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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10)화 (10/154)

10.

플로라는 본론에 들어갔다.

“그래서 말인데요. 저, 산책을 나가도 될까요? 종일 방에만 있으니 갑갑해서요.”

“흠…… 아직은 조금만 걸어도 어깨가 아프실 텐데요.”

“무리하지 않으면…….”

“며칠만 더 버티시는 게 어떨까요? 레이디. 레이디의 상태가 악화되면 제가 꽤 슬플 것 같거든요.”

“아…….”

이든이 아침, 저녁으로 꼬박 고생해준 노고는 잘 알고 있었다. 

며칠 더 못 참을 일은 아니었지만 괜히 서운해져서 시선을 내리자, 이든이 말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아픈 건 슬픈 일이랍니다. 전 이제 레이디를 건강한 모습으로 보고 싶어요.”

플로라는 이든의 말에 잠시 숨을 멈췄다. 다 낫고 외출해도 늦지 않았단 말을 이리 예쁘게도 한다. 

꽁해졌던 마음이 한순간에 사르륵 녹아 버렸다. 그의 따뜻함은 타고난 것이 분명했다.

“……네. 얼른 나을게요!”

이든이 다시 기특하다는 듯 말간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아, 매일 생각하지만 남길 잘했다. 하네칸의 복지는 정말 최고였다.

* * *

플로라는 오찬을 마치고, 창가에 서서 성의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흐드러지게 핀 분홍색 꽃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한참을 보고 있어도 질리지가 않았다. 

한때 이런 안락함은 그녀의 삶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만 생각했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사치인 것 같았다.

“플로라.”

어두운 기억 속으로 빨려 들어가려던 찰나였다.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시녀 루가르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사색에 빠져 방 안에 누군가 들어왔다는 것도 몰랐던 플로라가 놀라 뒤를 돌았다.

“무슨 생각을 했나? 방에 누가 온 지도 모르고.”

“아…….”

이게 얼마 만이지. 열흘 만이던가? 그를 본 순간, 세상의 시간이 멈춘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머리로는 인사를 해야 한다는 걸 아는데 말문이 막혀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다.

시몬 이제너스. 하네칸의 황제. 보석처럼 반짝이는 그의 주황색 동공은 여전히 사람을 홀리는 사술을 품고 있었다.

“……폐하. 언제 오셨습니까?”

“방금.”

한 뼘 거리까지 다가와 있는 그 때문에 놀라 뒤로 물러서자, 시몬이 씩 웃었다.

“다 죽어가더니 이제야 좀 볼만해졌어. 그동안 푹 쉬었나?”

“네. 폐하의 은혜 덕분입니다.”

플로라는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한 걸음 물러섰지만 거리는 여전히 가까웠다. 숨을 쉬는 것조차 신경 쓰일 정도였다.

한참 말없이 플로라를 바라보던 시몬이 입을 열었다.

“갑자기 태도가 공손해졌어. 오랜만이라 이름을 잊기라도 했나.”

“이제 저는 폐하의 신하니까요. 폐하의 존함을 함부로 부를 순 없습니다.”

“그것참 섭섭한 소리인걸. 이곳에 머물러 달라는 제안을 괜히 했나 싶을 정도야.”

시몬이 허리를 살짝 굽혀 시선을 맞춰 왔다. 등에 이미 창틀이 맞닿을 정도라 플로라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저 눈을 보고 있으니, 온 감각이 뜨겁게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아…… 설명할 순 없지만 어딘지 곤란했다.

“내가 허락한 일이니 괜찮아. 둘만 있을 땐 그냥 이름을 부르도록 해. 우리, 친해져야 하잖아.”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난 널 앞으로 예쁜이라고 부르고 다닐 거야. 성에 모든 사람들이 듣도록 매일 쫓아다니면서 괴롭힐 거야.”

뭐 이런 억지가 다 있나.

플로라는 고개를 들어 시몬과 눈을 맞췄다. 호기롭게 웃는 모습이 꼭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그래서 더 불안했다. 어쩐지 시몬이라면 정말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시몬.”

“응. 플로라.”

플로라는 대참사가 일어나기 전에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

몸이 다 낫고, 머물 기사단이 정해지면 시몬과 단둘이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는 제국의 태양이고, 자신은 일개 기사가 될 테니까.

‘……잠깐은 괜찮겠지.’

플로라에게도 황제의 이름을 친근하게 부르던 시절이 있었노라, 하고 작은 추억을 남길 수 있으니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열심히 이름을 불러줘야겠다.

시몬은 원하는 것을 얻어 기분이 좋은 듯 플로라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길게 늘어진 은빛 머리칼에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근데 왜 아직도 잠옷 차림인 거지? 방금 일어났나?”

“아니요. 옷이 이것밖에 없어서요.”

“…….”

“성으로 올 때 입고 왔던 옷은 시녀가 버린 모양인지 보이지 않던데요.”

“그럼, 치유를 받을 때도 이 상태인가? 매일?”

“네.”

시몬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인상을 팍 구겼다.

“……환장하겠군.”

이든이 했던 소름 끼치는 말이 떠오른 탓이었다.

‘얼마나 귀여운지 몰라. 토끼 같아.’

“시녀에게 연무복을 챙겨줄 수 있겠느냐고 부탁을 하긴 했는데, 아직 소식이 없네요. 적당한 의복이 생기면 잘 갖춰 입고 다니겠습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시몬이 말을 하다말고 멈추자, 플로라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혹시 치유사가 예쁘장하게 생겨서 여자인 줄 알았나?”

“네?”

“걔 남자야.”

“알고 있습니다.”

“안다고?”

“네. 무슨 문제라도…….”

시몬이 미간을 찡그린 채 손을 뻗었다. 이내 희고 긴 손가락이 그녀의 이마를 톡, 하고 튕겨냈다.

“넌 조심성이 없어.”

갑작스러운 말에 황당해서 입을 벌린 채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조심성이 없다니? 대체 어느 지점에서.

“제가…… 뭘 잘못했나요?”

“말 안 해줘.”

말도 안 해줄 거면서. 어쩐지 좀 억울해졌다.

그리고 시몬은 결국 끝까지 어디가 어떻게 조심성이 없는지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이리와.”

그는 화제를 바꾸려는 모양인지 플로라의 손을 잡고, 옷장 앞으로 향했다.

“네가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

“……네?”

그는 별다른 말 없이 옷장 문을 열었다. 안에는 귀족 영애들이나 입을 법한 고급 드레스가 열 벌 정도 걸려 있었다. 이미 며칠 전에 눈을 반짝이며 구경한 옷들이었다.

“옷이 없다기에. 그럼 이것들은 다 뭐지? 네게 잘 어울릴 것 같아 준비한 건데.”

“이게 다…… 제 옷이라고요?”

“그래.”

자신의 것인지는 몰랐다.

구경할 때 군침을 흘리긴 했지만, 혹여 비싼 천이 상하기라도 할까 입어보지도 못하고 곱게 넣어뒀다.

시녀가 드레스로 갈아입지 않겠느냐고 물었을 때에도 당연히 기겁하며 거절했다.

“시녀가 말해주지 않았나?”

“……제가 갈아입지 않겠다고 했어요.”

“왜?”

“제 것인 줄 몰랐어요.”

손님들이나 황녀 또는 황족이 성에 머물 때 입으라고 마련해둔 여벌의 드레스인 줄 알았다. 

하기야 영애마다 치수도 다르고 옷을 돌려 입을 사람들도 아닌데, 왜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런데…….”

“응?”

“이런 드레스는 움직이기가 불편해요. 제 처지에 입을만한 옷도 아닌 것 같고요.”

첩자 노릇을 할 때 드레스를 입어본 적 있었다. 그래서 이런 아름다운 옷이 얼마나 움직이기 불편한지 잘 알았다.

그리고…….

‘드레스를 걸쳤다고 자기가 귀족이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지? 재수 없어.’

‘아이든 님과 전하께 몸을 대주는 년이니 어쩌겠어. 인정하긴 싫어도 총애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걸.’

‘그럴 거면 뒷방에 고고한 척 처박혀 있을 것이지 기사 노릇 하는 게 역겹잖아.’

‘우리랑은 다른 걸 과시하고 싶겠지. 자기가 얼마나 걸레처럼 보이는지도 모르고.’

이런 옷은 그녀의 분수에 맞지 않았다. 시몬이 자신을 위해 준비한 옷이란 걸 진작 알았더라도 입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녀에게 드레스 같은 건 그저 환상이고 사치였다.

플로라의 표정이 한층 어두워졌다는 것을 깨달은 시몬도 덩달아 무언가 생각하듯 눈동자를 짙게 빛냈다.

“뭐. 어쩔 수 없지. 그럼 연무복이 생길 때까지 방 안에만 있는 수밖에.”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는 그의 표정은 어느새 평소처럼 돌아와 있었다.

“난 이제 훈련을 가봐야겠다. 혹시 네가 갑갑해할 것 같아, 훈련장을 구경시켜줄까 했는데 아쉽게 됐네.”

“훈련장이요?”

플로라는 사색에서 벗어났다. 그녀가 가장 원하는 것을 시몬이 간파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그는 움직이기 편한 연무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래. 근데 넌 드레스를 입고 싶지 않다며. 어쩔 수 없게 됐어. 잠옷을 입고 외출할 순 없잖아?”

플로라는 잠옷을 입은 채 외출해도 상관없긴 했지만, 그녀를 데려온 시몬을 위해서라도 예의는 챙겨야 했다. 또 헛된 추문들이 돌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움직이기가 좀 불편하다고 했지, 입기 싫다고 한 적은 없어요.”

“처지에 맞는 것 같지 않다며?”

“……하, 하지만, 시몬이 선물로 준 거니까. 입어 볼까요?”

윽. 뭔가 비굴해지는 기분이었다. 외출 한 번에 마음이 이리 쉽게 변하다니. 갈대 같은 여자.

플로라는 왠지 창피해서 시몬과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그럼 입어볼래? 갈까?”

“네.”

난 미끼를 던졌고, 넌 그것을 물어버린 거야.

“이걸로 입자. 잘 어울릴 거야.”

시몬은 생글 웃으며 골라둔 드레스를 플로라에게 건넸다.

별을 수놓은 듯 반짝거리는 파란색 드레스였다.

“저 하얀색 드레스가 더 편해 보이는데요. 저걸로…….”

“그냥 이걸로 해.”

시몬은 옷장 문을 꼭 닫아버렸다.

사악한 미소를 보니 뭔가 말린 것 같단 생각은 들었지만, 밖을 나갈 수 있단 기대가 더 커서 깊게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뭐든 걸치기만 하면 되지 않겠나.

“아, 그런데요. 시몬.”

“응?”

“이든이 외출은 며칠만 더 참으라고 했는데…….”

들떴던 것은 잠깐이었다.

순간 슬픔에 젖은 이든의 얼굴이 생각나는 바람에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혹시 나가서 감기라도 걸려 돌아오면 이든의 촉촉한 눈망울에서 눈물이라도 떨어지는 게 아닐지…….

“그래서 안 나갈 거야?”

시몬이 불퉁하게 물었다.

플로라는 잠시 고민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싶긴 했지.

“갈래요!”

플로라는 눈을 빛내며 잠옷의 매듭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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