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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26)화 (26/154)

26.

정신을 차리고 보니 결국 성 밖이었다.

플로라는 자신이 언제 쓸데없는 고민을 했냐는 듯 광장에 도착하기 무섭게 눈을 빛냈다.

막연히 생각했던 것보다 화려한 풍경에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인적이 드물고 빛조차 들지 않는 좁은 골목길에서는 왠지 모를 음습함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광장의 중앙 거리는 화려하고 생동감이 넘쳤다.

플로라는 음식을 파는 곳과 드레스를 파는 살롱, 잡화점 등 많은 것들을 구경했다.

하네칸은 천 년이 넘을 정도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제국이었다.

그리고 광장 곳곳에는 그 세월의 흔적들이 여전히 남아 있어 세련된 동시에 고즈넉함까지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특히 광장 중앙에 세워진 거대한 분수는 예술 작품을 보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삼 층짜리 분수는 각 층에 사람 형상을 한 수공예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는 분수가 만들어지기 이전까지 추앙받았던 황제나 황후, 그리고 아르제카 신이 강림했을 때 일어난 마수 전쟁을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

한때는 세밀했을 조각이 지금은 많이 무뎌져 있었지만, 그럼에도 어쩐지 오랜 세월을 겪어온 분수의 묘한 신비감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높은 곳에서부터 아스라이 떨어지는 물줄기는 햇빛을 받아 반짝였고, 싱그럽게 보이기까지 했다.

죽기 전에 한 번은 꼭 보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했던 것이 눈앞에 있으니 벅차오르는 감동을 참을 수 없었다.

“이건 피의 분수라고도 불러.”

웅장한 분수의 자태에 완전히 정신을 놓았을 때였다.

뒤에서 시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그가 말을 걸지 않았더라면, 플로라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이 분수 앞에서 시간을 흘려보냈을 것이다.

“이건 뭐예요?”

“간식.”

그는 과일에 설탕을 굳혀 만든 간식을 플로라에게 내밀고 있었다. 윤기가 흐르는 게 꽤나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얼결에 그것을 받아든 플로라가 시몬을 보았다.

그가 분수로 시선을 옮겼다.

“예전에는 이 광장에서 죄인들을 사형했다는군.”

“…….”

“그들의 피가 전부 이 분수까지 튀어, 사형집행이 있는 날이면 물이 벌겋게 변했대.”

“…….”

“사람들은 지금도 이곳에 사형수들의 영혼이 남아 있어서 분수에 손을 담그면 불행이 찾아올 거라고 해. 물론 근거 없는 미신이지만.”

플로라는 몰랐던 사실에 감탄하며 시몬이 건네준 간식을 깨물어 먹었다.

겉에 코팅된 설탕은 바삭했고, 안에 있는 과일은 씹을 때마다 과즙이 터져 시원했다.

순식간에 입에서 녹아내리는 달콤함에 플로라가 분수에서 눈을 떼고, 간식을 보았다.

“맛있어?”

그녀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간식을 빤히 들여다보고, 먹길 반복하는 걸 구경하던 시몬이 픽 웃었다.

“네. 신기한 맛이에요.”

“…….”

“근데 이건 언제 사 오셨어요?”

“너 분수에 정신 팔려 있을 때.”

플로라가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시몬은 농담으로 한 말이겠지만, 실수를 저지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는 저랑 꼭 같이 가요.”

그녀는 결의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플로라의 낯빛이 조금 흐려졌다는 걸 깨달은 시몬이 물끄러미 안색을 살폈다.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이유를 가늠하듯 가만히 들여다보고만 있자, 곧 자그마한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아무리 주변에 기사님들이 있다고 해도,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저만큼 대처가 빠를 순 없을 거예요. 제도가 궁금해서 따라 나오기는 했지만……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걱정된단 말이에요.”

“…….”

“그러니까 제 옆에 꼭 붙어 계셔야 해요. 아시겠죠?”

걱정. 방금 걱정이라고 했나.

시몬이 잠시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뒤늦게 번져오는 이상한 전율이 온몸을 관통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고통이기보단 짜릿한 쾌감에 가까웠다.

‘자신을 걱정해서’ 한 말이라는 게 왜 이리 기분 좋게 들리는지 모르겠네.

시몬은 손을 뻗어 플로라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녀에게 손을 뻗는 것이 아무래도 습관이 된 듯했지만 아무렴 좋았다.

별처럼 빛나는 머리칼이 손가락 사이사이로 빠져나가는 이 느낌은 언제나 그의 심장 한구석을 포근하게 만들었다.

이건 그에게 허락되지 않은 감정이었지만 그렇다고 쉽게 떨쳐낼 수도 없었다.

시몬은 조금 씁쓸하게 웃었다.

“내 기사로 삼고 싶다. 에르네만 허락해 주면 당장 근위대로 데려왔을 텐데. 아쉬워.”

“…….”

“플로라. 날 걱정해 주는 네 마음은 알겠지만 오늘은 놀러 나온 거니까, 걱정을 조금만 버려. 응?”

플로라는 타이르는 듯한 시몬의 말에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뭔가 잘못 엮인 것 같단 생각은 계속해서 들었지만, 시몬이 이렇게까지 말하니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저 눈. 저 아련하게 빛나는 눈이 문제였다.

“알았어요.”

플로라는 결국 한발 물러서는 수밖에 없었다.

저런 표정은 반칙이잖아. 이놈의 미인계. 어떻게 해도 이길 수가 없다.

“자.”

곧 시몬이 손을 내밀었다. 플로라가 의아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잡아. 혼자 어디 가지 말라며?”

“…….”

“잡아두고 감시해야지. 그러다 나 잃어버려.”

말도 안 되는 소리에 플로라는 결국 픽 웃음을 흘리며 손을 마주 잡았다.

손끝과 심장이 간질거렸다.

그녀는 만족한 듯 걷기 시작하는 시몬을 힐끗 올려다보았다.

* * *

시몬은 어둡고 좁은 골목길도 익숙한 듯 서슴지 않고 다녔다.

빛을 잃은 어두운 거리에서 꼼지락거리는 인기척이 느껴질 때마다, 플로라는 저도 모르게 바짝 긴장을 해야 했다.

시몬은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확실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는 깊은 골목 안에 위치한 작은 가게 앞에 멈춰 섰다.

“예언의 집이야. 꽤 잘 들어맞는다고 귀족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해.”

낡은 건물에는 오랜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입구 앞에 걸린 등불의 불씨가 금방이라도 꺼질 듯 깜빡거렸다.

아무리 봐도 음산한 기운만 풍겨 나올 뿐, 별로 좋게 느껴지진 않았다.

“내가 한 번 들른 적이 있는데, 주인이 내 얼굴을 용케 알아보고 말을 안 해주는 거 있지. 그러니까 네 것으로 좀 보자!”

“저는 예언이나 점괘 같은 것엔 관심이 없는데요. 시몬. 믿지도 않고요.”

그의 경쾌한 목소리에도 플로라는 주변에 수상한 자가 없는지에만 집중한 채 심드렁히 답했다.

그도 그럴 게 사람 많은 중앙 거리를 두고, 골목길 안으로 들어왔으니 경계심이 바짝 들 수밖에 없었다.

“믿지 않으니 다행이지. 이런 건 믿으면 큰일 나. 그냥 재미로 보는 거지.”

돌아가자고 제안했지만 청개구리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결국 그에게 이끌려 가게 안에 발을 디뎠다.

가게의 내부는 외관만큼이나 서늘하고 허름했다.

당장에라도 암살자가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라, 플로라는 시몬에게 한 걸음 더 바싹 붙어 섰다.

에르네와 그의 호위 기사들이 안에 함께 들어오진 않으니 여기선 진짜 그녀뿐이었다.

천장은 낮았고, 각종 괴이한 물건과 오래된 서적들이 정돈되지 않은 채 쌓여 조금 갑갑한 느낌이 들었다.

장애물을 피하며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들어가니, 그 끝에 백발의 여인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그녀의 얼굴엔 지나온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오셨습니까. 폐하.”

시몬이 모자를 벗자마자 한눈에 그를 알아본 노파가 쉰 목소리를 냈다.

“오랜만이야. 레바.”

“폐하께서 이런 누추한 곳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오늘은 내 점괘를 조르자고 온 게 아니니, 그리 단호한 표정 지을 것 없네. 그저 이 여인에 대해 알고 싶어서.”

예언가 레바가 짧은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그럼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지금은 저를 돕는 아이가 잠시 심부름을 가서 마땅히 내어 드릴 수 있는 것이 없군요. 송구합니다. 폐하.”

“아아, 괜찮아. 금방 갈 거니까.”

시몬은 플로라를 의자에 먼저 앉힌 뒤, 자신도 그 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황제에게 향해 있던 레바의 시선이 플로라에게로 옮겨갔다.

“아가씨, 제가 손을 좀 잡아도 되겠습니까.”

금방이라도 꺼질 불빛처럼 탁하기만 한 동공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플로라를 품고 있었다.

자신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아 기분이 나쁘다가도, 또 묘하게 신비로워서 시선을 피하고 싶지 않았다.

플로라는 노파의 말대로 테이블 위에 손을 올렸다.

그에 손을 맞잡은 레바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무언가 술수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든이 내뿜던 마법의 흔적은 결코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손과 손이 맞닿은 감촉만이 손끝을 맴돌았다.

짧은 시간이 지나고, 그녀가 눈을 떴다.

“험난한 삶을 살아오셨네요.”

말하는 목소리 끝이 떨리는 것 같아 보니, 노파의 눈가가 약간 붉어져 있었다.

마치 플로라의 과거를 짧은 순간, 모두 보고 온 듯한 눈빛이었다.

그녀의 상처와 아픔을 모두 이해한다는 듯, 그리고 연민하는 듯 헤아리는 목소리에 이상하게 마음이 동요했다.

험난하다면 험난한 삶이었다.

아이든에게 실험을 당하면서 죽을 뻔한 적도 여러 번이었고, 임무를 하다 붙잡혀 감옥에서 고문을 당한 적도, 또 동료에게 공격을 당한 적도, 마수에게 죽임을 당할 뻔한 적도 있었다.

매일이 생존을 위한 게임 같은 삶이었다.

“……삶은 누구에게나 험난하죠.”

플로라는 생각을 갈무리하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지금도 고통받고 있을 센칸의 기사들이 아니더라도, 인간은 누구에게나 각자의 고난과 시련이 있는 법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알고 이해하기에 자신의 삶만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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