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르네를 다시 만난 것은 절벽이었다.
이 땅은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니, 섬을 나가려면 배를 타야 했다.
탈출은 애초에 무리였다. 매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절벽에서 떨어져 죽는 기사가 허다했다.
운 좋게 탈출에 성공해도 아이든은 집요하게 추적했다. 플로라가 르네의 생각을 한심하다고 생각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르네는 자신의 애를 돌려내라고 소리쳤다. 낳자마자 얼굴 한 번 보여주지 않고 빼앗아간 탓이었다.
플로라가 뒤늦게 갔을 땐 이미 그녀가 아이든의 칼에 베인 후였다.
“르네. 르네!”
안색이 하얗게 질려 있는 르네의 모습은, 그동안 플로라가 봐온 것과는 달랐다.
그녀가 죽을 거란 걸 직감했다.
“플로라, 꼭 살아. 넌 꼭, 흡, 살아남아서 우리 아이를…… 지켜줘.”
그녀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르네는 눈을 뜨지 못했다.
플로라는 자신이 르네를 외면했다는 사실에 자책했다.
조금 더 설득했더라면. 아이든에게 말해 아이의 얼굴이라도 한 번 보여주자고 말해봤더라면.
그때까지도 탈출을 도와야 했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 안에 무언가가 조금씩 변해가고 있음은 느낄 수 있었다.
* * *
플로라는 르네가 죽은 뒤 눈에 뵈는 것 없이 살았다.
그나마 그녀의 고삐를 잡아주던 유일한 사람이 사라졌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삶은 평소보다 더 치열해졌다.
‘……플로라, 너는 이렇게 사는 게 행복하니?’
그녀에게 대답해주고 싶었다. 이렇게 살다 보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가 살면서 추구했던 꿈은 부와 명예였다. 그래서 플로라는 꿈을 좇았다.
그것들을 완전히 얻고 나면 행복해질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 설령 그녀 자신을 버리는 일이라도 서슴지 않았다.
도덕도, 인격도 없었다. 필요하다면 아이를 죽였고, 노인을 죽였다.
하지만 그럴수록 행복은커녕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과 외로움 속에 무방비상태로 내던져졌다. 방향을 잃은 사람이 되어 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르네의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주기적으로 소식을 전달받긴 했지만, 아직 어린아이니 아이든의 눈에 들지 않을 거라고 안심했다.
결국 플로라는 르네의 마지막 유언조차 지키지 못한 사람이 됐다.
그날, 꿈을 꿨다.
자신을 원망하는 르네를 봤다.
‘어려서 안심했던 게 아니라, 사실은 외면한 것 아니니?’
르네의 원망 섞인 물음에 플로라는 또다시 대답하지 못했다.
그때부터 삶이 공허하게 느껴졌다.
어떤 ‘목표’ 같은 것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부와 명예만 얻으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행복하지 않았다. 얻은 것보다 잃은 게 더 많은 기분이 들었다.
플로라는 자신이 걸어온 길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지키는 쪽보다 외면하고 약탈하는 쪽을 선택해온 인생이었다.
그런 길을 걸었으니, 어쩌면 르네와 아이에게 그랬듯, 성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 역시 외면해오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기사로 성장 못 할 여자는 지하 감옥으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플로라는 정확하게 모르지만, 아마 결코 평화롭진 않을 터였다. 한 번 끌려 들어간 사람은 살아서 나오지 못하는 곳이었으니까.
또한 연구의 핑계로 살인은 만연하게 일어났다. 대련이랍시고 기사에게 싸움을 붙였다. 그렇게 죽은 기사를 나약하다고 조롱하기도 했다.
플로라도, 다른 기사들도 그것을 외면하고 받아들이며 자랐다.
……그렇지 않으면 제 목숨이 날아갈 테니까.
플로라는 지금껏 자신이 좇은 꿈과 추구했던 가치가 ‘만들어진’ 것이란 걸 깨달았다.
그렇게 살게끔 이 사회가 만들고 있었다. 그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게끔 했다.
결국 한낱 충성스러운 개 또는 장난감밖에 되지 않았던 거다.
플로라는 뒤늦게 분노했다.
어쩌면 진작 했어야 할 분노였을지 모른다.
그렇게 플로라는 더 이상 센칸의 기사로 살아갈 수 없게 됐다.
* * *
시몬은 플로라의 침대 맡에 깔끔히 개인 연무복을 올려두었다.
이제 플로라가 드레스 입은 모습만 봐도 우는 얼굴이 동시에 떠오를 것 같았다.
내심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보고 싶어 일부러 다른 옷은 주지 않았지만,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시몬은 잠든 플로라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잠든 그녀는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곧게 뻗어 있는 미간이 구겨진 채, 연신 움찔거리고 있으니 모를 수 없었다.
‘꿈을 꾸는 모양이로군.’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이 짙어졌다. 그럴 때마다 은빛 머리칼이 더 반짝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식이라면 내일은, 걸어 다니기도 힘들 텐데.’
기사단에 넣을 게 아니라, 마법부터 가르쳐야 하나.
“쉬이…….”
망설이던 시몬은 플로라가 덮은 두툼한 이불 위로 손을 뻗었다.
토닥이는 손길에 점차 평온을 되찾는 것이 보였다.
그녀가 얼굴을 찡그리면 찡그리는 대로 함께 표정을 굳히고 있던 시몬의 얼굴도 금세 편안해졌다.
이제 밀린 정무를 처리하러 가야 하는데, 어쩐지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발이 땅에 묶인 것처럼 걸음이 무겁다.
‘시몬은 제가 아는 사람 중에 제일 따뜻한 사람이에요.’
귓가에 그녀의 말이 계속 맴돌았다.
“좀…… 짜증 나는군.”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궁지에 몰린 사람에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했고, 첫 만남에서 얻었던 정보로 계획된 친절을 내보였다.
이미 그가 세웠던 계획들이 하나둘 어그러지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리 신경에 거슬리기까지 할 줄은 몰랐다.
‘정말 이대로도 괜찮나?’
만약 계획대로 되지 않아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없다면,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머리는 정보를 원하고, 마음은 사람을 원했다.
이게 참 어이가 없었다.
* * *
“그래서…….”
“…….”
“경들이 이 이른 아침에 나를 찾아온 까닭이 고작 그 아이 때문이라는 건가. 지금?”
시몬은 짙은 한숨을 내뱉으며 반쯤은 감긴 눈으로, 신하들을 보았다.
조찬도 아닌, 오찬을 끝낸 직후였다. 한데 이제야 잠에서 깬 황제를 보고 귀족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 하나 쉽게 다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잔뜩 당황한 채 서로 눈짓을 교환하는 꼴을 지긋이 바라보다 시몬은 결국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눈을 감아 버리니 듣기 싫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외람되오나 폐하, 이 일은 가볍게 넘길 사안이 아닙니다. 폐하께서도 이미 성 안팎으로 나도는 소문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괜한 소문을 더해 좋을 것이 없…….”
“……아. 내가 웬 코르티잔에게 빠져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는 그 소문? 정정해야지, 백작.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지 않나?”
“폐하!”
“하…… 아무래도 내 성에 쥐새끼가 있는 모양이야. 어제 그 아이를 데려간 곳이라곤 연무장밖에 없는데, 경들이 어디서 소식을 듣고 이리 찾아온 것인지 모르겠어.”
“……폐하께서 데려온 그 여인은 출신도 알 수 없다 들었습니다.”
“…….”
“누차 말씀드렸다시피, 먼저 황후마마를 맞이하셔야 합니다. 후계를 보신 후에 폐하께서 원하는 여인을 취하셔도 늦지 않습니다. 제국민들의 불안이 날로 커가고 있다는 것, 잘 아시지 않습니까.”
시몬의 비아냥에도 귀족들은 눈 하나 깜짝 않고 해야 할 말을 했다.
마주할 때마다 느끼지만 참 역겹고, 또 여러 의미로 존경스러웠다.
시몬이 눈을 찡그렸다.
“그대들은 하나는 생각하면서, 둘은 모르는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그 아이를 취했다면, 지금 이곳엔 나 혼자 있지 않겠지. 여기가 침실인데.”
“…….”
“달리 쓰고 싶은 재능을 가진 아이라 데려온 것이다. 게다가 취한다고 해도 당장은 아니니, 그리 도끼 눈 뜰 필요 없어.”
귀족들이 다시 눈을 굴려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경들이 말한 혼인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보도록 하지. 아까 말했다시피, 내겐 정신 못 차릴 정도로 사랑하는 아이가 있어서 말이야.”
“폐하!”
“라벤더는 황후로 인정하지 못하겠다며?”
“그, 그건…… 당연합니다. 어떻게 노예 출신의 여자를 황후로 들이신다는 말씀을 하실 수 있습니까, 폐하! 재고하여주십시오!”
발끈하는 꼴을 보니 비죽 웃음이 날 것 같았다.
시몬은 말려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억눌렀다.
“그대들이 내 혼인 문제로 많이 걱정하고 있는 것 알아. 그럼 경들의 기준에 적합한 영애들이 있는지 알아보고, 보고하도록 해. 진정성 있게 검토해보지.”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양보해야 한다.
“소신들의 마음까지 헤아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좀 더 자고 싶은데, 이만 나가주겠나?”
“예. 폐하. 폐하께 무한한 영광과 축복이 깃드시길.”
원래라면 플로라에 대해 진절머리 나게 묻고, 골수까지 빨아 먹으려 들겠지만 웬일인지 귀족들은 순순히 물러갔다.
그동안 가장 속을 썩였던 혼인 문제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리라.
시몬은 짜증스레 한숨을 폭 내쉬곤 침대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다 풀어 헤쳐진 실크 가운의 앞섬을 정리하며 소파로 향했다.
오늘 잠은 다 잤다.
<……드디어 혼인을 결정하신 겁니까?>
방 한구석에 석상처럼 우직하게 서 있던 에르네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꼭 해야 하는 말이 아니면 웬만해서 먼저 말하는 일이 없는데, 그도 혼인에 관해서는 흥미가 생긴 모양이었다.
“내가 미쳤어? 누구 좋으라고. 당장 내쫓을 명분이 필요했을 뿐이야. 좀 더 있다간 저것들 혀를 다 잘라버릴 것 같아서 말이지.”
<진작 적당한 상대를 골라 약혼이라도 하셨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요. 코르티잔에게 빠진 행세를 할 게 아니라.>
“그땐 그게 최선이었어. 결과도 만족하고. 지금도 후회하지 않아.”
<…….>
“흠…… 그나저나 일은 저질렀으니 수습은 어쩐다? 귀족들은 보나 마나 칸나를 황후로 만들고 싶어 하겠지?”
<아마도요.>
시몬이 짧게 혀를 찼다.
“칸나는 요새 뭘 하지?”
<유학을 간 것으로 압니다만.>
“……무슨 유학?”
<신부수업을 받고 있지 않을까요. 제국에 계시기엔 여러 소문이 많으니까요.>
“공작도 참 대단해. 내가 제 딸한테 어떻게 했는지 알면서.”
진절머리 나는 인간이라는 듯 시몬이 몸서리를 쳤다.
“하지만 칸나만 괜찮다고 하면, 다시 약혼녀로 두기엔 적합해. 걱정되는 게 한둘이 아니지만.”
<혹 따로 마음에 두신 분은 없으십니까?>
왜 에르네의 질문에 엉뚱한 얼굴이 떠오르는 걸까.
“……주기적으로 만나는 여인이라곤 고작 라벤더나 네이라, 소피밖에 없는 것 같은데. 지금 날 놀리려 한 질문인가?”
<…….>
“아, 한 명 더 늘었지? 플로라. 그럼 그중에 누굴 마음에 들여야 하나.”
밤에 마력을 그렇게 써댔는데, 몸은 괜찮을까.
이든이 있으니까 회복되겠지.
하지만 이든 이 자식은…….
플로라의 이름을 입 밖으로 내자, 불쑥 연무복을 들고 찾아갔던 지난밤이 떠올랐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별로 좋지 않은 생각들뿐이었다.
잠시 침묵했던 시몬은 빠르게 화제를 바꿨다. 에르네를 보는 그의 눈이 반짝거렸다.
“참, 에르네. 넌 이제 큰일 났어.”
갑작스러운 온도 변화에 에르네가 무슨 뜻이냐는 듯한 얼굴을 했다.
“루가르 경이 단단히 화났더군. 네가 어제 드레스 입은 레이디의 팔을 긁었잖아.”
표정의 변화를 잘 보이지 않는 근위대장의 얼굴이 미묘하게 꿈틀거렸다.
‘역시.’
놀림거리를 찾은 시몬이 히죽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