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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22)화 (22/154)

22.

두 번째 시험 응시자들에게 기본적으로 주는 무기는 활과 검 그리고 단도였다. 전부 무기를 지급받고 나서야 본격적인 시험이 시작됐다.

마법사들이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리고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듯 고대어를 외우기 시작했다.

플로라는 멍하니 마법사들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어쩐지 상상 이상의 것이 펼쳐질 것 같단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순간, 바닥이 잘게 진동했다. 그 강도가 점차 세지더니, 일순 발목이 땅에 묶인 것처럼 몸이 무거워지고, 숨을 쉬기가 힘들어졌다.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던 플로라는 벌벌 떨리는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렸다.

눈앞에 기이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마치 동굴 벽에 숨겨진 보석들이 쏟아져 내리는 것처럼, 환한 빛이 주변에 잘게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플로라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다른 것에 집중하고 있던 참이라 플로라는 속수무책으로 그에게 끌려갔다.

찰나에 발을 헛디뎠으나, 단단한 누군가의 품에 갇혀 다행히 넘어지지 않았다.

“쉬이. 눈 감아. 어지러울 거야.”

남자의 체향은 익숙했다.

중심을 잃지 않도록 그녀를 단단하게 붙들어주고 있는 손은 따뜻했고, 귓가에 와 닿는 목소리는 무척 달았다.

‘시몬. 가지 않았구나…….’

그게 왜 이리 안심이 되는 건지.

플로라는 일순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것을 느끼며 시몬의 말대로 천천히 눈을 감았다. 흐트러졌던 호흡도 점차 안정이 되었다.

피가 거꾸로 역류하는 듯한 중압감이 사라지자, 단단히 그녀를 붙잡아주고 있던 손에도 살짝 힘이 풀렸다.

플로라는 눈을 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깊은 동굴 안이었는데, 지금은 나무 하나 없이 모래만 나부끼는 사막에 서 있었다.

‘……이게 만들어진 세계라면, 너무 현실적인 거 아닌가?’

마법이 만들어낸 세계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플로라가 광활한 사막의 풍경에 감탄하고 있을 때였다. 첫 번째 팀이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들이 움직이자, 땅이 화답하듯 잘게 전율이 일었다.

부서진 황금처럼 반짝이는 모래들이 잘게 흩어지고, 튀어 오르길 반복하다 이내 홍해가 갈라지듯 양쪽으로 나뉘었다.

시험을 치를 사람들은 점차 강해지는 지진에 균형을 잃어 넘어지거나 당황하기 시작했다.

“왜 여긴…….”

하지만 플로라가 있는 곳은 멀쩡했다.

“공간이 분리되어 있어. 이쪽은 안을 볼 수 있지만 안에선 여길 볼 수 없어.”

플로라가 혼자 중얼거린 말을 들은 모양인지 시몬이 답했다.

아주 작게 속삭이는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에 닿을 때마다 살갗에 소름이 일었다.

여린 숨결이 피부를 스치는 감각이 생경했다.

플로라는 뻣뻣하게 굳어선 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시험에 집중하려 해도 온 신경이 뒤에 있는 시몬에게 쏠리는 기분이었다.

그때 갈라진 모래 사이에서 전갈처럼 생긴 마수가 튀어나왔다.

응시자들은 혼비백산했으나,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공격 자세를 취했다.

“4급이네. 신입 일곱 명에 4급 마수 한 마리라. 나쁘지 않아.”

응시자들이 전투에 돌입했다. 마수가 나오면서부터 시험에 집중하기 시작한 플로라는 참혹한 전투가 이어지자, 주먹을 살짝 말아 쥐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곁에 있던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는 모습을 지켜만 봐야 하는 것은 불쾌한 죄책감을 일으켰다.

낯선 사람들을 상대로는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플로라는 감정이란 것에 미숙했다.

감정은 마치 술수처럼 성가시고 사사로운 것이라 여겨왔기 때문에 그것을 항상 인식하고, 절제하며 살아왔다.

센칸을 벗어난 뒤로부터는 사람들 틈에 섞여 살고 싶단 꿈을 꾸게 되면서, 만났던 사람들에게 조금씩 ‘감정’이란 걸 깨닫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녀가 모르는 감정의 세계는 무궁무진했다.

그녀는 혼자 살아남는 것에 익숙했다. 제 목숨까지 잃을 것 같다면, 동료는 그때부터 동료가 아니었다. 방해가 된다면 베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타인을 향한 정이란 건 원래 없었고, 가지고 싶지도 않았지만 센칸을 나오면서부터 점차 바뀌기 시작한 것이 어느새 이렇게까지 변한 모양이었다.

순간, 주마등처럼 그동안 자신이 외면해온 것들이 떠올랐다.

소중하다고 여겼던 것까지도 모두 외면해왔던 삶이.

르네를, 그 아이를, 제게 호의를 베풀어줬던 마을 사람들을.

속이 쓰렸다. 울컥, 속에서 응어리진 무언가가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이건 회한의 감정일까. 아니면, 변화를 달가워하는 기쁨의 감정일까.

그때 눈앞에서 도망치던 기사 한 명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주관자들은 그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았으나, 응시생들은 하나 같이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감아 버렸다.

플로라는 저도 모르게 앞으로 나가려다 이내 주먹을 꽉 쥐고 고개를 숙였다.

시몬이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다독여주었다.

“참 잔인한 시험이야.”

들려오는 그의 말에 플로라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정확히 십 분이 지나자마자, 마수는 모래처럼 잘게 부서져 흩어졌다.

이어 모래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지우개로 지워지듯 주변이 어둡게 변했다.

그리고 어느덧 다시 동굴이었다.

신관들은 쓰러진 응시생들에게로 향했다. 처음 주의사항을 일러줬던 것처럼 많은 피를 흘렸던 사람들이 멀쩡하기만 했다.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시험은 계속 진행됐다.

이번엔 7명이 무리 지어 다니는 5급 마수 5마리를 처치하는 것이었는데, 그중 한 명은 가상 세계에 들어가자마자 기절하는 바람에 기권 처리가 되었다.

마수를 제대로 처치한 팀은 하나도 없었다.

이윽고 플로라의 차례가 되었다.

“무리할 필요는 없어. 처치가 목적인 시험이 아니니.”

“…….”

“응원할게.”

시험 응시자들은 거의 실신한 상태라 이제 남아서 지켜보는 것은 시험 주관자들뿐이었다.

플로라는 시몬의 응원을 듣고는 마법사들 앞으로 나갔다. 앞선 시험을 다 보고 나니 긴장도 되고, 두려움도 일었다.

이미 마수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마굴에 들어가 본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활을 쥔 손에 땀이 죽 났다.

* * *

플로라가 눈을 떴을 땐, 습기가 가득 찬 숲속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바닥엔 옅은 안개가 깔려 있었고, 땅은 축축해 질척였다.

어쩐지 음습한 기분이 들었지만, 플로라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눈앞에 가려진 수풀을 젖히자, 누군가 바닥에 웅크린 것이 보였다.

‘……인간?’

아니. 아니다. 자세히 보니 인간이라기엔 피부가 썩은 것처럼 푸른색으로 보였고, 머리도 다 빠진 채였다.

마수는 주저앉아 습지에 기어 다니는 벌레를 주워 먹고 있었다.

플로라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나는 것을 느꼈다.

키린 왕국의 마굴에 들어갔던 때가 떠올랐다. 마굴에 있던 3급 마수 역시 인간의 흉내를 내듯, 기괴한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예상이 맞다면…….

플로라가 조심스레 활을 들어 놈의 관자놀이를 향해 쐈다.

화살은 적중했지만, 마수는 죽지 않았다.

벌레를 먹던 마수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아무 타격도 없는 양 제 관자놀이에 박힌 화살을 쑥 빼냈다.

끈적거리는 보라색 피가 화살에 달라붙어 길게 늘어졌다.

머리가 아니라면…….

그녀는 침착하게 한 번 더 화살을 쐈다. 이번엔 오른쪽 눈알에 명중했다.

몸을 비틀거리던 마수가 기괴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인간의 몸집이었던 마수는 서서히 그 부피를 늘려가기 시작했다.

배가 크게 부풀어 오르며 동그란 몸이 되더니 손이 늘어나고, 옆구리를 뚫고 억센 털이 난 다리가 나왔다.

머리는 조금 커졌지만, 기괴한 인간의 얼굴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플로라가 예상했던 대로였다.

3급 마수는 인간의 형상을 할 수 있으나, 그 상태론 어떤 공격도 치명상을 입힐 수 없었다. 응축된 마력이 자가 치유를 하기 때문이다.

진짜는 본체였다. 본체로 변화시키고 약점을 찾아야 그를 죽일 수 있었다.

마굴에서 그녀가 싸웠던 것은 거대한 개미였는데, 이번에는 거미였다.

플로라보다 세 배는 족히 큰 몸집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굴의 악몽이 떨쳐지지 않는다.

30명이 들어가서 고작 3명이 살아 나왔던 지옥의 전투였는데, 이제는 혼자 해야 한다는 것에 실소가 터졌다.

그때보다야 능력이 성장은 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혼자…….

이 마법사들, 능력치는 제대로 확인한 거 맞을까.

마법사들은 다 돌팔이라고 생각해왔는데, 하네칸의 황실 마법사에게조차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라 그 생각은 더더욱 굳혀졌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아무리 의문을 품고, 돌팔이라 욕해봤자 이 안에 들어온 이상, 플로라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저 마수와 싸워야 했다.

그저 십 분. 십 분만 버티면 된다.

곧 마수가 공격을 시작했다. 몸통에 달린 커다란 입에서 화살처럼 실이 뿜어져 나왔다. 그녀도 짧게 심호흡을 하고 몸을 움직였다.

실은 화살처럼 빠르게 날아왔다.

플로라는 도저히 화살을 장전할 타이밍을 잡을 수 없어 계속 달렸다.

이대로 가다간 십 분은커녕 오 분도 버티기 힘들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활을 쏘는 것처럼 일정한 시간차를 두고 공격이 날아온다는 것을 깨달은 플로라는, 감으로 거리를 벌리며 화살을 장전했다.

그리고 고도의 집중력으로 놈이 실을 내뿜는 입을 향해 쐈다.

화살이 정확하게 명중하자 놈이 괴이한 울음소리를 내며 공격을 잠시 멈췄다.

그렇게 다시 화살을 장전하던 찰나였다.

불시에 마수의 공격이 다시 이어졌고, 플로라는 눅눅한 땅 때문에 순간 발을 헛디뎠다.

‘아……!’

금세 균형을 다시 잡긴 했지만, 날아오는 실을 제대로 피하진 못했다.

날카로운 실이 비껴간 허벅지가 욱신거렸다.

플로라는 계속해서 화살을 쐈다. 고작 한 대 잘못 맞았다고 겁먹을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긴장이 풀려 좋았다.

앞서 처참하게 당한 응시생들을 떠올릴 여유조차 생겼다.

플로라는 그들을 바라보며 느꼈던 감정들을 상기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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