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왜 그런 눈으로 보지? 아닌 것 같아? 의외야?”
이 세상은 참 불공평하게 굴러간다. 이제너스께서 모든 인간에게 평등한 마력을 주었다면 좋았을 테지만, 그렇지 않았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이 존재했다. 많은 마력을 가진 사람, 미비한 마력을 가진 사람, 그리고 아예 그조차 가지지 못한 사람.
많은 마력을 가진 존재들은 선천적으로 체력이 약했다. 많은 양의 마나를 가질수록 더욱 그랬다.
그래서 마법사들과 기사는 나뉠 수밖에 없었다. 마법사들은 검을 들 수 없었고, 기사는 마법사가 될 수 없어 대신 검을 들었다.
그러나 마수도 변종이 나오는 세상이다. 인간도 예외가 있었다.
강한 마력을 가지고도 검을 동시에 다룰 수 있는 자. 그들을 마스터라고 불렀다.
마스터들은 검에 마력을 담아 사용했다. 한 번 마음 먹고 검을 휘저으면 하급 마수 정도는 시체도 남지 않을 만큼의 위력을 가진 자들이었다.
“만약 내게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해도 네게 책임을 묻진 않을 테니 걱정 마라. 이제 됐지?”
세상은 정말 불공평하다는 걸 다시 느꼈다.
신이 이 작자에게 주지 않은 건 고작 위엄뿐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조차도 줬을지 모른다.
방금 전 화난 듯한 목소리에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위압감이 실려 있었으니까.
“자, 그럼 다음 얘길 해볼까? 널 공격한 사람들은 누구지?”
시몬은 금세 화제를 바꿨다.
황제가 마스터란 충격은 잠시였다. 플로라는 곤란한 질문에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말해줄 수 없는 것에 대해 물을 때마다 퍽 난감해졌다. 역시 더 말을 섞는 건 잘못된 선택이었나 보다.
하지만 그를 혼자 두고 떠나기엔 변을 당할까 걱정이 되기도 했고, 다리를 다치게 만든 것도 마음에 걸렸다.
이제 보니 그런 걱정 안 해도 제 몸 하나 잘 건사했을 텐데. 걱정이 과했다.
“또, 그 고얀 습관.”
시몬이 혀를 찼다.
“말해주지 않으니 더 궁금해져. 인간의 심리란 게 그런 거거든.”
“……제가 하네칸 제국민이 아니듯, 그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더 이상은 말씀드릴 수 없어요.”
플로라는 그의 눈을 바라보지 않기 위해 애썼다.
시몬의 신비로운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모든 걸 털어놓고 싶은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기 때문이었다.
“곤란해하는 것 같으니 할 수 없군. 내 힘으로 알아보도록 하지. 우리 제국에 법과 절차를 무시하고 멋대로 들이닥친 놈들이 있다는데 모른 척 넘길 순 없어.”
말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보통의 황제는 그렇지 않나.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문득 한때 자신의 주군이었던 라비우를 떠올리며, 그리고 살면서 만났던 몇몇 왕국의 왕들을 떠올리며 시몬에게 이질감을 느꼈다.
플로라는 약초 바른 허벅지를 천으로 꽉 동여매 준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갑자기 시몬이 팔을 세게 잡아 왔다.
“……윽.”
플로라는 반사적으로 시몬을 쓰러트렸다. 정신을 차렸을 땐 시몬의 위에 올라타 목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정말 악의를 가지고 죽이려던 게 아니라 습관 같은 행동일 뿐이었다.
시몬이 침대에 누워 미간을 찡그린 채 컥컥거렸다.
‘이번엔 정말 날 죽일지도 몰라.’
이놈의 반사 신경.
이성을 되찾은 플로라가 팔을 풀어내고 최대한 송구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시몬의 주황색 동공에 이채가 서려 보이는 것은 기분 탓이 아닐지도 모른다.
“너 지금…….”
“…….”
“나 눕힌 거야?”
그는 꽤나 충격받은 얼굴로 그렇게 물었다. 고작 한다는 말이. 긴장으로 바짝 죄이는 듯하던 신경이 팍 식었다.
“죄송합니다.”
눕힌 게 아니라 죽이려 했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플로라가 재빨리 몸을 피하려 하자, 시몬이 단숨에 그녀를 제압해 눕혔다.
당황한 플로라가 발버둥 쳤지만 벗어날 수 없었다.
“예쁜아, 우리 진도가 너무 빠른 것 같지 않아?”
“……비켜주십시오.”
“물론 난 좋지만.”
내려다보는 시몬의 얼굴에 장난이 가득 묻어 있었다. 플로라는 미간을 살짝 구겼다.
“다리…… 괜찮으신 거죠?”
“칼에 찔리고 괜찮은 사람이 있을까. 아픈데 참는 것뿐이야.”
그렇다고 하기엔 다리에 힘을 너무 주고 계시는걸요.
플로라는 움직이길 포기했다. 이미 전세가 역전됐다. 이럴 땐 상대를 다치게 하거나, 죽이지 않는 이상 순순히 벗어나갈 수 없었다.
하지만 둘 중 어느 하나도 시몬에게 할 수 없으니 얌전히 있어야 했다.
“이제 좀 고분고분하네.”
지익. 시몬이 플로라의 한쪽 로브를 찢어버린 것은 순식간이었다.
“지금 뭐 하는……!”
이어 그가 고개를 숙여 가까이 다가왔다. 익숙하지 않은 뜨거운 숨결이 팔 언저리에 닿자, 의지와 다르게 눈이 질끈 감겼다.
“너도 여기 다쳤잖아.”
“……흣.”
호, 하고 불어오는 바람에 그제야 팔에서 고통이 느껴졌다. 아까 기사들과 싸우다 화살에 스쳤던 상처인 듯했다. 저도 모르게 음흉한 생각을 했던 게 민망해져서 열이 났다.
“무슨 생각을 했기에 표정이 그래?”
“아무 생각 안 했습니다.”
허튼짓을 하면 황제라도 기절 정도는 시키리라 마음먹었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거짓말해도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얄궂게 소리 내어 웃는 것에 약이 올라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내게 발라준 것이 독초인지 아닌지, 실험해보자고.”
시몬은 약초를 손에 묻혀 플로라의 턱과 팔에 살살 얹기 시작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 것 같더니, 피도 흘리고 고통도 느끼는 모양이군.”
플로라가 살짝 신음하며 미간을 구기자, 놀리는 듯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프면 참지 말고 소리라도 질러.”
왠지 모를 오기가 생겨 플로라는 더욱이 이를 악물었다.
“깊게 베였어. 제대로 된 치유를 받지 않으면 상처가 회복되는 데 오래 걸릴 거야.”
“다 하셨으면 비켜주세요.”
“그래, 다 됐다.”
“……감사합니다.”
그는 약초를 다 발라주고 난 뒤에야 플로라의 위에서 내려왔다.
“뒤돌아 있을 테니 옷이라도 좀 챙겨 입어. 계속 그러고 있다간 내가 진짜 문제 생길 것 같으니까.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 젊고 혈기 왕성해. 생리적 현상이라 제어도 안 돼.”
로브 한쪽이 찢어진 탓에 조금만 잘못 몸을 움직이면 나신이 훤히 드러날 터였다.
그녀로서는 아무 문제없었지만 상대가 불편해하니 예의상 옷을 챙겨 입었다. 어차피 그녀도 이제 이곳을 떠나야 하기도 했고.
“이곳을 떠날 건가?”
“예.”
옷을 갈아입은 플로라를 보며 시몬이 물었다.
“갈 데는 있고?”
“찾아봐야죠. 잠시나마 시몬의 제국에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플로라는 시몬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리고 묵묵히 필요한 것들을 챙겼다.
여러 지역을 전전긍긍하며 도망 다녔지만, 이 산속에서는 그나마 오래 산 편이었다.
그래서 가지고 가야 할 것들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정리하려니 없었다. 왔던 그대로, 무기만 가지고 떠나면 끝이었다.
어쩐지 허무했다.
짐을 챙기는 플로라를 바라보던 시몬이 돌연 미간을 좁혔다.
곧 플로라도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리고 청각에 집중했다.
“누군가 있어.”
플로라와 시몬은 동시에 동굴의 입구로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 모두가 기운을 느꼈듯, 동굴을 향해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시몬은 이만 몸을 피하세요. 저를 노리는 자들일 겁니다. 제가 다른 쪽으로 유인하겠습니다.”
플로라는 아까 미처 처리하지 못한 센칸의 기사들일 거라 확신했다.
“플로라! 잠깐……!”
그녀는 시몬이 붙잡기도 전에 동굴을 빠져나갔다. 시몬이 뒤에서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자신 때문에 시몬이 이 일에 더 휘말리는 것은 원치 않았다. 마스터이기 이전에 그는 제국의 황제이자 사람이었다.
과한 능력을 가졌다 하더라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다. 그게 오늘일지도 몰랐다. 게다가 시몬은 다리도 다치지 않았나. 조심한다고 해서 나쁠 건 없었다.
그녀는 커다란 돌 뒤에 숨었다. 상황을 보려고 고개를 내밀려던 순간, 화살이 날아와 지척에 꽂혔다.
하나만 날아온 것을 보면, 경고를 날린 듯했다. 순순히 항복하면 죽이지는 않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겠지.
항복할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아직 전투하기에는 일렀다. 시몬이 동굴에서 나와도 저들이 알아채지 못하게 해야 한다.
플로라는 속으로 셋까지 세었다. 그리곤 적들을 다른 곳으로 유인하기 위해 소리 내어 뛰었다. 그녀의 미끼를 문 발소리가 들렸다.
휙. 휙.
“……읏.”
여러 군데서 동시에 화살이 날아왔다. 겨우 피했다 싶었는데 팔에 무언가 꽂혀 있는 것이 보였다.
플로라는 시야가 뒤집히고 나서야 그것이 수면 독이라는 걸 깨달았다.
플로라는 비인간적인 실험과 혹독한 훈련을 이겨냈다. 정식 기사가 된 이후, 의뢰받은 명령을 완수하지 못한 적은 없었기에 센칸의 영웅이라는 명예까지 따라붙었다.
그런 그녀도 기억나지 않는 한때엔 평범한 인간이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무적은 아니었다.
괴물이라 불려도 고작 인간이다. 남들처럼 목숨이 하나뿐인. 위험에 처하고 보니 역시 시몬을 끌어들이지 않길 잘했다 싶어졌다.
졸음이 쏟아지며 정신이 흐트러졌다. 플로라는 몸을 바들거리며 약을 이겨 내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그래도 독과 약을 이겨 내는 법에 대해서도 훈련을 받아 왔기에 일반인들보다는 더 버틸 수 있었다.
시간이 없다. 그동안 저들을 처리해야 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나무 뒤로 겨우 몸을 숨긴 플로라가 팔에 꽂힌 화살을 빼냈다. 강한 통증에 신음이 꽉 다문 잇새 사이로 새어 나왔다.
이 고통은 죽음으로 되갚으리라.
플로라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활을 들었다. 속이 울렁거리면서 시야가 두 개로 나뉘었다가 합쳐지길 반복했다.
‘이대로 다시 끌려갈 순 없어.’
방금 화살이 날아온 곳들에 적이 있다. 플로라는 감각이 기억하는 대로 활을 쐈다.
“……우욱.”
먹은 것도 얼마 없는데 토사물이 올라왔다. 땅에 아무렇게나 뱉어내고 정신을 차리기 위해 머리를 흔들었다.
얼마나 지독한 연금술을 부려 만들어낸 독인지 잠시라도 마음을 놓았다간 그대로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화살이 몇 번 더 날아왔지만 간신히 피해낸 플로라는 그동안 정신을 부여잡으며 기사 몇 명을 처치했다.
하지만 이제 정말 한계였다. 활시위를 당기는 팔 근육에 경련이 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가 머뭇거리는 사이, 다시 화살이 꽂혔다. 이번엔 오른쪽 어깨에 관통했다.
도망치던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쳤다.
이대로 끝인가.
풀썩.
플로라는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