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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12)화 (12/154)

12.

황제의 성 뒤편에는 근위대인 여명기사단의 본부가 있었다.

황제의 성보다는 비교적 수수한 모양새의 건물이었지만, 여기저기 곰팡이가 핀 어두컴컴한 성에서 일평생 살아온 플로라로서는 이조차도 엄청나 보였다.

걷는 내내 놀란 것밖에 없는데, 어느새 연무장이었다.

연무장에 있는 근위대 소속 기사들은 치열하게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는 중이었다.

“저들은 나의 근위대야. 어때?”

“제가 감히 평가할만한 분들은 아닌 것 같은데요…….”

진심이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들은 무려 황제의 근위대였다. 여명기사단의 업적은 센칸에 있을 때부터 익히 들어 알았다.

소속 기사 중에는 검술에 마력을 담을 수 있는 마스터도 있지만, 마스터가 아닐지언정 그 한명 한명의 파급력이 엄청나다고.

“오셨습니까. 폐하.”

그때 누군가 시몬의 곁에 다가와 정중히 인사했다.

“아. 에반 경.”

“단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 남자였다. 눈꼬리가 살짝 처져 있어 그런지 웃지 않아도 인상이 퍽 부드러웠다.

황제가 온 것을 그제야 안 모양인지, 훈련을 하던 기사들이 일제히 행동을 멈췄다. 서로 맞추기라도 한 듯 시몬을 향해 무릎 꿇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그리고 한 남자가 기사들 사이를 걸어 나왔다. 아까 성의 복도에서 시몬을 지키고 있던 남자였다.

‘저 사람이 기사단장인가……?’

플로라는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살짝 그을린 피부에 차분한 갈색 머리칼,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진 듯한 단단한 체격이 눈에 띄었다.

어려보이기도 했고, 남자답게 잘생기긴 했지만 단순히 그런 외형 때문에 시선을 빼앗긴 건 아니었다.

그가 뿜어내는 보랏빛 눈동자에 살기가 가득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성에서도 그랬다.

황제를 엄호하느라 예민하게 구는 것이려니 했는데, 살기의 기운이 여전했다. 이 연무장에서 살기를 보일 사람이라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뿐이었다.

“검을 쓸 줄 아나? 플로라. 내가 본 그대는 활밖에 다루지 않아서.”

“네. 많이 부족하지만…… 쓸 줄은 압니다.”

설마 황제의 허벅지에 칼 박은 간 큰 작자가 나라는 걸 아는 건가. 그런 거라면 저 살기는 백번 이해가 됐다.

가시방석에 앉은 사람처럼 이 공간이 불편해졌다. 플로라는 그저 남자의 시선을 피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에르네가 너와 대련을 해보고 싶은 모양인데, 플로라.”

예……? 대련이요? 저는 그런 말 못 들었는데요.

“나도 그대의 실력을 좀 보고 싶기도 하고.”

이 옷차림으로요……?

“아, 옷이 너무 불편한가.”

설마 이런 식으로 노리개 삼다가 죽이려고 살려뒀던 건가? 악명 높은 황제의 근위대 틈에서 살아남기, 뭐 그런 거야?

갑자기 머리가 이상한 방향으로 팽팽 돌아갔다.

“아직 부상도 완전히 낫지 않은 데다 옷도 불편하니, 에르네가 적당히 사정 봐주면서 하겠지. 특별히 내 검을 빌려줄게.”

괜찮은데. 거절할 수 있는 권한이 있나요?

플로라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시몬을 올려다보았다.

이리 불편한 옷을 입혀놓고, 진검으로 대련을 하라니요! 목 끝까지 불만이 차올랐지만 차마 그리 외칠 자신은 없었다.

아까 방에서 시몬이 드레스를 건네며 의미 모를 미소를 지었던 것이 떠올랐다.

이거였구나.

시몬이 자신의 칼을 꺼내 건넸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었다.

죽이려고 하면 도망가야지. 근데, 갈 수는 있는 건가……?

속으로는 펑펑 울면서 황제의 칼을 두 손으로 하사받았다.

플로라는 폐하의 깊고 높은 아량에 대해 줄줄이 읊으며 감사 인사를 했다.

“그래. 플로라는 검이 없잖아.”

그때 시몬이 퉁명스레 말했다.

혼이 나간 상태라 미처 듣지 못한 말이 있었나 싶었는데 여전히 훈련장 안은 고요했다.

‘시몬의 말은 들리는 걸로 봐선, 귀가 먹은 건 아닌데…….’

플로라가 의아한 얼굴로 눈을 굴리자, 곧 시몬이 옅게 웃으며 남자를 가리켰다.

“이쪽은 여명기사단의 단장 에르네 폴 라이젠 경이야. 지금은 에르네가 직접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으니, 내가 대신 소개하는 걸 이해해줘.”

플로라는 그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플로라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단장님.”

그러자 에르네는 고개만 까딱해 겨우 플로라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이런 시선은 센칸에서도 익히 받아 왔기 때문에 잘 알 수 있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과 살기가 섞인 눈빛. 분명 자신을 죽이고 싶어 하고 있다.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

플로라는 겨우 고개를 돌렸다.

“그럼 대련을 시작하도록 하지. 좋은 구경이 되겠어.”

시몬의 말에 플로라는 졸지에 구경거리가 되어 훈련장 한가운데에 모셔졌다.

근위대 기사들도 이런 구경거리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인지 일렬로 선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수십 개의 눈이 그녀를 향해 있었다.

황제의 검을 쥔 손이 떨렸다. 대련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이런 동물 보듯 하는 시선에 조금 신경이 날카로워진 탓이다.

드레스에 구두를 신고, 황제의 검을 쥔 여자라니. 제가 생각하기에도 퍽 웃긴 꼬라지였다.

그리고 근위대장의 저 살기도 계속 거슬렸다. 저건 단순 대련 상대를 향해 뿜어낼 만한 것이 아니었다.

마스터씩이나 된다는 작자가 그것도 모르고 대련을 붙였을 리는 없고.

결국 한통속이라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이 떠올라 플로라를 음습하게 적셨다.

그녀는 목줄을 쥐었다고 신이 된 것 마냥 사람들을 무도하게 다루는 작자를 알고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그의 손아귀에 매여 있었고, 이제는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어딜 가나 그런 사람들뿐이라면 차라리 여기서 죽는 것도 나쁘지 않아.

플로라의 얼굴에 설핏 그늘이 내려앉았다.

“시작.”

시몬의 말과 함께 에르네가 검을 빼 들었다.

서로 정중한 인사 따윈 없었다. 저리 살기를 내뿜는 사람에게 인사하고 싶을 리 없었다.

‘이렇게 가는구나.’

그녀는 암살에 재능을 보인 기사였다. 게다가 근거리보단 원거리에 훨씬 그 능력이 배가 되었다. 왕에게 하사받았던 첫 무기 역시 활일 정도였다.

그러니 이건 어느 모로 보나 플로라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싸움이었다.

플로라는 짧게 심호흡했다. 검을 쥔 손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리 광대 같은 노릇을 계속해야 하는 처지라면, 마지막까지 전력을 다해 고귀한 분들을 즐겁게 해드려야 하지 않겠나.

잘못이라면 시몬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었다. 그렇게 지독히 당해 놓고도 또 누군가를 섬기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으니까.

‘너와 친구가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을 거야.’

꼴사납게도 또 인간의 세 치 혀를 믿어 버렸다.

이곳까지 오는 길에 들었던 말들은 전부 거짓이었나.

화가 좀체 가라앉질 않았다. 이건 플로라의 트라우마였다. 센칸에서 얻은 무수히 많은 악몽 중 하나.

센칸의 왕 라비우는 메린 성에 방문할 때마다 연무장에서 지목한 기사들을 대련시켰다. 그건 단순 대련이 아니었다. 동료를 베어 죽여야만 끝나는 게임이었다.

플로라의 눈앞에는 지금 그 일이 반복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 이런 개죽음이 신의 뜻이라면 기꺼이 따라야지.’

아이든이나 라비우 손에 죽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다.

‘그래도 넌 꼭 데려간다.’

플로라는 검을 고쳐 쥐며 에르네를 노려봤다. 저승길 동무로 나쁘지 않은 외모였다.

어떻게 공략해야 할까.

그는 황실의 기사단장이니 절대 얕볼 수 없는 상대였다. 아마 이대로라면 저 몸에 상처 한 번 못 내고 죽을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래도 가까이 붙으면…….’

치명상 한 번 정도는 입힐 수 있겠지.

원거리가 아니면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암살하는 것이 플로라의 장점이었다. 무엇이든 해봐야 했다.

선 공격은 에르네였다. 대번에 목을 향해 날아오는 검의 기세는 흉흉했다. 처음부터 단순 대련이라고 착각하질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플로라는 능숙하게 칼을 피하며 반격했다.

몸을 숙여 속도를 높이고, 에르네에게 다가갔다. 그에게 검을 밀어 넣으려 하자, 공격 의도를 눈치 챈 에르네는 손쉽게 거리를 벌렸다.

멀어진 에르네는 지긋이 플로라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플로라도 피하지 않았다.

눈동자가 검처럼 강렬하게 맞부딪쳤다. 에르네의 짙은 보라색 눈동자는 아름다웠지만 어쩐지 사람의 것이 아닌 듯했다.

자신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말했을 때처럼…… 그래, 마치 죽음을 품은 눈 같았다.

챙그랑. 어느새 부딪친 두 사람의 검이 빠르게 멀어졌다. 찰나의 공격으로 아름답게 흩날리는 드레스 자락이 살짝 에르네의 검 끝에 스쳤다. 스윽, 종이처럼 비싼 천이 찢겨 나갔다.

진검이 주는 아찔한 흥분이 있다. 숨이 턱 끝까지 막혀 곧 눈이 뒤집힐 것 같은데도, 가슴 깊은 곳에선 어떤 웅장함이 느껴졌다.

이기고 싶은 욕구가 용솟음쳤다. 강한 상대를 보면 으레 그렇게 느끼곤 했다.

에르네는 약점이라곤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불필요한 공격이나 야비한 속임수 따위도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의 검은 빠르게 부딪치고 멀어지길 반복했다. 플로라는 포기하지 않고 공격을 막고, 그의 약점을 찾아 들쑤시길 반복했다.

플로라의 분노는 점차 줄었다.

대련이 이어질수록 처음엔 감정에 사로잡혀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였다.

검을 맞대고 나서야 알았다. 에르네는 합을 맞춰주고 있었다. 그는 전력을 다하지 않고 있다.

챙, 챙.

대련이 지속될수록 점점 더 깨닫는 게 많아졌다. 플로라는 결론지었다.

에르네는 자신을 죽이지 않을 거란 것을.

그리고 이 살기는 그가 가진 어쩔 수 없는 ‘본능’이라는 걸.

플로라는 살기를 본능으로 가진 사람을 오랜 시간 봐왔다. 바로 메린 성의 주인 아이든 헤제너였다.

아이든은 일정 주기마다 사람을 죽이고 난도질해야만 숨 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지 못하면 미쳐 날뛰거나 방에 틀어박혀 종일 울곤 했다. 심지어는 다른 사람을 죽이지 못해 저 자신의 목숨을 끊으려 한 적도 있었다.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미친다니. 멀쩡할 때도 미친놈인데, 이성을 잃으면 더 미친 새끼였다.

에르네에게도 그런 본능이 있는 게 분명했다. 섬뜩하고 끈적한 죽음의 기운.

그런데도 이상하게 검을 맞대고 보니 오히려 처음 만났을 때보다 두렵지 않았다.

저를 해치지 않을 거란 신뢰가 검을 맞부딪칠 때마다 견고하게 쌓여갔다.

플로라가 느끼기에 에르네는 지금보다 더 난폭하게 검을 다룰 수 있는 자였다. 이미 자신을 죽이고자 마음먹었으면 첫 합에 목이 날아갔을 거란 뜻이다.

깨달아가는 것이 많을수록 플로라의 살기는 점점 꺾였다.

그에 에르네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을 찡그렸다.

“……흣.”

순간 공기가 무겁게 바뀌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플로라가 에르네의 일격을 막으려 했지만, 늦었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공격이 이어졌다.

스윽, 기묘한 감각이 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베였다는 걸 인지한 뒤에야 통증이 찾아왔다.

잘못된 방향으로 검을 뻗느라 손목이 뻐근했다. 플로라의 입술 사이로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곧 에르네가 검을 거뒀다. 플로라는 그가 가볍게 묵례하는 것을 본 뒤에야 이 대련이 끝났다는 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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