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플로라는 일주일이나 더 치료를 받고 나서야 완전히 회복했다.
비로소 이든에게 외출도 허락받았다. 앞으로는 정해진 시간에 그를 보지 못한다는 점이 아쉽긴 했지만, 그보다는 몸을 회복했다는 것에 더 의미가 컸다.
역시 기사는 검을 잡고, 활을 쏘고, 몸을 움직여야 한다. 몇 주 동안이나 본의 아닌 칩거 생활을 하다 보니 그런 결론에 도달했다.
감개무량한 외출 금지가 해제된 당일, 시몬은 다짜고짜 찾아와 황실 기사단 입단 테스트에 대해 속성으로 일러 주었다.
“일주일 후에 황실 기사단 입단 시험이 열릴 거야. 시험은 총 두 종류. 첫 번째 시험인 대련에서 합격해야 두 번째 시험의 자격이 주어져.”
“…….”
“두 번째 시험은 마법으로 만든 가상의 던전에서 합격자들이 팀을 이루거나 개인이 마수를 처치해야 해. 이 경우 합격자가 많으면 마법사들의 마력소모를 고려해 전자, 합격자가 적으면 개개인의 능력을 자세히 평가하기 위해 후자로 갈 거야.”
너무 갑작스러워서 플로라는 한동안 침묵했다.
겨우 말문이 트여 진작 말해주었으면 덧났겠냐고 묻자, 시몬은 덧났을 거라고 얄궂게 답했다.
“그동안은 네 몸이 성치 않았잖아. 진작 알려줬다면 무리해서라도 검을 휘둘러댔겠지. 그 꼴은 이든도, 나도 못 봤을걸.”
“그런 분이 대련을 시켜요? 그것도 무려 근위대장님이랑.”
“흠…… 그건 내가 미안하다고…….”
기어들어 가는 시몬의 목소리에 플로라는 짧게 웃었다.
하네칸 제국의 황실 기사단에는 근위대 여명과 백기사단, 그리고 흑기사단과 성기사단이 있다.
근위대인 여명 기사단은 대장인 에르네의 선택을 받은 기사만이 입단할 수 있는 곳이며, 성기사단은 아르제카 신과 그의 신전을 지키는 기사단으로, 입단 시험이 따로 있었다.
그럼 남은 곳은 백기사단과 흑기사단. 플로라는 그 두 기사단에 입단할 준비를 해야 했다.
이제 진짜 ‘하네칸의 플로라’가 될 기회를 코앞에 둔 것 같아 심장이 떨렸다.
긴장하고 있는 그녀 앞으로 시몬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건 선물.”
“……시몬.”
시몬이 건넨 것은 검이었다. 그녀의 눈과 꼭 닮은 흑요석이 손잡이에 박힌 롱소드.
“아, 그리 감동한 눈을 할 필요는 없어. 비싼 거 아니니까. 이제 막 신입 기사 시험을 보는데 좋은 검을 쓰면 사람들이 수상해할지도 몰라서…… 생도들이 쓸 만한 거로 준비했어.”
“고마워요. 시몬. 잘 쓸게요.”
그는 비싼 검이 아니라고 했지만, 오랜 시간 검을 쥐어본 사람으로서의 판단은 달랐다. 이건 정교하게 잘 만들어진 고급 검이었다.
처음엔 받지 않을까 고민도 했지만, 플로라는 자신의 처지를 잘 알았다.
연습할 검이 없었다. 검을 살 돈도 없었다.
“훈련장은 시녀가 안내해줄 거야. 열심히 해봐.”
“시몬이 베풀어준 만큼 꼭 보답할게요.”
“보답은 합격이면 충분해.”
“네.”
플로라는 검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벌써부터 주인을 알아보는 것처럼 손에 착 감겼다.
겉으론 호들갑 떨지 않았지만, 사실 선물이 마음에 꼭 들어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한참 선물 받은 검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플로라는 잠시 손을 멈췄다. 검집 사이에 웬 작은 종이가 끼워져 있는 것이 보였다.
“이건……?”
플로라가 의아한 눈으로 묻자, 시몬이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기사단 시험을 치를 준비는 모두 마쳤어. 너도 네 인적 사항 정도는 알아야 할 테니 읽어봐.”
플로라는 종이를 펼쳐 꼼꼼히 읽어 내렸다.
[플로라, 하네칸 동쪽 해안 에브르 마을 출신 평민의 여성, 가족은 없음. 퇴직 기사 이카리온 추천장으로 기사단 시험 접수. 아카리온 기사는 여명 기사단 출신으로, 퇴직 후 마굴 처치 의뢰를 받으며…….]
종이 안에는 그녀가 하네칸에서 새 신분으로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정보들이 적혀 있었다.
“기사단 시험 접수 일정이 빠듯해서 새 이름을 짓지 못했어. 지금 이름이 충분히 예쁘기도 하고.”
“……네. 괜찮습니다.”
사실 가장 바꾸고 싶었던 건 이름이었지만 아쉽게 되어 버렸다.
그래도 이곳에서 불리는 ‘플로라’라는 이름은 썩 나쁘지 않게 들린다는 게 다행이었다.
“마음 같아선 작위도 내리고 싶었는데, 그럼 짜증 나는 놈들이 네게 들러붙을 거라. 최소한의 환경만 만든 거야.”
“시몬. 지금으로도 충분해요.”
“만족해줘서 다행이야.”
“…….”
“난 네게 기대하는 바가 커. 그 최소한으로 어디까지 최대치를 끌어낼지.”
“…….”
“그리고 그 녀석들이 널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도 궁금하군.”
플로라가 무슨 소린지 모르겠단 얼굴을 했다.
하지만 시몬은 영문 모를 웃음만 지었을 뿐, 그에 대해 더 말하지 않고 화제를 바꿨다.
“아, 혹시 내 추천장 정도는 필요하다면 줄 수도 있는데. 합격에 분명 도움 될 거야.”
방금 고작 ‘도움’이라고 했나?
황제의 추천장이라니. 그건 도움 정도가 아니었다. 시험장이 발칵 뒤집히고도 남을 일이다.
플로라는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보석이 잔뜩 박힌 검을 주시지 그러세요.”
“그럴까?”
“……추천장도, 검도 사양하겠습니다.”
시몬이 옅게 웃었다.
“마음 바뀌면 언제든 얘기해.”
“꼭 합격할게요. 시몬.”
“행운을 빌게.”
툭툭. 무심하게 그녀의 머리를 다독여준 시몬은 방을 떠났다.
눈앞에 있던 익숙한 사람이 떠난 뒤에야 플로라는 자신이 반쯤 넋을 놓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종이를 펼쳐본 후로 줄곧 꿈속을 걷는 것처럼 멍했다. 작위 같은 건 애초에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저 정식으로 하네칸의 제국민이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았다.
플로라는 자신의 새로운 신분이 적힌 종이를 한참 내려다봤다.
시몬이 기대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플로라는 그 이상을 해내리라고 다짐했다.
* * *
남은 기간은 일주일.
기사단 시험에 합격할 자신이 있는 것과 별개로 떨림은 어쩔 수 없었다.
시험에 통과할 자신은 차고 넘쳤다. 시몬도 자신의 추천장을 주겠다고 우기지 않는 걸 보니 별로 걱정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검을 잡고, 활을 쏘고, 임무나 전장에서 굴러먹은 경험이 수년이었다.
죽을 고비는 셀 수도 없이 많이 넘겼고, 사람도 죽여보고, 마수도 처치해봤다.
그녀에겐 ‘실전’에서 익힌 ‘현실적’인 기술이 있었다. 하네칸 사람들의 실력이 아무리 월등하다 하더라도 이제 막 입단을 준비하는 신입보다 그녀가 뒤처질 리 없었다.
‘그래도 방심은 하지 말아야겠지.’
처음엔 시몬의 술수에 빠진 것이라고, 합리화를 했지만 사실 아니었다.
이곳에 머무는 시간 동안, 감히 다시 ‘꿈’을 가지게 됐다.
외면하지 않고 마주 보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배신하지 않고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조금은 변하고 싶었다. 이곳이라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이 따뜻한 사람들 곁에 남고 싶었다. 아직 감정이란 건 어려웠지만, 작은 소망이 있다면 언젠가 그녀도 이들처럼 누군가에게 괜찮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었다.
플로라는 그렇게 지나온 삶과는 다른 자신이 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이건 오로지 그녀의 선택이었다.
* * *
몇 주 만에 몸을 움직이니 확실히 둔해졌다는 것이 느껴졌다.
매일 아침마다 근육통으로 끙끙 앓아야 했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빈둥거리던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하루가 보람찼다.
훈련을 하고 난 뒤에 하는 목욕과 식사는 천국 그 자체였다.
“플로라 님, 목욕물을 준비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옷 갈아입는 것을 돕겠습니다.”
“아, 괜찮아요. 드레스도 아닌걸요.”
“……오늘도 목욕 시중은 안 받으실 예정이세요?”
“네. 혼자 하는 게 편해서요.”
“네에…… 그럼 전 식사를 준비해둘게요.”
루가르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손을 꼼지락거렸다.
무언가 할 말이 더 있는 눈치였다. 플로라는 그녀가 먼저 다음 말을 꺼낼 때까지 모른척하기로 했다.
“플로라 님.”
“네?”
플로라는 머리를 정리하며 거울을 통해 루가르를 보았다.
“혹시 제가 플로라 님께 거슬리는 행동을 한 것이 있을까요?”
꾹 다물린 얇은 입술과 동글동글한 그녀의 연갈색 동공에는 걱정이 어려 있었다.
한참 그 문제로 속을 썩인 모양인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은 채였다.
“네? 그럴 리가요.”
이미 예상한 질문이었기에 플로라는 태연히 대답했다.
어깨를 아예 쓰지 못했을 시기를 제외하고, 플로라는 시녀에게 무언가 부탁하지 않았다.
나서서 하겠다고 하는 것도 말렸다. 그런 거절이 반복되다 보니 내심 불편해진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 제게 아무 일도 맡겨 주지 않으세요? 제가 무언가 불편하게 해드린 것이 분명해요. 말씀해주시면 고쳐 볼게요.”
결론만 말하자면 루가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아주 마음에 들었다.
연한 갈색의 머리칼과 그에 걸맞은 투명하고 옅은 눈동자는 세상 모든 순수함을 담고 있는 것처럼 선했다.
그리고 다정한 말 한마디와 섬세한 행동이 마음에 안정을 심어주었다.
첫인상부터 ‘나 착해요’하는 기운을 퐁퐁 풍기고 있는데 어느 누가 싫어할 수 있을까.
그런 루가르에게 일을 맡기지 않은 이유는 다양했지만, 구구절절 다 이야기할 순 없으니 바로 본론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그게 모로 보나 가장 쉽게 납득할 만한 이유였다.
“루가르 님은 그게 더 편하실 줄 알았어요.”
“……네?”
“검을 잡는 분께는 호위도 아니고, 남의 시중을 드는 일이 불편하실 것 같아서요.”
플로라가 루가르 쪽으로 몸을 틀어 생긋 웃었다.
예상치 못한 말이라는 듯, 루가르의 옅은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아, 알고 계셨어요?”
“네.”
“아…… 저, 그게…….”
어떻게 알았냐고?
방을 청소할 때 그녀의 팔에 난 자잘한 상처를 보았다. 보다 보니 손도 거칠고 상처가 많다는 걸 깨달았다.
험한 일을 많이 해 그런 건가 싶었는데, 그녀가 시몬과 친근하게 대화하는 걸 보고 다른 쪽으로 확신했다.
시녀가 아무리 대범해도 황제와 그렇게 스스럼없이 대화할 순 없을 테니까.
간략하게 그런 말들을 늘어놓자, 루가르는 당황스러운 듯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감정이 얼굴에 훤히 드러나는 상이라 첩자로서는 재능이 없어 보였다.
그런 미숙함이 플로라 눈에는 좀 귀여웠다.
“괜찮아요. 제게 감시 외에 다른 목적은 없으시잖아요?”
결정타를 맞은 모양인지 결국 루가르가 딸꾹질을 터트렸다.
플로라는 비죽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겨우 내리눌렀다.
‘더 괴롭히고 싶은데, 나 진짜 사디스트인가…… 맙소사.’
딸꾹질을 멈추기 위해 숨을 참는 루가르의 모습은 그림을 그려서라도 남기고 싶은 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