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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21)화 (21/154)

21.

“이런 옷을 좋아하는군. 취향은 잘 알았어.”

“얘기가 왜 그렇게 흘러요?”

“아니야? 그럼 어떤 취향이지?”

“대체……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당연히 시몬은 뭘 입어도 다…….”

이런 얼굴로, 저리 매혹적인 웃음을 지으면 무엇이든 술술 말해버릴 수밖에 없었다.

저 얼굴에서 자백제가 흘러나오고 있기라도 한 걸까.

“다?”

놀리는 듯한 음성에 플로라는 고개를 숙여 버리는 것으로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확실히 전했다.

그에 시몬이 짧게 소리 내어 웃더니 손을 뻗었다.

머리칼을 슥슥 매만지는 손길이 퍽 부드러워서, 저도 모르게 다시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간지럽고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불쑥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시몬이 이렇게 하니까 자꾸 익숙해지잖아요.”

“응? 무슨 말이야?”

시몬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절 강아지 대하듯 하는 거요! 아까 다른 사람이 시몬처럼…….”

“누가 네 머리를 쓰다듬었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시몬이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플로라가 입을 다물고 눈을 깜빡였다.

……이런 분위기로 흘러갈 얘기가 아닌데요?

“아, 아니요. 머리를 쓰다듬은 게 아니라…… 아까 누가 시몬이랑 비슷한 표정을 지으면서 절 봤는데, 그게 익숙하다고 느꼈어요. 그게 다 시몬한테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서…….”

여기서 왜 구구절절 변명을 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일단 시몬의 심기가 상당히 불편한 듯하니 오해를 풀어주는 게 급선무였다.

“누가 감히 나랑 비슷한 표정을 지었지? 어떤 표정을 지어도 비슷할 리가 없는데.”

“네?”

“나만큼 잘생긴 놈이 이 성에 있을 리가 없잖아.”

얘기가 산으로 갔다. 플로라가 미간을 좁히며 푸우, 하고 입술 사이로 한숨을 살짝 내뱉었다.

시몬은 머리를 만지작거리던 손을 내려 그녀의 이마를 톡 건드렸다.

“아무튼 나랑은 달라.”

“…….”

“나한테만 익숙해지면 돼.”

“방금 그 말 뼛속까지 황제 폐하 같았어요.”

“틀린 소린 아니군. 태생부터 황제로 점쳐진 인생이었으니.”

제국을 품에 안고 태어나는 건 어떤 기분일까. 아기 때부터 모든 것을 손에 쥔 채 태어났으니 별 감흥이 없었으려나.

플로라는 시몬을 멍하니 보았다.

어쩌면 다 가지고 태어난 것만이 썩 좋은 건 아닐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지켜야 할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만큼 치열해야 하니까.

“이제 가자. 다음 시험 준비해야지.”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시몬이 플로라에게 손을 뻗었다. 플로라는 망설임 없이 그 손을 마주 잡았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온기가 따스했다. 이든에게 치유를 받은 것도 아닌데, 오늘 하루 쌓인 피로가 말끔하게 풀리는 것 같았다.

* * *

두 번째 시험이 치러지는 마법 게이트는 거대한 동굴이었다.

플로라는 합격자들이 서 있는 곳에 나란히 섰다. 슬쩍 주변을 살폈지만 시몬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떠났나 싶어 아쉬운 마음이 들려던 찰나, 앞에 선 기사가 말을 시작했다.

“이번 시험은 7명, 8명으로 팀을 나눠서 진행됩니다. 지금 선 줄에서 반반 딱 나누면 되겠네요. 뭐 팀은 알아서 구성하셔도 되고요.”

“…….”

“마법으로 만든 가상의 마수와 십분 간 싸우시면 됩니다. 주의할 점은…….”

1. 마법으로 만들어지는 마수는 마법석이 팀원의 능력치를 평가해 조절된다.

2. 마수에게 공격당하면 통각은 똑같이 느껴지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입었던 상처는 사라진다. 죽었다 하더라도 현실에서는 기절한 정도일 뿐. 다만 통각이 있는 한 죽음의 공포 또한 똑같이 느낄 것이며 그로 인한 정신적 후유증도 있을 수 있으니 절대로 무리하지 말 것.

3. 포기하고 싶은 사람은 처음 입장했던 곳으로 돌아가면 된다.

길게 설명하는 주의사항 중에서 핵심만 천천히 곱씹으며 플로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으로 또 다른 세계를 만들어 내다니.

플로라가 그동안 겪어보지 못한 세계였다. 왜 센칸이 마법석을 밀수입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마력에 집착하는지 어느 정도는 알 것 같았다.

“길이 어두우니 잘 따라오세요.”

시험의 주관자들과 합격자들 모두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검은 로브를 입은 마법사들이 앞장서 걸으며 불을 피우긴 했지만, 어둠이 사라진다고 해서 안에서 느껴지는 웅장함마저 지워지진 않았다.

진짜 마굴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마굴은 차원의 결계와 인접한 나라에서만 생겼다.

플로라는 키린 왕국의 의뢰를 받아 그 마굴에 뛰어들었던 적이 있었다.

센칸처럼 선천적인 마력도 없는 나라였고, 그래서 마굴이 생겨서도 안 되는 곳이었지만 돌연변이처럼 생겨난 까닭에 왕국 사람들이 아연실색했던 기억이 났다.

그 마굴은 굉장히 작아서 5급 마수 3마리, 4급 마수 1마리, 그리고 3급 마수가 1마리가 있었는데, 센칸 기사와 키린 왕국 기사까지 총 30명이 들어갔지만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고작 세 명밖에 되지 않았다.

플로라를 포함해 살아남은 생존자들도 거의 죽다 살아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때는 뭣도 모를 때니 패기 있게 들어갔지만 지금은 달랐다.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들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와중에 고작 일곱 명, 여덟 명으로 마수를 처치하러 들어가야 한다니.

죽지 않는다고 해도 아마 느낀 그 고통만큼은 평생 잊지 못하게 될 것이었다.

하네칸의 기사가 되려면 이 정도는 버텨야 한다는 건가.

플로라는 웅장한 동굴이 주는 위압감에 짓눌려 살짝 어깨를 떨었다.

깊은 동굴 속에는 오래된 마법진이 있었다. 검은 로브의 마법사들이 첫 번째 팀에게 마법석을 하나씩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플로라도 원형으로 된 자색의 마법석을 받아 들었다.

“한 분씩 차례로 나와서 마법진 위에 서주세요.”

마법사의 통솔에 따라 첫 번째 팀은 한 명씩 천천히 마법진에 올라갔다.

올라갈 때마다 손에 든 자색의 마법석에서 빛이 났는데, 아마 그것으로 능력치를 평가하는 듯했다.

곧 플로라의 차례가 됐다.

분위기가 하도 조용하고 엄중해서, 당장 마수와 붙는 것도 아닌데 긴장이 됐다.

마법진 위에 오르고, 마법사들이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우자 곧 손에 들고 있던 마법석이 빛나기 시작했다.

희미한 빛을 뿜어내던 것은 점차 강해졌다. 지금까지 이렇게 강한 빛을 뿜어낸 사람은 없었다.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낀 찰나였다.

파삭, 손에 들린 마법석이 깨지며 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세상에.”

곁에 있던 검은 로브의 마법사가 경이로운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소리만 들렸을 뿐, 동굴 안은 아무도 남지 않은 것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플로라는 제 손을 내려다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자색을 띠고 있던 마법석이 어느새 하얗게 변해 유리처럼 알알이 흩어져 있었다.

마법석은 마수의 마력이 응집된 수정으로, 마수를 처치해야만 얻을 수 있는 물건이었다.

이것으로 마력이 없는 사람도 텔레포트를 이용할 수 있었고, 마도구도 만들 수 있었기에 소모품인 주제에도 굉장히 비싼 물건으로 취급되었다.

그중에서도 자색의 빛을 발하는 수정은 최상급 마법석이었다.

근데 이걸 깨트렸으니…….

“죄송해요.”

사고 친 게 분명했다.

살짝 눈을 들어 앞을 보자, 모두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로 플로라를 쳐다보고 있었다.

혼란스러웠다. 가만히 들고만 있었는데 저 혼자 깨졌을 뿐이라 좀 억울한 면도 있었다.

플로라는 구원의 눈길로 곁에 서 있는 마법사를 보았다.

플로라와 눈이 마주친 마법사는 정신을 차린 듯 짧게 기침하더니 이만 내려가도 좋다고 말했다.

깨진 마법석을 받아 가는 얼굴이 사색이 된 걸 보니 더 한숨이 나왔다.

플로라가 내려가자, 마법사들은 회의를 시작했다. 이어 각 기사단의 단장들까지 불러 모았다.

“어떻게 한 겁니까?”

그들의 회의가 끝나길 기다리던 중, 곁에 서 있던 같은 팀 합격자가 플로라에게 말을 붙여왔다.

“뭘요?”

“방금 그 빛 말이에요.”

“마법진에 오르면 저절로 빛나는 거 아닌가요?”

합격자가 짧게 헛웃음을 흘렸다.

“마력 있어요?”

“쓸모는 없지만 있다고는 들었어요.”

아이든은 플로라가 마력을 가졌다는 이유로 그녀를 다른 기사들처럼 함부로 다루지 않았다.

오히려 더 아이든의 실험에 자주 불려 다니긴 했어도 수가 틀리면 죽이거나, 무의미한 학대를 당하는 것에선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왜인지 실질적인 마법은 어떤 것도 쓸 수 없었다.

라비우가 은밀하게 마법사들을 초청해 그녀에게 마법을 가르치기도 했으나 하는 말은 똑같았다.

가지고 있는 마력의 양은 많은데, 왜 쓰지 못하는 건지 알 수 없다고.

각성이 되지 않은 거면 기다려야 한다고. 하지만 그 기다림의 끝은 오지 않았다.

임무를 나갔을 때, 그 나라의 늙은 돌팔이 마법사를 만나 센칸 몰래 마법을 배운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작자 역시도 고작 손끝에 불 하나를 피우게 하는 것으로 끝이었다. 겨우 그딴 걸 가르치면서 플로라를 유능한 인재라고 불렀다.

자기가 아는 유명한 마법사를 만나보지 않겠느냐고 하는 것을, 역시 시간 낭비인 것 같아 그 후부터 가지 않았다.

근데 여기서 그 쓸모없는 마력과 마법석이 깨진 게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아무리 마력이 있어도 그렇지 대단하네.”

“네?”

“방금 당신이 마법석을 정화시켰잖아요. 그래서 단장들이 서로 데려가려고 난리였군요. 부럽네요. 작위 빼고는 다 가지고 태어났네요.”

“지금 그 말 저한테 하는 소리신가요?”

“네.”

플로라는 어이가 없어 짧게 실소를 흘렸다. 남의 입에서 들으니 엄청 대단한 사람 같았지만, 실상은 다른 점이 많았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아무도 저 데려가려고 안 하셨어요. 마법석을 정화했다는 소리도 전 뭔지 모르겠고요…….”

“합격생들이 사이엔 소문이 파다하던데요. 두 기사단에서 모두 선택받았다고.”

“단장님들과 얘길 나누긴 했지만 누구도 입단 권유는 하지 않으셨어요. 다음에 그런 소리 들으면 꼭 정정해주세요.”

합격자는 믿지 않는 눈치였지만, 고개는 성실히 끄덕였다.

“제 이름은 폴 카르틴이에요. 입단하게 되면 친하게 지내요.”

“플로라에요. 행운을 빌게요.”

폴과 서로의 소개를 짤막하게 하고, 대화를 끝냈다.

마침 기사단장과 마법사들의 회의도 끝났다.

대충 회의 내용은 이랬다.

한 명의 능력치가 월등하게 높아 팀을 이루면 평균 마수의 등급 또한 높아지니, 합격자들의 안전을 생각해 7명씩 팀을 이루고 남은 한 명은 개인 시험을 치른다.

그리고 그 ‘남은 한 명’은 플로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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