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일 년 후.
눈을 감고 있으면 모든 게 느껴진다. 짐승이 돌아다니는 소리, 자잘한 모래알이 바람결에 굴러가는 소리, 냇물이 흐르는 소리, 그리고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까지. 그 소리는 한데 어우러져 완벽한 화음을 이루었다. 고요하고 평화롭다.
웃긴 일이지 않나. 자신을 맹렬히 뜯어먹을 것처럼 각박하게 구는 세상도 가끔 이렇게 위로와 평안을 줄 때가 있다니.
얼마나 한참을 서 있었을까. 꽉 다물려 있던 플로라의 눈꺼풀이 서서히 말려 올라갔다. 무감정한 시선은 주변을 훑어 내렸다. 그리곤 곧 재빠른 손짓으로 활시위를 잡아당겼다가 놓았다.
푸드득, 하늘을 날고 있던 새의 날개가 힘없이 꺾여 바닥으로 추락했다. 고요한 눈동자는 사냥감이 떨어진 곳을 향했다. 사냥에 성공했다는 쾌락이나 기쁨 같은 건 없었다. 늘 그랬듯이.
그 이후로 플로라는 두 마리의 새를 더 잡았다. 그리고 나서야 사냥을 끝낼 수 있었다.
피를 철철 흘리는 짐승들을 조금의 동요도 없이 끌고 온 뒤, 근처에 쌓아둔 장작더미에 불을 붙여 먹음직스럽게 구워냈다.
재빨리 불을 끄고, 산에서 딴 식용 풀과 함께 고깃덩어리를 의무적으로 씹어 넘겼다. 질기고 비리긴 했지만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몇 덩어리는 저녁을 위해 남겨두고, 플로라는 어두운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이 동굴은 그녀의 집이었다. 오랜 떠돌이 생활을 통해 나름의 노하우가 생겼다. 그래서 웬만한 집의 구색은 갖출 수 있었다.
밤중에 마을에서 주워왔던 버려진 천 조각들을 쌓아 침대처럼 만들었고,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그릇들을 모아 두었다. 금가거나 깨진 부분이 군데군데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플로라는 옷을 벗었다. 속옷은 따로 입지 않아 검은색 로브와 흰색 셔츠, 그리고 다리에 착 감기는 시원한 재질의 남색 바지를 벗자 바로 나신이 드러났다.
동굴 안은 빛이 제대로 들지 않는 습한 곳이었다. 옷을 다 벗고 나면 추울 법한데 플로라는 떨지 않았다. 익숙하게 침대로 향했다.
지금 조금이라도 잠을 자두어야, 저녁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주변을 지킬 수 있었다.
습격이란 건 주로 밤에 이루어지는 법이니까.
* * *
‘플로라, 꼭 살아. 넌 꼭 살아남아서 우리 아이를 지켜줘.’
르네. 르네…….
늘 그렇듯 비슷한 꿈을 꾸는 플로라의 표정은 편치 못했다.
이젠 지키지 못할 약속이었다.
파삭.
이질적인 소리가 들리지 않았더라면, 한참 꿈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눈을 뜬 플로라는 경계 어린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분명 뭔가가 나뭇가지를 밟은 듯한 소리가 났었다.
‘짐승인가?’
아니야. 사람일지도.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찝찝해서 견딜 수 없다. 플로라는 로브만 간신히 몸에 걸치고 분신 같은 활을 챙겨 들었다.
척척한 동굴 밖은 아직도 환했다. 하지만 그게 안심할 이유는 아니었다.
아이든 그 미친놈은 낮이고 밤이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언제든 공격해올 수 있는 놈이었다.
인기척을 없애기 위해 최대한 숨을 죽였다. 지척에서 낯선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을 때면 저도 모르게 행동이 날렵해졌다.
결국 실수로 나뭇가지를 밟았을 때였다.
“……읏.”
기다렸다는 듯 화살이 날아와 플로라의 오른쪽 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비릿한 피 내음과 함께 알싸한 통증이 뒤따랐다.
휙. 이어 쉴 틈 없이 단도가 날아왔다. 이대로 손 놓고 있다간 꼼짝없이 죽을 거다.
그녀는 눈에 보이는 것 중 가장 커다란 나무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거머리 같은 놈.’
공격받은 이상, 저들은 아이든이 보낸 기사임이 확실해졌다. 이제 이곳도 떠날 때가 된 모양이었다.
플로라의 검은 동공이 짙게 가라앉았다. 단호한 눈빛에는 결의가 깃들어 있었다.
‘이번에도 보고할 틈 없게 끝장을 내줄게. 아이든. 날 잡으려면 좀 더 고생해야 할 거야.’
플로라는 순순히 붙잡혀줄 생각이 없었다. 활시위를 팽팽하게 잡아당긴 채 대기하고 있다가 주변을 살폈다.
숨을 죽이고 집중하자, 미세한 소리까지 들렸다. 이상한 점은 파삭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듯하다가 외마디 비명과 함께 사라졌다는 거다.
‘뭐지?’
플로라가 공격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저들끼리 서로 싸웠을 리도 없었다.
플로라는 살짝 고개를 비틀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확인했다.
휙. 그 타이밍에 맞게 바로 코앞에 화살이 스쳐 지나갔다. 아마 1cm만 얼굴을 더 내밀었어도 코가 박살 났을 거였다.
‘젠장.’
플로라는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기로 생각을 고쳐먹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든, 저들의 목적은 자신이었다. 호기심과 목숨을 맞바꾸고 싶진 않았다.
그녀는 숨을 한 번 크게 내쉬고, 집중해 한 시 방향에 숨어 있는 적을 향해 활을 쏘았다. 인간이나 짐승이나 다를 것 없이 늘 그렇듯 명중이었다.
수풀 더미로 적이 쓰러지는 소리가 요란히 들렸다. 플로라는 재빠르고 익숙한 손길로 화살을 재장전했다.
열한 시 방향 셋, 한 시 방향 둘 남았다.
긴장을 풀기 위해 간단히 목을 돌렸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숨어 있던 나무 기둥에서 빠르게 달려 나간 플로라는 바닥을 구르며 미리 봐두었던 적들을 향해 화살을 쐈다. 동시에 두 발이었고, 역시 명중이었다.
이제 남은 인원 셋.
“이번엔 많이도 보냈어. 내가 여기 있다는 걸 확신한 모양이지?”
플로라는 제게 남은 화살을 확인했다. 다행히 저들을 죽이기엔 충분했다. 그렇게 다시 활시위를 당기려던 찰나였다.
“혹시 전쟁놀이라도 하는 중인가?”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작긴 했으나 어떤 말을 했는지는 또렷하게 알 수 있었다.
그 말인즉, 센칸의 기사들 근처에 이방인이 나타났단 소리다.
센칸의 기사가 아닌 것도 확실했다. 플로라처럼 그녀를 언제든 공격하기 위해 숨어 있던 기사들이 공격의 방향을 바꾼 걸 보면.
‘누구지?’
화살이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는 소리가 몇 번 들렸지만, 역시 호기심은 뒷전이었다.
지금은 적들을 처리할 최적의 기회였다. 플로라의 눈이 빛났다.
“훈련을 덜 받은 모양이네.”
플로라의 붉은 입술이 움직였다.
“적에게 등을 보이는 순간…….”
그대에게는 죽음뿐이리라.
어릴 적 그녀의 훈련을 도맡던 센칸의 기사 단장에게 늘 들어왔던 말이다.
방심하다 대차게 날갯죽지와 허리, 허벅지가 부러지고 살이 터질 정도로 맞았던 기억은 여전히 생생했다.
플로라는 활시위를 팽팽히 당겼다 놓으며 적들을 쓰러트렸다.
기사들이 방황하는 사이, 둘을 처리했다. 갑자기 나타난 낯선 이방인에게 당한 건지 한 명은 흔적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 끝인가.’
일단 그녀의 시야에 거치적거렸던 적들은 모두 사라졌다. 이방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죽어 버렸나.”
그녀 대신 표적이 된 것이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었다. 위험해 보이면 도망을 쳐야지, 거기서 말을 건 것부터 딱 제 명줄 제 손으로 단축한 일이었다.
‘그래도…….’
시체라도 보이면 무덤을 만들어 줄 텐데.
자신 때문에 개죽음당한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곧 플로라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 이렇게 어기적거릴 때가 아니었다. 얼른 화살을 회수하고 이곳을 떠나야 했다.
“하나가…….”
화살의 숫자를 세던 플로라의 등 뒤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혹시 이거 찾아?”
플로라는 재빨리 등 뒤에 있는 상대에게 단도를 던졌다. 누군가 가까이 올 때까지 아무 기척도 느끼지 못한 것에 솔직히 좀 놀랐다. 이런 섬뜩함은 오랜만이었다.
“……윽.”
단도는 남자의 허벅지에 정확하게 명중했다. 그는 다른 한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바닥에 꽂은 채 다친 다리를 꿇고 신음했다.
“와, 터프한데.”
“그 화살 이리 내.”
플로라는 남자를 보았다.
그는 젊어 보였고, 잘생겼다. 또한 다행히 센칸의 기사는 아니었다.
그건 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플로라를 잡으려 혈안이 된 눈빛은 수없이 많이 봤다. 이 남자에겐 적의도 살기도 없었다.
플로라가 단 십 초 정도 그와 시선을 마주하고 결론 내렸다. 그러니 죽일 이유도 없었다.
“너. 내가 누군지 안 묻네? 그럼 내가 먼저 물어도 돼?”
허벅지를 꿰뚫려 놓고 저렇게 해맑을 수가 있나. 살기와 적의가 없어도 수상한 놈인 건 맞았다.
“안 돼.”
“왜?”
“네가 누군지 알고 싶지도 않고, 내가 누군지 알 필요도 없으니까.”
얼굴만 놓고 보면 세상 물정 하나도 모를 것 같은 귀족 가의 영식 같았다.
뽀얗고 반질반질한 피부하며 의복에 박힌 화려한 보석들과 척 보기에도 값비싸 보이는 무기까지. 의심에 확신이 더해졌다.
플로라는 언뜻 아까 기사들과 대치할 때 나타난 의문의 이방인을 떠올렸다.
……이놈이었나.
죽은 줄 알았는데 용케 목숨이 붙어 있는 게 다행이었다.
“여기서 뭘 하고 있었어?”
“내가 묻고 싶은 말을 왜 네가 해?”
왜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지 못한 걸까. 귀족가의 영식이니 어릴 때부터 검술 훈련을 받아 왔다고 하면 그럴싸했다.
물론 검에 조금도 재능은 없어 보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겉으로 판단한 바였으니까.
흠. 그래도 찝찝했다. 플로라는 의심 어린 눈빛으로 남자를 천천히 꿰뚫어 보았다. 의심에 의심이 거듭됐다.
“난 사냥하러 왔어. 그러다 네가 괴한들에게 쫓기는 걸 봤고. 위험에 처한 여자인 줄 알았는데 완전히 잘못 짚었네.”
플로라가 이곳에 머물렀던 수 개월간 여기까지 사냥을 온 사람은 한 명도 없었지만, 확실히 야생동물이 많이 살고 있으니 못 들어줄 변명은 아니었다. 그 말의 진위보다는 다른 게 마음에 걸렸다.
“……나를 구하려 했어?”
“응.”
남자는 플로라의 앞으로 화살을 툭 던지고는 제 허벅지에 박힌 단도를 빼냈다. 그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새어 나왔다.
“더럽게 아프네. 어? 은혜를 원수로 갚다니.”
남자가 눈을 부라렸지만 플로라는 미안해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 조금 미안했지만 티 내지 않았다.
“쓸데없는 짓이었어. 하나뿐인 목숨이 아깝다면 앞으로 그런 오지랖은 거둬.”
미숙한 감정이 봄바람처럼 속을 긁었다.
“고맙다는 말로 들을게.”
플로라의 까칠한 말에도 남자는 눈 하나 깜짝 안 했다.
“근데 진짜 전쟁놀이를 한 건 아닐 테고. 저것들은 다 뭐야?”
남자는 목이나 심장, 이마에 화살을 맞고 죽어있는 시체들 쪽으로 턱짓했다. 죽은 자들을 많이 봐온 듯 평온한 얼굴이었다.
“궁금한 게 많은 모양인데, 대답할 생각 없어.”
“그럼 네 신원이라도 밝혀. 그때까진 너 안 보낼 거야.”
“무슨 수로? 다리도 다친 주제에 패기가 넘치네.”
플로라는 그의 처지를 비웃듯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이번엔 단도가 네 가슴을 꿰뚫을 수도 있어. 내 신원을 아는 사람은 모두 죽어야 하거든. 그래도 알고 싶어?”
협박이 담긴 도발에도 남자는 주눅 들지 않았다.
오히려 플로라의 비릿한 미소에 마주 웃어줄 정도로 대담한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