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6)화 (6/154)

6.

정식 서임을 받지 못한 기사들은 이름이 없어 ‘실험체’ 혹은 ‘루엘’로 불린다. 

이번 플로라를 잡는 임무에는 정식 기사뿐 아니라 루엘들도 투입되었다. 그중 살아남은 루엘은 고작 세 명뿐이었지만, 그들은 죽은 동료들에 대한 슬픔을 느끼지 못했다. 

플로라를 들쳐 업은 루엘84가 싱글벙글 웃고 있는 모습만 보아도 그랬다.

그들의 눈에는 오직 앞으로 펼쳐질 영광밖에 보이지 않았다. 

메린 성에서 도망쳤다는 전설의 플로라를 생포했으니 엄청난 보상이 따를 것이다. 

센칸의 기사단에 편입되는 것은 물론, 이름도 부여받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끔찍한 실험에서도 드디어 벗어날 수 있어…….’

루엘84의 뒤를 따르는 루엘88, 루엘90 역시나 즐거워 보였다.

“잠깐. 거기.”

얼마 지나지 않아 산을 내려가는 그들의 앞에 방해꾼이 나타났다. 

비싸 보이는 옷은 찢어지고, 허벅지도 다친 듯 천을 감고 있었지만 외모만큼은 끝내주게 잘생긴 남자였다.

“뭐지?”

루엘84가 목소리를 내리깔며 그를 경계했다.

“그 여자는 두고 가.”

그 여자라 함은 플로라를 가리키는 것인가. 다짜고짜 그렇게 말하며 싱글벙글 웃는 낯에 루엘84는 순간 화가 치솟았다.

‘뭐 이런 미친 새끼가 다 있지?’

어떻게 생포한 계집인데, 당당하게 두고 가란 말을 할 수 있는가? 장난하자는 건가?

“뭐 하는 자식이야? 당장 꺼져.”

“어허. 이봐. 여긴 내 땅이야. 내 땅에 있는 걸 왜 허락도 없이 훔쳐 가려고 해? 돌멩이 하나도 용납 못 해. 말로 할 때 두고 가.”

이 산의 주인인가. 어이가 없었다.

“비키지 않으면 죽이겠다.”

“순순히 넘기지 않으면 이쪽도 마찬가지야.”

루엘들의 눈에는 남자가 그저 밟으면 찍소리도 못 내고 죽을 개미 새끼처럼 보였다. 그러니 도발에도 콧방귀밖에 나오지 않았다. 

돈이 많아 보이는 남자였다. 그냥 죽이고 비싸 보이는 물건들을 가져가는 것도 기념품으로 손색이 없으리라.

“밟아 으깨주지.”

루엘84는 둘러업고 있던 플로라를 아무렇게나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걸 본 남자의 표정이 싸하게 굳었다.

‘오호.’

루엘84가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아, 네 반응을 보니 알겠어. 여기서 이 계집과 붙어먹던 놈인 모양이지? 우릴 배신하고 도망쳐 하는 짓이 결국 남자에게 몸이나 대주는 일이었다니……. 더러운 년.”

루엘84의 도발에 남자의 눈빛이 점점 매서워졌다.

“플로라를 왜 쫓는 거지?”

가라앉은 목소리에선 왠지 모를 위압감이 느껴졌지만, 루엘들은 침착한 척 표정을 굳혔다.

“이 년이 제 이름도 알려준 모양이네. 넌 우리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지?”

“애석하게도 아는 게 없어. 직접 가르쳐주겠나? 좀 궁금한 게 많은데.”

“곧 죽을 놈에게 말해 뭐해? 입 아프게. 그냥 장차 영웅이 될 이 몸에게 죽는 걸 영광으로 생각해라.”

루엘들이 무기를 빼 들었다. 하지만 앞에 선 남자는 방어 태세도 갖추지 않았다.

“윽!”

건방지다고 생각한 찰나였다. 미약한 비명과 함께 루엘84의 뒤에 있던 동료들이 바닥에 쓰러졌다.

“뭐야!”

그는 황급히 뒤를 돌아 상황을 확인했다. 어느새 나타난 괴한들이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일행이 더 있었던 모양이었다. 소리도 흔적도 느껴지지 않아 미처 깨닫지 못했다.

‘너무 얕봤어.’

순간, 루엘84의 눈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는 아직 정식 이름도 부여받지 못한 일개 실험체에 불과했기에 그만큼 경험도 부족했다. 

그래도 눈앞에 이 자들이 비범하다는 것쯤은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비겁한 놈들!”

루엘84가 씨근덕거리자, 남자가 실소를 터트렸다.

“고작 여자 한 명을 잡기 위해 수십 명이 남의 땅까지 기어들어 와 놓고. 그대가 비겁을 논할 자격이 있는가.”

“…….”

“어디서 왔는지 말해. 그럼 목숨 정도는 살려 줄 테니.”

차갑게 내려앉은 남자의 목소리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알 수 없는 위압감이 온몸을 덮쳤다. 

처음 그가 앞을 막아설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그저 돈 많은 산지기 정도인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잘못 짚은 듯했다.

“아니면 마법 결계를 어떻게 넘은 건지. 그거라도?”

루엘84는 입술을 비틀어 올리는 것으로 그 두려움을 애써 감췄다.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남자가 뒤에 있던 괴한들에게 눈짓했다. 공격을 해올 것을 대비해 반격하려고 마음먹은 순간이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윽.”

“자기 목숨 따윈 아무렇지 않다는 건가. 배후가 누군지 점점 더 궁금해지는군.”

쿨럭, 입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지면서 눈앞이 흐릿해졌다. 

얼마나 빠른 속도로 공격해온 것인지, 바닥에 무너져 피를 토할 때까지 루엘84는 자신이 공격당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그는 죽기 직전 겨우 고개를 들어 상대를 보았다. 

서늘하다. 자비라곤 조금도 보이지 않는 무감정한 시선이 그의 눈에 비친 마지막이었다.

“괜찮으십니까. 폐하.”

“괜찮아.”

시몬은 루엘84까지 죽어버리자 흥미를 잃은 듯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무력하게 쓰러져 있는 플로라에게로 다가가 그녀를 안아 들었다.

“폐하, 제가 하겠……!”

“됐다. 에르네만 날 따르고, 너희는 또 다른 놈들이 없나 주변을 수색해.”

“예. 폐하.”

“그동안 결계에 이상 징후가 생겼던 게 이놈들 때문일지도 몰라. 내 질문에 눈빛이 달라지더군. 마도구를 지닌 것이 있는지 살펴봐.”

“예.”

“마음 같아선 해부라도 해보고 싶은데 마법사들에게 시킬 수도 없고. 이든은 기겁하겠지?”

시몬의 잔인한 말에, 곁에 서 있던 에르네가 긍정의 의미를 담은 시선을 보냈다.

질색하는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라 시몬이 픽, 웃었다.

“수색이 끝나면 시체는 누구도 발견하지 못하도록 처리해. 괜한 소문이 돌면 곤란하니까.”

“알겠습니다.”

“그리고 산 밑에서 날 찾고 있을 머저리들한테는 먼저 성으로 돌아간다고 전해주고.”

시몬의 시선이 품에 안긴 플로라에게 내려앉았다.

작은 얼굴에 눈, 코, 입이 예쁘게도 모여 있었다. 

은빛 머리칼은 흐트러진 채 바람결에 휘날렸지만 그마저도 시몬의 눈에는 별을 품은 듯 찬란해 보였다.

무슨 일이 있어 이리 쫓기고 있던 것일까.

그녀가 대답해주지 않았던 것이 오히려 시몬에게는 흥미였다.

“……이 여자 때문이었나.”

신원을 알 수 없는 시체, 그리고 지속적으로 마법진을 넘나들던 의문의 존재들.

그들의 표적이 된 여자.

‘뭔가 있어.’

딱 맞아떨어지는 가설에 시몬의 표정이 조금 더 서늘해졌다.

* * *

“왜! 아직도 소식이 없지? 왜?”

아이든은 실험실 안을 뱅뱅 돌았다. 조금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머리를 쥐어뜯기도 하고, 자신의 뺨을 내리치며 자학도 했다.

“플로라! 왜!”

불안한 사람처럼 손톱을 깨물며 끊임없이 방 안을 돌아다녔지만 시간이 지나도 기다리는 소식은 오지 않았다.

조금만 참자.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아이든은 돌연 킥킥거리며 웃었다.

“플로라! 넌 내 거야. 결국 돌아오게 되어 있다고.”

광기에 젖은 목소리로 플로라의 이름을 외치던 순간이었다. 

돌연 무언가 파사삭,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든이 표정을 싹 굳히고 책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 말도 안 돼…… 안 돼!”

기사와 루엘이 모두 죽었다.

“왜?”

기사들의 생존 여부를 나타내던 마도구가 조각나 흩어져 있었다. 아이든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뺨을 한 대 내리쳤다.

이번에는 분명 완벽했다. 감정에 치우치지도 않았고, 그녀가 은신하고 있는 위치를 알았음에도 공들여 포획할 준비를 했다. 그래서 평소보다 더 많은 기사를 보냈는데…….

역시 너무 만만하게 본 건가.

아이든이 절망에 휩싸인 얼굴로 의자에 주저앉을 때였다. 노크 없이 문이 열렸다. 가뜩이나 심기가 불편해져 있던 아이든은 들어온 이를 죽여야겠다고 마음먹고, 책상에 놓인 작은 나이프를 손에 쥐었다.

“오호, 죽이려고?”

다부진 팔 근육이 훤히 드러난 복장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어 붉은 머리칼과 매섭게 보이는 눈매, 뺨에 길게 난 상처도 보였다.

아이든은 손에 들고 있던 나이프를 놓치며 헛숨을 삼켰다.

태양에 그을린 듯한 고동색 피부와는 달리, 연한 갈색의 눈동자는 어쩐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어렸을 때 아이든은 저것을 맹수의 눈 같다고 생각했었다.

“아이든.”

거대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한 위압감은 어릴 때나 지금이나 아이든을 굴복시켰다. 

아이든은 그를 처음 봤을 때부터 맹목적으로 복종해야 할 상대로 인식했고, 그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미친개로 불리는 아이든이 복종하는 단 하나의 존재.

센칸의 왕, 라비우 오벨리아였다.

아이든은 바닥에 납죽 몸을 엎드렸다.

“……전하.”

“일어나. 아이든.”

라비우의 명령에 따라 아이든이 주춤 몸을 일으켰다. 라비우는 아이든의 지척까지 다가왔다. 

최소 두 뼘은 더 큰 키와 체구 덕분에 아이든의 얼굴 위로 그늘이 내려앉았다.

“방금 나 죽이려고 하지 않았나?”

“제가 어떻게…… 전하를…….”

“종종 개가 주인을 할퀴기도 한다던데.”

라비우는 무기력하게 서 있는 아이든의 목을 움켜쥐었다. 한 손에 가득 들어찬 목은 살짝만 힘주어도 금방 비틀 수 있을 것 같았다.

“플로라는?”

“윽, 최, 최선을 다해 찾고 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대답이다. 라비우는 이를 악물며 아이든을 자비 없이 밀쳤다. 

쾅. 허리를 책상 끝에 부딪친 아이든이 미약한 신음을 내뱉었다.

“이건 최선을 다하지 않은 거야. 최선을 다했다면 지금쯤 플로라는 이곳에 있겠지. 그렇지 않겠어?”

라비우의 목소리는 차분했으나, 그 속에 섞인 분노가 아이든을 두렵게 만들었다. 아이든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든. 그대가 하지 못하는 일은 없어. 나는 그대가 정신병자처럼 살인을 해도 문제 삼지 않았고, 굶어 죽어가던 볼품없는 놈에게 나만큼의 부를 쥐여 주었어. 어떤 이유에서지?”

‘충성스러운 개이기 때문에. 그리고 센칸 최고의 연금술사이기 때문에.’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왔다. 이제는 문신처럼 뇌에 새겨진 것만 같았다.

아이든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라비우가 잘했다는 듯 그의 머리를 토닥였다.

“플로라는 아이든 그대만큼이나 센칸의 소중한 재산이야. 잘 알고 있겠지.”

“……예. 전하.”

“날 더 이상 실망하게 만들지 마. 아이든.”

라비우의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진 것을 깨달은 아이든이 입술을 벌벌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삐뚤어진 안경을 고쳐 쓰며 라비우를 올려다봤다. 

어느새 아이든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그건 마치 주인에게 칭찬받고 싶어 하는 개처럼 보였다.

“해낼 거라 믿어. 플로라를 데려와.”

“…….”

“다음엔 좋은 일로 만나자고.”

아이든의 턱을 가볍게 쥐었다 놓은 라비우가 옅게 웃었다. 그 미소에 안도한 아이든의 눈에선 고여 있던 눈물이 툭 떨어졌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