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처음 예상과 달리, 숨은 붙어 있었다.
“……좋은 대련이었습니다. 근위대장 님.”
졌다.
지는 건 익숙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질 때마다 쏟아지던 비난과 멸시가 이명처럼 귓가에 맴돌았다.
당장 검을 들어. 공격해! 뭐 하는 거야? 저자를 죽여. 갈기갈기 찢어버리라고! 난 너한테 걸었어. 그러니 돈값을 하란 말이야!
“플로라, 괜찮아?”
지금은 없었다. 비난하고 원망하는 대신 다정한 걱정의 말이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플로라…… 어, 너 울어? 많이 다친 거야? 어디 좀 봐.”
눈가가 뜨거웠다. 시몬의 말에 자신이 울고 있단 걸 알아챘다.
팔의 상처를 지혈하는 게 우선일지, 눈물을 닦아주는 게 우선인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시몬을 봤다.
그를 오해했다. 라비우와는 전적으로 다른 사람이거늘.
그런 재활용도 안 될 인간 말종과 시몬을 동일 선상에 놓았던 자신을 쥐어박고 싶었다.
고작 이깟 걸로 라비우를 떠올리고, 그 분노에 사로잡혀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다. 이렇게나 병들어버린 마음이 한심했다.
“괜찮습니다. 폐하.”
“괜찮기는! 피가 이리 많이 나는데. 난 아마 이든한테 죽을 거야…….”
“저 정말 괜찮습니다. 깊게 베이지 않았어요.”
시몬은 근위대 기사들이 다 보는 앞에서도 체면을 차리지 않고, 신하를 걱정했다. 그의 모습을 본 기사들도 당황하지 않았다.
“이만 돌아가자. 내가 무리한 일을 시켰어.”
금세 감정을 추스른 플로라는 시몬의 걱정이 과한 듯해 부끄러워졌지만, 어쩌겠나. 그는 그런 황제였다.
하네칸이 복지뿐만 아니라, 생각보다 더 좋은 곳일지도 모른다는 믿음이 생겼다.
이 안에 있으면 자신도 좀 달라질 수 있겠단 희망도 생겼다.
그녀가 추구했던 삶의 가치가 달라지는 순간이었다.
“저, 플로라 님? 대장께서 다음에 오실 때는 좀 더 편한 복장과 본인의 검을 길들여 오라고 하십니다.”
에르네는 플로라가 떠나기 직전까지 살기를 드러냈고, 그녀에게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부하를 통해 말을 전했을 뿐이다.
그리 고고한 늑대처럼 굴어도 플로라는 더 이상 에르네가 불편하지 않았다.
* * *
“제국의 태양을 뵙…… 어머, 플로라 님! 드레스가!”
방으로 무사히 돌아와서는 루가르의 비명을 들었다.
루가르는 처음엔 찢겨 나간 드레스에 경악하고, 그다음은 그녀의 팔에 난 상처에 질색했다.
“플로라 님,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시녀의 눈이 크게 뜨인 걸 보고 플로라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적당한 대답을 고르는 사이, 시몬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근위대장과 대련을 시켰어.”
“폐하! 플로라 님은 아직 회복이 덜 되셨습니다. 어떻게 그런……!”
플로라는 순간 시녀의 목이 베여 나가지 않을까 걱정했다. 기우였다. 시몬은 화를 내기는커녕 멋쩍게 웃었다.
“게다가 드레스를 입은 레이디에게 검을 쥐여 주시다니요. 폐하!”
“그래. 내가 생각이 짧았어.”
“그런데 에르네 님은 같이 안 오셨나요?”
“응. 아마 아직 근위대 연무장에…….”
루가르의 눈이 매섭게 빛나고 있다고 느끼는 건 착각이겠지.
한참 에르네가 찢어버린 드레스에 대해서도 열변을 토하던 루가르는 이든을 불러오겠다며 방을 빠져나갔다.
루가르 덕에 분위기가 좀 풀린 듯했는데, 둘만 남게 되니 시몬은 다시 풀 죽은 강아지마냥 안절부절못했다.
“많이 아프겠다. 에르네가 좀 너무하긴 했어. 그치?”
“저 진짜 괜찮습니다.”
“하지만 울었잖아.”
“아파서 운 거 아니에요.”
“……그럼?”
정말 아파서 울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맙소사. 그럼 다른 이유가 있었냐는 듯 동그랗게 뜨인 눈이 귀여웠다.
“제가 많이 모자란 사람이란 걸 깨달아서요.”
“그게 무슨 소리야. 충분히 잘 싸웠는데. 근위대 기사들이 네 기세에 다들 놀랐다고.”
“…….”
“에르네 그놈은 원래 진검으로 대련할 때나 입단 시험을 봐줄 때 한쪽이 피를 볼 때까지 해. 근데 옷도 불편하고 아직 몸도 다 회복 못 한 사람한테까지 그럴 줄은 몰랐어. 그러니 다음엔 네가 베어버려. 괘씸하잖아.”
검술에 대한 얘기가 아니었다.
“미안해요. 시몬.”
“응? 뭐가.”
“시몬을 제가 아는 가장 나쁜 사람과 똑같다고 오해했어요. 일부러 근위대장과 대련시켜서 절 망신 주거나 죽이려는 건 줄 알았거든요.”
“……어이가 없군. 나 그런 사람 아니야. 세상에 그런 놈도 있나? 어떻게 날 그런 파렴치한 인간에 비교할 수가 있어.”
“오해해서 미안해요. 지금이라도 정정할게요. 시몬은 제가 아는 사람 중에 제일 따뜻한 사람이에요.”
시몬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꼭 말아 쥐었다.
“그것 때문에 네가 모자란 사람이라고 말했던 건가?”
“네.”
“그런 거면 사과는 됐어. 자책은 더더욱 하지 말고. 이 일은 내가 잘못한 거야. 네가 그렇게 오해하게끔 만든 건 나니까.”
시몬이 머뭇거리듯 입술을 달싹이다, 다시 말했다.
“네가 드레스 입고 검을 쥐면 참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어. 네 능력도 물론 궁금했지만, 그런 어쭙잖은 욕심 때문에 네 의사는 제대로 묻지도 않았고.”
“……네?”
“나도 아직 많이 부족하고 모자란 사람이야. 이렇게 말하고 보니 좀 철이 없기도 하네?”
“뭐야. 그럼 결국 시몬의 이상한 취향 때문에 제가 당했던 거네요?”
“이, 이상한 취향이라니. 말이 이상하게 들리잖아.”
“따뜻한 사람이라고 했던 거 취소에요.”
“했던 말을 어떻게 도로 주워 가려 해? 그런 거 취소 안 돼. 이미 들었거든.”
플로라가 실소를 터트렸다.
시몬은 그녀를 보았다. 끝끝내 숨기려고 했던 장난 같은 마음을 말하게 만들다니. 게다가 반성까지 해버렸다.
제일 따뜻한 사람.
그는 플로라가 했던 말을 곱씹으며 픽 웃음을 흘렸다. 뭔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플로라는 시몬에게 두 마리 토끼였다.
그게 참 아이러니하다.
토끼를 잡아야 하는 건 이쪽인데, 왜 잡힌 것 같지?
* * *
찰랑거리는 보라색 긴 머리칼을 발견한 순간, 플로라는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이든의 금안이 촉촉하게 젖고, 뺨이 발그스름하게 달아오르는 것.
상상만 해도 좋았다.
“……레이디!”
“이든. 왔어요?”
하지만 상상은 상상일 뿐. 그는 울고 있지 않았다. 뭐, 아무렴 상관없었다.
저 다정한 눈빛과 걱정하는 말을 들으면 그냥 기분이 둥실거렸으니까.
뒤늦게 시몬을 발견한 이든이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폐하도 계셨군요. 폐하께 아르제카 님의 은총이 깃들기를…….”
이든의 인사에 시몬은 뭔가 불편하단 표정으로 고개만 까딱했다.
이든은 플로라를 봤다.
혼이 날까 노심초사하고 있는 모습이 한눈에 보이니 어떻게 귀여워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루가르 겨…… 아니, 루가르 님께 듣자니 진검 대련을 하셨다고요. 레이디.”
“……아. 네.”
“제가 저번에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이제 레이디를 건강한 모습으로 보고 싶다고요.”
“미안해요. 이든. 말 안 듣고 외출해서요.”
“또 있으시죠. 미안한 거.”
“다쳐서 미안해요. 치유 기간이 길어질 테니, 이든만 귀찮게 됐어요.”
이든의 단호한 목소리에 플로라는 괜히 주눅이 들었다. 그가 화난 것 같았다.
그래도 욕심대로 외출을 선택한 건 그녀 자신이었다. 그럼 다치질 말았어야 했는데, 다쳐 버렸다.
인생은 뭐 하나 쉽게 굴러가는 법이 없다. 이든에게 귀찮은 일을 하나 더 만든 것 같아 미안했다.
사실 기사가 칼에 베이는 일은 흔했다. 임무가 아닌 대련에서 베인 거라 좀 없어 보이고, 창피하긴 하지만.
그래서 센칸에 있을 때는 깊은 상처가 아니라면, 치유사가 배합한 연고를 발랐다.
격하게 움직이면 상처가 벌어져 치료 기간이 길어지고, 흉터가 짙게 남는 단점이 있지만 2주 정도면 거뜬히 나았다.
그 연고가 아쉬운 날도 오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레이디.”
“…….”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레이디를 치유하는 일은 전혀 귀찮지 않아요. 이게 제 일인걸요. 제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권능을 주신 아르제카 님께서 얼마나 슬퍼하시겠어요.”
이든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솜사탕처럼 달고 부드럽게 느껴졌다.
“저는 그저 레이디가 쾌유하시길 바랄 뿐이랍니다. 함께 신전도 구경 가기로 하셨잖아요.”
“……아, 네! 그랬죠. 신전.”
귀찮지 않다면 다행이었다.
걱정이 조금 풀린 플로라가 신전 나들이가 기대된다고 말을 덧붙이려는데, 시몬의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
“여기 둘만 있는 것 같군. 대화가 둘만의 세계야. 속이 거북해.”
“듣기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 폐하.”
“두 사람은 많이 친해졌나 봐.”
“그럼요. 폐하.”
“그래? 얘는 아니라던데. 너랑 안 친하대.”
플로라는 이든과 시몬의 대화를 듣다 난데없이 떨어진 날벼락에 눈을 둥그렇게 떴다.
‘여기서 그 말을 한다고? 아니, 왜요?’
이든의 시선이 처음으로 따갑게 느껴졌다. 플로라는 그런 거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이어 힐끗 시몬을 올려다보았다.
무어라 말을 덧붙여주길 바랐지만, 그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만 있을 뿐이었다.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말만 하고 입을 꾹 다물어 버리다니. 도대체 왜 이러세요?
눈과 코를 찡긋거려도 시몬은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배 째라는 식으로 플로라를 내려다보며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그게 아니라요…… 이든.”
“레이디께서 수줍음이 많으셔서 그리 대답하신 모양이네요.”
플로라가 무어라 변명하기도 전에 이든이 웃으며 수습했다.
플로라는 그렇다고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착각도 자유지.”
아니 거긴, 좀 조용히 해주세요.
플로라가 시몬을 노려봤다.
“물론 제 착각일 수도 있겠죠? 그럼 이제부터 친해지면 되지 않을까요? 레이디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해야겠네요.”
기분 좋은 말이었다. 플로라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시몬이 꽤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방을 나가버린 덕분에 대화는 거기서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플로라는 멀쩡히 치유를 받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