.

기억이 드문드문 잘려 버린 것처럼 머릿속이 멍했다.

잠이 들거나 정신을 잃었던 건 아니지만, 확실히 그 비슷한 상태이긴 했다.

‘제정신일 리가 없지.’

심장이 쉴 새 없이 뛰어대고, 눈을 마주칠 때마다 귀까지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만 같아 도무지 어떤 것에도 집중할 수 없었다.

레바라는 예언가가 자신에게 몰래 마법이라도 건 것 아닌가 싶은 의심마저 들었다.

“……레이디?”

답답한 마음에 숙소 앞에 있는 작은 정원에 나왔다.

근처를 서성이던 플로라는 어렴풋이 들려온 이든의 목소리에 사색에서 깨어났다.

“아, 이든.”

“뭘 하고 계셨나요?”

“정원을 구경 중이었어요. 꽃이 예쁘게 피었네요.”

플로라는 멍한 정신을 부여잡으며 옅게 미소를 지었다.

“이든은 어딜 가는 중이에요?”

“저야, 레이디께 가는 중이었죠.”

“……아.”

“몸은 좀 괜찮으세요?”

고개를 끄덕이는 플로라를 바라보며 이든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

“안색이 안 좋은 것 같은데요?”

“아픈 건 아니에요. 그냥 좀 마음이 복잡해서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이든은 세심하게 플로라를 살폈다.

얼굴에 근심이 뚝뚝 떨어지고 있으니,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딱히 무슨 일이라고 거창하게 말할 것까진 아니에요.”

쉬이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모습이 더 마음 쓰인다는 걸 이 레이디는 모르는 듯했다.

하지만 이든은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든, 같이 산책이라도 할까요? 지금은 방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서요.”

“레이디가 원하신다면 언제든지요.”

플로라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든도 천천히 그녀의 곁을 따랐다.

쓸데없는 사색을 하는 것보단 몸을 움직이는 편이 더 나았다.

“오늘 낮엔 방에 안 계시던데, 어딜 다녀오셨어요?”

“광장에 다녀왔어요. 성에 온 뒤로 한 번도 밖에 나가본 적이 없어서요.”

“아…… 즐거우셨겠네요.”

“네! 볼 게 많아서 좋았어요. 맛있는 것도 먹었고요.”

플로라는 광장에 다녀온 일들을 생각나는 대로 얘기했다.

이든은 차분하게 그 이야기들을 들어주며 함께 웃었다. 복잡했던 마음이 한결 편해지는 것 같았다.

“신전은 언제 구경시켜 드릴까요?”

“음, 이든이 바쁘지 않을 때요.”

“레이디께는 언제든 안 바쁠 자신 있는데요.”

플로라는 이든의 능청스러운 거짓말에 눈을 흘겼다.

루가르가 이든에 대해 말한 적 있었다.

차기 대신관 후보에 황제의 주치의까지. 분명 그는 바쁠 것이다.

모를 때나 천진난만하게 구경시켜 달라 조를 수 있었지, 그를 알고 나니 괜한 짐을 더한 것 같아 망설여졌다.

아르제카 님께서 아끼는 신관을 멋대로 부려 먹은 대가로 벌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플로라가 대답을 하지 않고 머뭇거리자, 이든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일은 어떠세요? 오전에 비교적 한가해서요. 혹시 약속이 있으신가요?”

“아…… 아니요. 내일 좋아요!”

“그럼 오전에 제가 데리러 갈게요.”

차라리 그가 약속을 정해주는 게 마음이 한결 편했다. 플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걷다 보니 어느새 다시 성기사단 숙소 앞이었다.

플로라가 걸음을 멈추자, 이든 역시 그녀를 따라 멈췄다.

“이든. 저는 이만 들어갈게요.”

“마음은 조금 편안해지셨나요?”

“음, 당장은요. 하지만 완전히 해결된 건 아니겠죠.”

그것은 한순간에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닌 듯했다.

그녀가 섣불리 판단하고 손댈 수 있는 영역의 것이 아니었다.

플로라가 어색하게 웃자, 이든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는 그냥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것도 방법이에요. 신이 정해주신 운명에 맡겨 보는 거죠. 자신의 인생에 무책임한 대답 같지만, 답이 안 나올 때는 한 번쯤은 그래보는 것도 괜찮더라고요.”

“이든도 그럴 때가 있나요? 생각을 억누르지 못하거나, 감정을 억누르지 못할 때요.”

“……그럼요. 저도 사람인걸요.”

“그럴 때는 어떻게 해요?”

“그냥 두는 편이에요. 느끼는 감정대로. 떠오르는 생각대로. 나쁜 방향으로 흐르는 것만 아니면 어떻든 상관없다고 생각해서요. 모든 게 아르제카 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며 따르죠.”

“…….”

“날뛰는 감정을 들여다볼 시간을 적절히 안배하면 해답이 보일 때도 있고요.”

플로라는 입술을 꾹 물었다. 딱 이든다운 대답이었다.

“무엇이든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 그럼 저는 이만. 아르제카 님의 은총이 레이디께 깃들기를.”

“아르제카 님의 은총이 이든에게 깃들기를.”

정중하게 인사하는 이든에게 축복의 말을 건넨 플로라는 이내 성기사단 숙소로 들어섰다.

* * *

시몬은 멍한 표정으로 앉아 제 손을 쥐었다, 놓길 반복했다.

<폐하.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벌써 삼십 분째였다.

군주를 가만히 보다 못한 에르네가 먼저 물었다.

그제야 조금 정신이 돌아온 듯 눈을 깜빡이던 시몬이 고개를 저었다.

“별일 아냐.”

별일 아닌 게 아닌 눈치였지만 더 물어본다고 해서 순순히 대답할 시몬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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