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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8)화 (8/154)

8.

지금 무시하는 건가?

너 같은 게 감히 그 자리까지 노리는 것이냐고 묻는 것 같았다.

어릴 때부터 다져온 승부욕이 고개를 들던 찰나였다.

머리 위로 시몬의 손이 올라왔다.

“그럼 난 기밀 같은 건 얼마든 내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예쁜아.”

낯간지러운 말은 뒷전이었다.

시몬의 미소가 플로라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등 뒤로 들이치는 햇살 때문에 눈이 부신 건지, 그에게서 후광이 비치는 건지 모르겠다.

지금 웃어주는 저 얼굴이 얼마나 예쁜지 본인은 알까.

‘저런 얼굴로 태어났다면 나라도 주색을 즐겼을 거야.’

그렇고말고.

“뭐, 네가 미인계를 쓴다면 금방 올라올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시몬이 머리를 토닥였다.

할 수 있으면 어디 해봐라, 다 내어줄 테니. 같은 오만한 말처럼 들렸지만 또 한편으론 왜 이리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인지 모르겠다.

“……미인계는 시몬이 쓰고 있는 것 같은데요.”

“응?”

“아, 아니에요.”

……속마음이 실수로 나왔다.

다행히 시몬은 듣지 못한 것 같았다. 플로라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표정을 굳혔다.

“시몬이 그런 위험까지 감수해가면서 탐낼 인재는 아닙니다. 저는.”

“겸손한 건가, 아니면 거절하려는 건가. 내가 이렇게까지 질척거리는데 또 거절하면, 무척 상처받지 않겠어?”

분명 사술에 당했다.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시몬이 조금 슬픈 표정을 지었다고 감정이 동요할 리 없었다.

지난 세월 혹독하게 훈련해온 것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 * *

“안녕하세요! 플로라 님. 저는 오늘부터 플로라 님을 모시게 된 루가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안녕하세요. 루가르 님.”

어쩌다…….

‘날 안일하다고 질책해도 어쩔 수 없어. 어차피 난 지금도 매일 죽음의 위협 속에서 살고 있어. 이 성에 있는 모두가 내게 충성을 맹세하진 않으니까.’

플로라는 당분간 몸이 회복될 때까지 자신을 보필해줄 시녀와 인사를 나누다 불현듯 시몬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짙게 가라앉은 그의 눈빛이 잔상처럼 마음에 남아 사라지지 않았다.

죽음의 위협 속에서 하루하루 버겁게 살아온 듯한, 어쩌면 동질감일 수도 있는 낯선 감정이 느껴졌다.

‘신뢰는 시간이 해결해줄 거야. 그대도 지금 날 믿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잖아.’

머리를 부드럽게 토닥거리는 손길, 이젠 안심하라는 듯 부드럽게 들리는 목소리. 그런 따뜻함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 찾아주세요.”

“……고맙습니다. 루가르 님.”

“제게 말은 편히 낮추셔도 돼요.”

사술이든, 마법이든 상관없었다. 그런 따뜻함을 조금 더 느껴보고 싶었다.

“아직 익숙하지가 않아서요. 천천히 할게요.”

사실은 사람이 그리웠던 걸까…….

“알겠습니다. 부상을 크게 당하셨다고 들었어요. 앉아 있는 것도 버거우실 텐데 이만 누워 쉬세요. 저녁엔 치유사 님이 오실 거예요.”

“……네.”

플로라는 인사를 마치자마자 도로 침대에 누웠다. 이불을 정돈해준 루가르가 방을 빠져나가자, 침묵이 찾아왔다.

처음 눈을 떴을 때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레이스 캐노피가 눈에 들어왔다. 분명 현실인데 꿈인 것만 같고, 기분이 묘했다.

하네칸의 플로라.

이곳에 남기로 결정했으니, 더 이상 도망치며 살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그 결정은 너무 충동적이었다. 그래서 막막하기도 하고 두려웠다.

‘아이든이 알게 된다면…….’

이곳이 안전하리란 보장 또한 없었다. 플로라는 갑작스레 느껴진 불길한 기운에 이불을 꼭 말아 쥐며 눈을 감았다.

* * *

불편한 시선이 느껴졌다. 참다못한 시몬이 결국 서류를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눈에서 불이라도 나오겠어. 에르네.”

<폐하.>

“불만이 굉장히 많아 보이는데, 나도 알아. 무모한 짓이었다는 거. 하지만 플로라가 내게 큰 도움이 될 수도 있잖아.”

<오히려 그 반대일 수도 있단 생각은 안 하십니까? 예전에도 말씀드렸지만, 폐하께선 도박에 손 안 대신 것이 천만다행입니다. 당장의 위험보다 나중에 얻을 것을 더 생각하시다니요.>

“도박에 빠졌으면 국고까지 탈탈 털어먹었을 것 같지? 나도 그래.”

이 와중에도 천연덕스럽게 웃는 황제를 보고, 에르네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께선 지금 쥐신 능력과 패만으로도 충분히 황권을 바로잡으실 수 있습니다.>

“……단순한 귀족들의 부정부패만으로는 무너진 기강을 바로잡기 어려워. 교묘하게 꼬리를 자르거나 힘없는 귀족 가문에게 죄를 덮어씌울 거야.”

시몬의 얼굴에 근심이 드리운 듯하자, 에르네가 잠시 침묵을 지켰다가 다시 조심스레 말했다.

<그 여자가 겪은 일에 귀족이 연관되어 있다 판단하신다면 억지로 정보를 취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폐하께서 방향을 잘못 짚으신 것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쉬운 방법을 두시고 왜…….>

물론 알고 있다. 더 쉬운 방법이 있다는 거. 그렇지만…….

“난 원래 고생을 사서 하는 성격이야. 알잖아.”

시몬은 빙그르르, 의자를 돌려 등 뒤에 있는 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황제가 머무는 성 앞 정원은 계절마다 철에 맞는 꽃들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햇빛을 담뿍 받아 반짝이는 연분홍색 꽃잎들이 싱그러웠다. 그러고 보니 밝은 대낮에 이 풍경을 내려다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이 일이 귀족들 귀에 들어가면 그녀는 폐하의 약점이 될 겁니다. 하나를 건네주면 두 개를 취하려는 작자들인 것 아시잖습니까.>

시몬은 플로라를 떠올렸다. 적들에게 쫓기던 모습과 자신을 구하기 위해 홀로 전장으로 뛰어들던 뒷모습까지.

이런 일에 사사로운 감정을 잘 이입하지 않는 편이지만, 그녀의 흑요석처럼 검은 눈동자 속에서 슬픔과 외로움을 보았기 때문에. 그것은 마치 어린 날의 자신 같았기 때문에 외면하기가 어려웠다.

성에 들인 것은 그답지 않게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차근차근 약점을 파악했고, 그것을 이용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지금 계획의 반은 무너진 것 같았다. 아마 황권을 바로잡기 위한 일이라는 것도 핑계가 되어 버렸는지 모르겠다. 그걸 약삭빠른 에르네도 눈치챘을 테니, 이리 불만을 가질 만도 하다.

<불쌍하게 여기신 겁니까.>

“모르겠어.”

<…….>

“그냥…… 좀 더 지켜보자고. 이번엔 왠지 옳은 베팅을 한 것 같단 말이야.”

시몬은 에둘러 그리 말하며 생긋 웃었다. 에르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지만.

<……수상한 낌새가 보이면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고생해줘. 고생하는 김에 이건 어때?”

<무슨…….>

“멀리서 감시하는 건 번거로우니 아예 근위대에 두고 챙기는 거야. 너도 봤겠지만 그 애, 활 쏘는 실력이 장난 아니던데. 시험은 충분히 통과하지…….”

에르네의 보랏빛 눈동자가 붉게 타오르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이겠지.

시몬이 아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농담이라고 손을 휘저었다.

* * *

‘뭐지…….’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플로라의 침대 옆에서 걸음을 멈춘 낯선 이는 겁도 없이 손을 뻗어왔다.

‘습격인가?’

하네칸의 성이라고 안심할 건 못 되었다. 아니. 어쩌면 더 경계해야 할지도 모른다.

타악.

“누구지?”

괴한의 손이 몸에 닿기 전, 플로라는 힘주어 그 손목을 잡았다.

“……아!”

손목을 잡힌 괴한이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눈을 뜬 플로라는 경계 어린 눈으로 남자를 노려보았다.

윤기가 흐르는 보랏빛의 긴 머리칼과 태양 같은 금안이 돋보이는 아름다운 남자였다.

하얀색 망토가 달린 로브의 가슴에는 화려한 자수가 새겨져 있었다.

“안녕하세요? 레이디.”

놀란 듯 보였던 남자는 이내 생긋 웃으며 인사를 해왔다.

다시 봐도 괴한의 몰골은 아니었다. 눈을 찡그린 모습도, 웃는 모습도 모두 아름답기만 했다.

플로라가 불시에 드러낸 살의까지 정화시킬 정도로 성스럽고 따뜻했다.

얼결에 붙잡았던 손을 놓았다. 플로라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남자가 어깨를 가볍게 눌러오며 행동을 저지했다.

‘그냥 누워 있으란 뜻인가?’

곧 정체 모를 이의 입술이 열렸다.

“저는 레이디의 치유를 맡은 이든 티아벨입니다.”

치유사, 이든…….

그러고 보니, 아까 시녀가 저녁에 치유사가 방문할 거라고 했었다.

“아…….”

플로라는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닫고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하마터면 신의 은총을 받은 신관의 손목을 부러뜨릴 뻔했다.

“잠깐 상태만 보고 가려 들렀는데 잠에서 깨실 줄은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치유사 님께 결례를 범했습니다. 저는 플로라라고 합니다. 아르제카 님의 은총이 깃들기를…….”

하네칸에서 치유의 마법을 다룰 수 있는 것은 아르제카 신전의 신관들뿐이었다. 그래서 이든이 이렇게 따뜻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네칸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공부했던 게 천만다행이었다. 늦게라도 정중하게 인사를 나눌 수 있으니.

‘근데 남자는 맞나? 뭐 저렇게 예뻐. 웃는 것보다 우는 모습이 게 더 예쁠 것 같은데…….’

플로라는 홀린 듯 이든의 황금빛 눈동자를 바라보다, 놀라 헛숨을 삼켰다.

아이든 그 미친놈처럼 사디스트나 할 법한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이 소름 끼쳤다.

‘도망쳐요, 이든……!’

그런 생각을 알 리 없는 이든은 눈을 반짝이며 다시금 온화한 미소를 보여 주었다.

“레이디 플로라 양께도 아르제카 님의 은총이 깃들기를.”

“……가, 감사합니다.”

어쩐지 가만히 누워 이든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불경을 저지르고 있는 것 같았다.

가시덤불 위에 누운 것처럼 불편해서 몸을 달싹이자, 이든이 걱정스런 눈을 했다.

“불편하시겠지만, 지금은 몸을 최대한 움직이시지 않는 게 좋습니다. 레이디.”

“……네.”

“제가 상처를 좀 봐도 되겠습니까?”

플로라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지금은 치유 따위 안중에 없었다.

이든의 얼굴만 보고 있어도 고통쯤은 가볍게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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