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흠, 그대가 짐에게 보인 무례가 결코 가볍지 않다. 누구보다도 그대가 잘 알고 있겠지. 짐이 당장 사지를 찢어 죽인다 해도 그대는 할 말이 없어야 한다는 것. 하지만 짐의 아량이 바다보다 넓고 하늘보다 높으니 이번 한 번은 용서하도록 하겠다.”
황제가 쿡쿡 웃으며 ‘황제 흉내’를 냈다. 아, 어쩜 이리 눈곱만큼도 위엄이 없을 수가…….
“일단 자리부터 옮기자. 아이고, 다리 아파.”
황제 흉내가 재미없어진 듯 그가 끙끙 앓았다. 이곳에 계속 있는 건 무리라고 판단한 플로라가 황제를 부축했다.
“아이고, 아파.”
“…….”
“아야야.”
속마음이니까 하는 말이지만, 아지트까지 가는 동안 진심으로 황제에게 살의를 느꼈다.
그는 다친 다리를 별로 아파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성가실 정도로 엄살을 떨어댔고, 그 핑계로 플로라에게 거의 매달리다시피 의존했다.
“여기가 네 집인가?”
끙끙거리며 겨우 은신처에 도착하자, 황제는 언제 플로라에게 매달렸냐는 듯 멀쩡히 서서 동굴 안을 훑었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눈가가 제멋대로 떨렸다.
“그렇습니다. 폐하.”
플로라는 치미는 분노를 참고,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 짜내어 대답했다.
여긴 어차피 아이든에게 발각된 곳이니 금방 떠나야 했다.
그래도 숲 한복판보다는 이곳이 더 안전할 듯해 데려온 장소였다.
“놀랍게도 이런 곳에서 구색은 다 갖추고 사네. 근데 그 딱딱한 말투는 뭐야? 하던 대로 해. 어차피 나의 기사도, 제국민도 아니면서.”
“제국의 태양을 향한 예의는 지킬 줄 압니다.”
황제를 침대로 데려가 앉힌 플로라는 눈을 내리깔았다.
플로라는 각 나라에 첩자 또는 암살자로 활동하기 위해 많은 교육을 받았다.
그중에는 예의범절도 필수로 포함되어 있었다. 플로라가 상대해야 하는 사람들은 일개 하찮은 범죄자들뿐만이 아닌 귀족과 황족도 있었기 때문이다.
“내 이름은 시몬 이제너스다. 지금부터는 시몬이라고 불러.”
시몬 이제너스.
플로라는 누추한 침대에 앉아 있는 남자를 살짝 보았다.
말끔하게 올라간 검은 머리칼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얼굴은 신이 한 치의 실수도 없이 빚어놓은 것처럼 유려했다. 짙은 눈썹과 깜빡일 때마다 팔랑이는 긴 속눈썹, 그리고 영롱한 주황색 동공까지.
동굴 안이라 빛이 제대로 들지 않았음에도 남자가 빛이 나고 있음을 느꼈다.
‘진짜 황제…….’
사역마의 흔적을 봤음에도 좀체 믿어지지 않았다. 그의 정체를 의심하기보단 이 상황이 꿈만 같았다.
동굴 내부를 살피는 주황빛 동공이 플로라에게 닿을 때까지 그녀는 잠시 넋을 놓았다.
“싫은가?”
이름으로 불러 달라니. 제국민이 아니니 황제라고 부를 자격조차 없다는 건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크게 곤란한 일은 아니었다.
“아닙니다. 시몬.”
“나는 널 뭐라고 불러?”
“원하시는 대로 부르십시오.”
“이름이 없나?”
플로라는 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름 같은 건 아무렴 상관없었다.
플로라도 진짜 이름은 아닐 테니까. 메린 성에서의 흔적을, 그럴 수 있다면 모두 지우고 싶었다.
“대답하기 곤란하면 입을 다무는 고얀 습관이 있네.”
“…….”
“그럼 내 마음대로 부른다?”
플로라는 고개를 끄덕이고, 미리 뜯어두었던 약초들을 챙겨 동굴의 끄트머리로 향했다.
시몬의 시선이 끊임없이 그녀를 따르는 것이 느껴졌다.
“예쁜아.”
응? 방금 뭔가 섬뜩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요. 뭐라고 한 거지?
약초를 다지던 플로라의 손이 삐끗했다.
“별론가? 그럼 귀염둥이?”
미친. 플로라의 얼굴이 볼썽사납게 구겨졌다.
살기 때문이 아니라 오글거려서 소름이 돋치긴 처음이었다.
“둘 중에 뭐가 더 나아?”
둘 다 싫다. 아침에 먹은 고기가 올라올 지경이라고.
“플로라.”
“응?”
“예쁜…… 그딴 거 말고, 플로라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예쁜이나 귀염둥이로 불릴 바에는 이름을 알려주는 편이 정신건강에 좋을 듯했다.
여길 떠나면 다신 만나지 않을 사람이지만, 잠깐도 기이한 애칭으로 불리는 걸 참고 싶지 않았다.
미친 아이든에게서 벗어났더니, 또 다른 악질을 만난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그리고 그녀의 불길한 예감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더란다.
“플로라? 예쁜 이름이네. 역시 예쁜이 쪽이…….”
“다리. 이리 보여주세요.”
플로라는 시몬의 입을 틀어막고 싶은 충동을 내리누르며 짓이긴 약초를 챙겼다.
시몬의 앞에 그대로 주저앉자,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반짝이던 눈빛이 흔들렸다.
“땅에 그냥 앉으면 차갑잖아.”
시몬이 침대에 깔린 천을 꺼내 플로라에게 건넸다.
“이거라도 깔고 앉아.”
생각도 하지 못했던 배려는 플로라를 다시 당황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감사합니다.”
확실히 바닥이 차갑긴 했다. 엉덩이로 한기가 올라왔다. 괜찮다고 거절하기도 애매해 마지못해 천을 바닥에 깔고 앉았다.
괜히 묘한 기분이 들어 입을 꾹 다문 채 약초를 바르는 데에 집중했다.
어색한 침묵이 돌았다. 시몬은 제게 약을 발라주는 플로라를 보다가 여러 번 눈을 깜빡였다. 그가 마른 침을 삼켰다가 입을 열었다.
“플로라. 이건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네.”
“혹시, 혹시 말이야.”
무슨 말이기에 이리 뜸을 들이는 걸까. 플로라가 잠시 약초를 바르던 손을 멈추고 시몬을 봤다.
“말씀하세요. 시몬.”
“너 로브 안에 아무것도 안 입었어? 어두워서 내가 잘못 보고 있는 건가?”
플로라는 그제야 자신이 자다 깨어 로브만 간신히 걸친 채로 센칸의 기사들을 사냥했다는 걸 깨달았다.
“아. 네.”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몬에게 로브 속이 언뜻 보인 모양이었다. 어쩐지 춥더라니, 싶은 생각이 끝이었다.
이미 오랜 실험으로 부끄러움 같은 것 따위의 감정은 잃은 지 오래여서 시몬의 입장은 조금도 고려되지 않았다.
“뭐, 뭐야? 네에?”
“문제가 있나요?”
플로라는 자신의 옷을 슬쩍 바라보고 무미건조한 얼굴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녀의 반응에 당황한 시몬은 눈을 깜빡이다가 헛기침을 했다.
“문제가 되긴 하지. 나는 혈기가 왕성한 남자니까. 벌써 이러는 건 좀…….”
개소리.
새로운 황제에 대한 소문은 외모 빼고는 그다지 평이 좋지 않았다.
많은 소문 중에는 그가 정치는 뒤로한 채 주색에 빠져 있다는 것도 있었다.
잠깐 본 것으로 섣불리 판단하긴 이르지만 역시 상황 파악 못 하는 천치 쪽인 건 확실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언제 목숨을 잃어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이 상황에도 저리 음흉하게 구는 것만 봐도 그랬다.
플로라는 대답 대신 더 이상 찍소리도 하지 못하게 짓이긴 약초를 허벅지에 세게 눌러 발랐다.
“아, 아아! 아프잖아!”
“참으세요.”
“……살살해.”
주눅이 든 듯한 목소리에 마음이 약해진 플로라가 손끝에 힘을 뺐다. 시몬이 고분고분해졌다.
“약을 다 바르고 나면 신하들을 데리고 산을 내려가세요. 여긴 위험해요.”
“근데 이거 독초는 아니지? 약초에 좀 해박한 편인가?”
“독초 아닙니다.”
시몬은 자신의 충고는 귓등으로도 콧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높으신 신분만 아니었어도 머리 한 대 정도는 쥐어박았을 텐데. 순간 울컥 짜증이 치솟았다.
그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다면 자신 때문일 거란 자책이 마음을 짓눌렀다. 그런 생각이 거듭될수록 초조하고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지금까지는 비교적 평화롭지만 상황은 언제 바뀔지 모른다.
이번 습격은 무려 몇 달 만이었다. 아이든이 많은 기사들을 보낸 것으로 추측건대, 이 습격을 오래 준비했을 거라 예상됐다.
이게 끝이 아닐 것 같았다. 황제는 떠나야 했다. 어린아이처럼 장난이나 치는 그에게 현실을 가르쳐주고 어서 이 산에서 내쫓고 싶었다.
“시몬. 진짜 사냥만 하러 여기까지 온 건가요?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나요?”
“…….”
“이 산은 수도에서 먼 곳으로 알고 있어요. 사냥터라면 차고 넘칠 텐데 왜 굳이 여기까지 온 건가요?”
“여기 사냥감이 맛이 좋아.”
“장난치는 거 아니에요. 어떤 이유든 빨리 돌아가세요.”
플로라의 딱딱한 말에 시몬이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돌아가라고?”
“네. 차라리 다른 사냥터를 가세요.”
잠시 침묵한 채 플로라를 빤히 보던 시몬이 답했다.
“그래. 네 말대로 사냥터는 차고 넘치지.”
사냥을 나온 건 맞다. 엄밀히 말하자면 인간 사냥이지만.
“하지만 난 황위에 오르기 전에도, 또 오른 후에도 이 산에서 사냥을 즐겼다. 귀족들과 사냥대회를 하기도 했고, 신하들과 가볍게 놀러 오기도 했지. 오늘도 비슷한 이유로 이곳에 왔어. 내가 내 제국에서 가지 못 갈 곳은 없지 않은가?”
음흉하게 굴거나 혹은 엄살을 떨던 목소리와는 완전히 달랐다. 장난기가 빠진 시몬의 목소리엔 위압감이 실렸다.
“밀입국한 도망자에게 왜 여길 왔냐는 잔소릴 들으니 좀 황당해서 말이야. 내가 널 추궁해도 시원찮을 판에.”
“…….”
“그리고 혹여 내가 이곳에 다른 이유로 왔다고 해도, 네게 말해야 할 의무는 없다. 앞뒤 상황 다 잘라먹은 네 명령에 따라 성으로 돌아가야 할 이유도 없고.”
이 산을 황제가 사냥터로 쓰고 있다는 건 몰랐다. 그녀가 머무는 동안엔 사람이라곤 코빼기도 보이지 않아 그저 외곽이라 인적 드물다고만 생각했으니까.
구구절절 시몬의 말이 틀린 게 없었다. 타이밍 좋게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것에 혼자 골이 났을 뿐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시몬은 이 제국의 태양이 아닌가. 이미 제 어깨에 짊어진 짐은 차고 넘쳤다. 더 이상의 짐은 사양이었다.
시몬에게 화낼 일도, 투정 부릴 일도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노파심에 주절주절 나오는 말을 막을 수 없었다. 처음엔 황제를 만나 호기심을 느끼기도 했으면서. 이제 와서.
결국 선 넘은 말에 시몬의 심기가 조금 불편해진 듯했다. 아무 정보도 주지 않는 낯선 타인에게 무례한 소리를 듣고만 있자니 그 역시 답답하겠지. 이해됐다.
플로라는 즉시 꼬리를 내렸다.
“……제가 주제넘은 소릴 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잔당이 남아있을지 모릅니다. 시몬까지 위험해질까 걱정되어 마음이 조급해요. 솔직히 폐하, 아니, 시몬의 목숨이 달린 일인데 너무 안일한 것 같아서요.”
한 마디로 네 목숨이 아깝지도 않냐는 말이었다.
시몬은 차가운 눈으로 플로라를 내려보다가, 결국 눈을 돌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네 눈엔 내가 아이처럼 보이는 건가? 뭐, 좀 어려 보이고 잘생기긴 했지만…… 내 몸 하나 건사 못할 정도로 그리 나약하진 않아. 명색이 마스터인데.”
마스터?
플로라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