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마수의 몸집이 커서 화살로만 공격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한 플로라는 무기를 바꿔 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몸집이 크니 원거리보단 근거리 공격이 더 둔하지 않을까 싶은 기대도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더 불쾌하게 생긴 놈이었다.
다리에 듬성듬성 난 털들이 칼날처럼 반짝이고 있었는데, 근접 공격을 방해하기 위한 무기인 듯했다.
실을 뿜어내던 것을 멈춘 마수는 플로라의 예상대로 그녀를 밟기 위해 다리를 움직였다.
여러 개의 검날이 금방이라도 온몸을 관통할 듯 다가온다. 발을 헛디디거나 잘못 피하면 끝이었다.
역시 근접 전투는 체력 소모가 훨씬 심했다.
플로라는 턱 끝까지 숨이 막히는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준비되어 있던 단도를 들었다.
최대한 공격이 둔해지도록, 몸통에 더 가까이 붙자 거미의 몸통에 난 털들이 고슴도치처럼 바짝 서는 것이 보였다.
플로라는 힘을 다해 몸통에 단검을 찔러 넣었다.
꾸욱, 박힌 단검 주변으로 보랏빛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짧은 검의 길이 탓에 그녀의 손에도 거미의 가시가 박혔고, 이내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손이 검붉은 피로 얼룩졌다. 몸을 찢어버릴 요량이었는데, 검이 짧아 불가능할 것 같았다.
한 발 뒤로 물러난 플로라는 이번엔 들고 있던 검으로 놈의 몸통을 찔렀다.
제대로 먹혀들긴 한 것인지 마수의 몸부림이 한층 격해졌다. 공격패턴을 종잡을 수 없었다.
플로라는 반쯤 박힌 검에 겨우 매달렸지만, 몸에 거센 반동이 일 때마다 마수의 가시에 살갗이 찢기는 고통을 느껴야 했다.
하지만 이대로 손을 놓으면 끝이라는 걸 알았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검에 매달린 채 몸에 힘을 실어 천천히 가죽을 찢어 내렸다. 그럴수록 플로라의 몸도, 마수의 몸도 점점 상처가 덧대어졌다.
끈적한 피가 손바닥을 적셔 미끄러웠다. 약점을 노려야 했는데, 너무 무모하게 싸웠다는 것을 깨달은 찰나였다.
몸부림치던 거미가 한 줌의 흙으로 흩어지고, 플로라가 땅에 철퍼덕 떨어졌다.
억겁 같았던 십 분이 지나간 모양이었다.
죽기 전엔 끝나서 다행이다.
플로라는 그렇게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시험을 끝마쳤다.
* * *
“저 정도면 쟤는 좀 무서운 거 아니야? 저런 진주가 어디 숨어 있다 이제 나타난 거야.”
하키라가 플로라의 전투를 바라보며 침을 질질 흘렸다.
확실히 아직 어설픈 부분이 있긴 했어도 그건 하키라 개인의 욕심일 뿐이었다.
신입이 3급 마수를 혼자서 완벽하게 때려잡으면 단장을 시켜야지, 왜 신입에 있겠나.
“활을 훨씬 잘 쏘는군. 달리면서 화살 두 개를 동시에 쐈는데, 정확하게 명중했어.”
“나도 봤어. 화살에 마력을 불어 넣으면 파급력이 어마어마하겠는걸?”
단장들은 플로라의 전투에 매 시각 감탄하는 중이었다.
하키라는 플로라에게 홀딱 반한 듯 대놓고 칭찬만 늘어놓았고, 카신은 하키라처럼 신이 난 표정은 아니었지만 그의 말에 동조하며 칭찬을 덧붙였다.
“움직이는 게 엄청 민첩해. 다람쥐 같아!”
“그렇군. 활을 잘 쏘는 걸 보니 나무도 잘 타겠어.”
“저 정도면 천재야.”
두 사람이 마치 자신의 아이를 자랑하는 팔불출처럼 보이는 탓에, 에르네는 설핏 미간을 구겼다.
“제멋대로 흘러나오는 저 마력만 어떻게 하면 훨씬 나아지겠어. 체력이 금방 깎이잖아.”
카신이 동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말이야. 카신 경.”
“…….”
“폐하께서는 왜 오신 거지? 나 아까부터 궁금했잖아.”
“그걸 왜 내게 묻나? 저치한테 물어야지.”
심드렁한 카신의 대꾸에 하키라가 제 오른편에 서 있는 에르네를 보았다.
“에르네 경이 말씀드린 겁니까? 마력을 가진 신입이 있다고?”
에르네는 고개를 단호하게 저었다.
“흠. 그래요?”
에르네가 폐하의 움직임을 모를 리 없다고 생각한 두 단장은 대답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모른 척해야겠지? 차림새를 보니 몰래 나오신 것 같은데.”
“그래야겠지.”
“아…… 에르네 경, 설마 플로라를 근위대로 데려가려는 거 아니죠? 그건 안 돼요.”
에르네는 알겠다는 듯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린 아군입니다! 다행이에요. 그 마음 변하지 말아요.”
그제야 의심의 눈초리를 거둔 하키라가 방긋 웃었다.
* * *
플로라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동굴로 돌아온 것을 보고 정신을 잃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낯선 방이었다.
익숙한 캐노피가 보이지 않아 당황한 플로라가 눈을 굴렸다. 하지만 곧 침대 옆에 앉아 있는 이를 발견하고 안도했다.
‘……잠든 건가?’
시몬은 여전히 백색의 로브를 입은 채였다. 눈을 감고 있어 주니 편하게 감상할 맛이 났다.
한쪽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채 앉은 고고한 자태를 보고 있으면 아르제카 신께서 지상에 내려보낸 천사가 아닐까 싶은 합리적 의심도 들었다.
드러난 길고 하얀 손에 시선이 머물렀다. 동굴에서 자신을 꽉 붙들어주던 모습이 생각나 그때처럼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조금은 난폭해도 용서가 될 법한데 사람이 따뜻하기까지 하면 좀 많이 반칙 아닌가. 매번 다 가졌다는 걸 알면서도, 새삼스레 놀라웠다.
그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작은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시몬도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다시 자는 척할 타이밍을 놓친 플로라가 시몬과 시선을 맞닥뜨렸다.
도둑질하다 걸린 사람처럼 괜히 뜨끔했다. 플로라는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누가…… 아, 폐하셨군요.”
방에 들어온 사람은 이든이었다.
다른 신관이 먼저 와있는 줄 알고 당황했던 그는 금세 시몬임을 알아보고 옅게 웃었다.
시몬은 이든의 인사에도 그저 고개만 까딱한 채, 팔짱을 끼고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여 플로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레이디. 오랜만에 뵙네요.”
“오랜만이에요. 이든.”
플로라는 애써 시몬의 시선을 모른 체하며 이든에게 인사했다.
생각해보니 꼭 누워 있을 때만 이든을 만나는 것 같아 민망했다.
“신전 구경을 하고 싶다고 하시더니. 이렇게 오시네요.”
“여기가…… 신전이에요?”
“옆이 신전이고, 여긴 성기사들이 머무는 숙소입니다. 입단 시험을 보셨던 분들 모두 이곳에 묵고 계세요.”
플로라가 눈을 깜빡였다.
“치유가 끝나면 찾아오실 줄 알고 기다렸는데, 소식이 없으셔서 좀 서운했어요.”
“아…… 시험 준비를 하느라, 좀 바빴어요.”
“앞으로도 시간은 많으니, 조금 안정이 되시면 그때 같이 구경해요. 마침 신전도 바로 옆이니까요.”
“좋아요!”
플로라와 이든이 서로를 보며 생긋 웃었다.
“놀러 왔어?”
그리고 분위기에 맞지 않는 삐딱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시몬의 날 선 눈이 이든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자, 그럼 상태부터 확인해볼까요.”
가볍게 황제의 말을 모른 체한 이든이 입을 열었다.
“일어나실 수 있겠어요?”
“네.”
이든은 플로라를 부축해주었다.
“이제 몸을 천천히 움직이면서 불편한 곳이 있나 확인해주세요.”
“……아!”
그의 말대로 팔과 다리를 움직여 보던 플로라가 돌연 얕은 비명과 함께 몸을 웅크렸다.
왼쪽 팔목에 검이 박힌 것 같은 짧고 강렬한 통증이 느껴진 탓이었다.
“레이디, 입단 시험에서 팔을 다쳤었나요?”
이든의 말에 잠깐 잊고 있던 끔찍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거미의 몸에 돋아난 가시에 찔려 살이 꿰뚫리는 고통을 느꼈었다.
“……네.”
“레이디의 신경이 그때의 통각을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네요.”
“…….”
“제가 좀 봐도 될까요?”
이든의 정중한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방금 느낀 통증 때문인지 섣불리 팔을 움직이기가 무서웠다.
그러자 이해한다는 듯, 이든이 다시 입을 열었다.
“……상처가 있나 확인도 해야 하니, 제가 팔 부분만 옷을 좀 찢어낼게요. 레이디는 편하게 계셔도 돼요.”
이든은 자신이 가지고 다니는 작은 상자에서 가위를 꺼내 옷소매를 자르기 시작했다.
한참 집중하는 듯싶더니, 이든이 무심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레이디가 치유 받는 동안, 폐하께서는 옷을 갈아입고 오시는 편이 어떻겠습니까? 대신관님께 들키기라도 하면 저 엄청 혼나요.”
“……그거 괜찮겠군.”
“제 치유력은 정신적 안정이 가장 중요한데, 폐하께서 지금 방해를…….”
“그냥 나가라고 하지 그래.”
시몬이 짜증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방을 나가버릴 것 같더니, 그가 손을 뻗어 플로라의 머리칼을 슥슥 매만졌다.
“다시 올게. 치유 잘 받고 있어.”
갑작스레 닿은 손길에 플로라가 넋을 놓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면에 파동이 일듯, 때론 잔잔하게, 또 때론 격하게 요동치는 것.
미지의 감정이 해일처럼 덮쳐왔다.
‘……이상하다니까. 정말.’
플로라는 결국 시몬이 방을 나설 때까지 그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봐야 했다.
* * *
“어! 대장.”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걸음을 멈춘 에르네가 뒤를 돌아보았다.
<……뭐지. 이건?>
근위대 단복을 입은 채, 쟁반을 들고 있는 루가르의 모습은 영 어색했다.
에르네의 시선이 그녀가 들고 있는 것에 닿았다.
“아, 이거 플로라 님께 드리려고요. 시녀 일도 오늘이 마지막이잖아요. 마지막 인사도 드릴 겸 해서요.”
루가르의 대답에 에르네가 못마땅하다는 눈을 했다.
<그 여자와 가까이 지내지 말래도.>
핀잔을 주자 루가르가 또 잔소리라는 듯 볼에 바람을 불어 넣었다.
에르네는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것을 겨우 참아내며 손을 뻗었다.
그녀의 머리에 붙은 나뭇잎이 계속 신경에 거슬린 탓이었다.
하지만 루가르가 몸을 움찔하며 눈을 감아 버리자, 그는 일순 행동을 멈췄다. 허공에 뜬 손이 갈 곳을 잃고 방황했다.
“아…… 저는 한 대 쥐어박으려는 줄 알고.”
어느새 실눈을 뜬 루가르가 머쓱하게 웃었다.
<내가 널 때린 적 있던가.>
에르네는 머리칼에 붙은 나뭇잎을 무심하게 툭 떼어주며 표정을 굳혔다.
그제야 대장이 무얼 하려 했는지 깨달은 루가르가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그건 아닌데요, 그냥…….”
단숨에 의기소침해진 작은 목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에르네는 고개 숙인 루가르를 바라보다가 화제를 바꿨다.
<……이거 들고 출입이 가능해?>
“아! 안 그래도 아침에 이든 님을 만나 여쭤봤어요! 성기사단이 머무는 숙소니 가능하다고 하셨어요.”
<…….>
“근데 대장은 왜 여기 계세요?”
<폐하께서 그곳에 계신다.>
“그럼 저랑 같이 가요!”
에르네는 대답 대신 그녀의 쟁반을 빼앗아 들었다.
“아, 제가 들어도 되는데……!”
놀란 루가르는 안 그래도 크고 동그란 눈을 더 크게 뜨며 에르네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에르네는 들은 체도 않고 앞질러 걷기 시작했다.
걸어가는 대장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루가르는, 이내 같이 가자고 소리치며 쫄랑쫄랑 그 뒤를 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