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3)화 (3/154)

3.

플로라는 남자를 빤히 봤다.

순진무구한 귀족가의 영식이라 생각했는데 생긴 것과 달리 대담한 면이 눈에 띄었다.

시체를 보는 눈도 그렇고, 죽이겠다는 협박에도 대수롭지 않은 반응이다.

그동안 그녀가 대륙을 돌아다니며 만났던 귀족의 영식 중 대다수는 용맹한 척하다가도 제 목숨이 달린 일에는 결국 오줌을 질질 쌌다. 

잃을 게 많은 사람은 죽는 걸 두려워하니까. 귀족들은 열에 아홉 그런 작자들뿐이었다.

이 도련님은 좀 달랐다. 영 놀려 먹는 재미가 없었다.

“……알고자 하지 않으면 살려줄 거야?”

“그래. 네가 어쭙잖게 날 구하려 했던 대가로. 대신 나를 이곳에서 본 걸 비밀로 해.”

플로라가 마지막 화살을 통에 넣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남자는 다시 웃었다. 헛소리를 정성스럽게도 한다는 비아냥이 담긴 듯했지만 화가 난다기보단 계속 눈이 닿았다.

웃는 모습이 더럽게 예쁘긴 했다.

“좋아. 아직 죽기엔 못해본 게 많아서 보류.”

어느새 무게감을 감춘 남자의 목소리는 꽤 장난스러웠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플로라는 활을 등에 멨다. 

눈에 보이는 기사들은 모두 처리했다지만 또 다른 성가신 놈들이 얼마나 더 있을지 몰랐다. 그들까지 몰려오기 전에 이곳을 떠나야 했다.

“……너, 헤매지 말고 집으로 얼른 돌아가. 죽고 싶지 않다면.”

남자에게 충고를 건네고 등을 돌린 찰나였다.

“폐하! 어디 계신 겁니까! 폐하!”

멀리서부터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에 플로라가 걸음을 멈췄다.

‘폐하……?’

“응. 나 여기 있어!”

남자도 소리를 들었는지 손을 흔들며 대답했다.

방금 분명히 폐하라고 했다지.

‘……근데 거기서 네가 왜 대답해?’

설마.

시발.

동시에 상황을 인지한 플로라의 입에서 낮게 욕설이 터져 나왔다.

“뭐 하는 거야? 입 다물어.”

만에 하나의 상황을 대비해 빠르게 남자에게 다가간 플로라가 벙긋거리는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네가 황제라고?”

끄덕.

“여긴 하네칸 제국이잖아.”

끄덕. 두 번째 이어진 대답에 잠시 눈앞이 아찔해졌다. 늘 유지하던 굳은 표정이 제멋대로 움찔거렸다.

하네칸 제국의 태양이 바뀐 것은 약 두 해 전이었다. 그건 플로라가 센칸에서 탈출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때와 맞물린다. 

센칸이 그녀에게는 하네칸에 관련된 임무를 주지 않기도 했고, 모든 신경이 탈출에 쏠려 있던 때라 그런 대륙 이슈들에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제대로 알진 못하지만 몇 개 주워들은 소문은 기억에 남아 있었다.

새 황제가 젊고 잘생겼다고 했다. 그런 황제를 두고 성적인 농담을 아무렇지 않게 하던 여기사들의 얼굴이 불현듯 떠올랐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어도 잘생겼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보석보다 더 외모가 화려해서 처음엔 잠깐 넋을 놓기도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외모만으로는 그 진위를 파악할 수 없다.

애초에 왜 귀족 가문의 영식일 거라고만 단정했을까. 안일한 머릿속을 해부하고 싶었다. 

그저 이 밝은 대낮에 놈팡이처럼 돌아다닐 사람은 직업이 없고, 한가해야 하니 영식 정도일 거라고 쉽게 생각했다. 

너무 쉽게 생각한 게 문제였다. 갑자기 피로 얼룩진 그의 허벅지가 눈에 어른거렸다.

졸지에 대역죄인이 됐다.

“하…… 이봐.”

진짜 황제인지 여전히 의심스럽긴 했으나, 반은 체념한 목소리로 남자를 불렀다. 대답 대신 남자의 시선이 플로라에게 닿았다.

“나는 많은 사람에게 모습을 드러내선 안 돼. 그렇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나를 본 이들을 죽일 거야. 신하들을 살리고 싶다면 조용히 해. 알았어?”

협박이 좀 섞이긴 했어도 마음만은 절박했다. 다행히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을 듣고 나서야 플로라는 입을 막았던 손을 거뒀다.

“너.”

“…….”

“용병이 아니라 도망자인가?”

그리고 남자의 질문이 이어졌다.

“…….”

대답을 망설이는 입술이 움찔거렸다. 그사이에도 남자는 플로라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당황한 건 플로라였다. 한번 무너진 감정은 메워지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표정도 숨기지 못하고 있을 게 뻔했다. 심장을 옥죄는 두근거림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누군가와 이리 오랫동안 시선을 주고받은 게 얼마 만인가. 그녀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늙은 여관 주인이 마지막이었다.

감정 조절 훈련을 혹독히 받아 왔던 기사들조차 플로라의 눈을 보기 꺼려 했다. 

외모는 누구보다 아름다워 시선이 절로 닿았지만, 막상 눈이 마주치면 저주에 걸린 것처럼 온몸이 오싹거린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동공이 새카만 것이 죽음을 품은 눈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누군가에겐 별거 아닌 일일지 몰라도 플로라에겐 새로웠다. 

어떤 보석보다도 영롱하게 반짝이는 것 같은 주홍색 눈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계속 그의 수에 말려드는 것 같기도 했다.

‘설마 이거 함정은 아니겠지. 마법 같은…….’

하네칸에는 마법이 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진실을 자백하게 한다든지, 이대로 잠에 들게 한다든지 하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났다. 플로라는 괜한 술수에 말려들지 않도록 겨우 남자의 시선을 피했다.

“……맞아.”

“하네칸의 제국민이 아니야?”

플로라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마법이나 술수에 휘말려 기밀정보까지 넘기게 되느니, 호기심을 충족할 정도로만 간추려 대답해주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오호. 재미있네.”

“…….”

“일단 신하들이 오기 전에 몸을 좀 숨기는 게 어떨까? 대화를 더 하고 싶어. 그리고 나도 체면이 있지…… 이런 꼴은 좀.”

자신의 다리를 가리키며 눈꼬리를 축 늘어뜨린 것이 다친 강아지 같았다. 

물론 닥치는 대로 사냥해 끼니를 때우던 입장에서 동정심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지만…….

‘……대화를 더 나누고 싶다니.’

플로라는 남자의 제안에 입술 안쪽을 짓씹으며 망설였다. 

그가 진짜 황제라면 목숨뿐 아니라 제국의 안위마저 달린 상황인데, 이 위험성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 

‘그냥 상황 파악을 못 하는 천치인가. 황제가 약간 모자란다고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낯선 이방인인 자신을 위협적이지 않다고 판단했거나, 다수에게 습격받고 있던 이 상황이 완전히 종결되었다고 믿고 있는 듯한데 너무 안일한 태도였다.

아니면 역시 진짜 황제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일단…… 여긴 너무 위험해.’

이 넓은 숲에 아직 몇 명의 적이 더 숨어 있을지 몰랐다. 

남자를 협박하고 다리까지 다치게 한 주제에 이런 말 하긴 웃기지만, 플로라는 사실 여기서 무고한 생명이 희생되길 원치 않았다. 

그가 진짜 황제든, 아니든 목숨만큼은 살리고 싶었다.

센칸의 기사들에게 자비는 없었다. 임무를 수행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들은 모두 밟아 죽여야 속이 시원할 작자들이었다. 

그게 문제였다. 저 때문에 죄 없는 사람들이 죽어야 한다는 것이 싫었다.

더구나 그 장애물 중에 하나가 하네칸의 황제라는 걸 안다면, 아마 더욱 죽이고 싶어 눈이 발개지겠지. 

오랜 시간 하네칸을 적국으로 여기게끔 세뇌 훈련을 받아온 이들이다. 황제가 보호받지 못하는 상황은 적에겐 기회였다.

“……그 전에 먼저 네가 황제라는 증거를 보여.”

“응? 증거?”

만약을 위해 조금 더 믿음이 필요했다. 진짜 위험한 상황이 오면 자신의 목숨보다 더 우선시해야 할 의미가 있는 사람인지.

“그래. 내가 그냥 믿을 줄 알았어? 나는 하네칸 제국의 황제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거든.”

“의심이 많은 아가씨네. 근데 날 증명할만한 건 사냥 나올 때 보통 성에 다 두고 오지 않나?”

“…….”

“아니면 신하 한 명만 부를까? 나 지금은 이런 보석밖에 없는데.”

남자가 돌연 자신의 배를 쓱 들이밀며 무언가를 가리켰다. 플로라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휘황찬란하지? 어때? 황제밖에 가질 수 없을 것 같지?”

남자가 내보인 것은 견고하게 만들어진 허리띠와 화려한 검집, 그리고 의복에 달린 보석들이었다. 

하. 플로라가 혀를 찼다.

그녀는 땅에 떨어진 단도를 집었다. 남자가 숨을 삼켰다.

“죽이려고? 아아, 그건 좀 곤란…….”

“하네칸 제국의 황제들에게는 대대로 전해지는 어둠의 사역마가 있다지. 그들의 흔적은…….”

찌익.

“여기 새겨져 있고.”

하네칸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길, 신의 축복을 받은 제국의 황제가 위험에 처해 있을 때 검은 늑대의 형상을 한 사역마가 나타나 그를 구한다고 했다.

‘진짜 있어…… 젠장.’

다행인지 불행인지 남자의 어깨, 그러니까 쇄골에는 검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플로라는 살기 어린 눈빛을 꺾고, 즉각 남자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하네칸의 태양을 뵙습니다. 폐하께 무한한 영광과 축복이 깃드시길.”

확신을 얻자마자 심장이 소란스럽게 뛰었다. 

지금까지 ‘적’이라고만 생각해 왔던 사람을 마주했는데 살의 같은 건 단 한 자락도 생기지 않았다. 

진짜 센칸의 세뇌에서 벗어났다는 증거 같아 소름 끼쳤다.

아, 소름 끼치게 기분이 좋다는 말이다.

“……제국민도 아니라면서 하네칸에 대해 굉장히 잘 알고 있네.”

“역사서 정도는 읽었습니다.”

“그럼 이걸로 내가 황제인 건 증명이 됐고. 너는? 넌 여전히 신원을 밝힐 생각이 없는 건가.”

황제는 웃고 있었으나 목소리에 서린 날카로움까진 숨기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알고자 하면 죽일 거고?”

그가 황제라는 걸 알기 전 했던 협박을 농담처럼 되돌려주는 목소리에 식은땀이 죽 났다.

플로라가 지금까지 황제에게 보였던 말과 행동들 모두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감히 목숨을 가지고 협박을 하다니. 또 그의 몸에 상처까지 내었다. 당장 사지를 찢어 죽인대도 할 말이 없어야 했다.

플로라는 바닥에 납작 몸을 엎드렸다.

“……지금까지의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폐하.”

하네칸의 황제에게 충성해야 할 이유까지는 없었지만, 목숨만큼은 부지해야 했기에 납작 엎드렸다.

그녀에겐 아직 죽지 못할 이유가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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