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발, 말도 안 돼……!’
다급한 발소리가 좁고 어두운 복도를 가득 메웠다.
비키지 않으면 죽일 기세로 달려드니, 복도를 지나던 이들은 어쩔 수 없이 벽에 몸을 붙이며 길을 내주었다.
“이봐, 하비 경. 어딜 그렇게…….”
“……비켜!”
그러다 그를 용케 알아본 이가 알은체를 해왔지만 뛰는 이에게선 날 선 외침만이 돌아왔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서로를 쳐다봐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하비는 계속 달렸다. 오직 한 곳을 향해서. 자신의 속력을 이기지 못해 넘어질 뻔해도,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상황에서도 멈출 수 없었다.
“아이든 님!”
목적지에 도착한 하비는 주인의 허락 없이 낡은 나무문을 열어젖혔다. 무례하다고 질책받는 것까지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방의 주인은 성인 남성 한 명이 누울 수 있을 만큼 긴 의자에 걸터앉아 있었다.
검붉은 피와 보랏빛 독액으로 얼룩진 흰 가운은 실험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었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곳에 오기 전, 오늘도 그의 실험이 실패로 끝났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그러니 한창 예민할 시간이었다.
미친개는 건드리지 않는 것이 상책이건만, 하비에겐 꼭 그를 방해해야 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아, 하비 경.”
엉망으로 흐트러진 금발 머리를 한 손으로 대충 밀어 올린 남자가 하비를 보고 웃었다.
안경 너머로 하비를 바라보는 눈빛은 날 것의 광기 그 자체였다. 다정하게 웃고 있는 듯했지만, 그건 가면일 뿐이었다.
자신의 휴식을 방해한 타당한 이유가 없다면 산 채로 살점을 발라 버리겠다는 뜻이 그의 시선에 어려 있었다.
하비가 아랫입술을 덜덜 떨며 간신히 눈을 피했다.
“지금은 기사들의 식사 시간이 아닌가요? 무슨 일이죠?”
잠시 자신이 왜 아이든의 앞에 서 있는지 잊었던 하비는 질문을 받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프, 플로라 경이…….”
그럼에도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소식을 들은 그가 얼마나 분노할지 알았기에. 어떤 미친 짓을 벌일지 몰랐기에.
“플로라가 뭐?”
다정한 척 굴던 목소리가 변한 것은 순식간이었다.
말려 올라가 있던 그의 입꼬리는 어느새 창백한 피부에 엉겨 붙은 피만큼이나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탈출,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뭐라고?”
하비는 눈을 감았다. 자신의 소임을 다했으니 그대로 숨이 끊길 것 같았다. 아니,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눈을 질끈 감은 채 벌벌 떨고 있던 하비는 이어진 질문에 슬쩍 아이든을 보았다.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린 아이든의 안면 근육이 제멋대로 떨리고 있었다. 침착한 척하려 한 듯했지만 이번에는 완벽한 실패였다.
“어떻게 됐냐고 묻잖아!”
하비가 잠깐 뜸 들이는 것조차 참을 수 없다는 듯 아이든의 고함 소리가 이어졌다.
화가 났다는 것을 여지없이 드러낸 그의 분홍색 동공은 완전히 돌아버린 것처럼 초점을 잃은 채였다.
“그게 무기를 들고 있어서…… 다들!”
시발! 욕설과 함께 하비의 어깨가 강하게 밀쳐졌다. 뒤에 있던 진열장과 부딪쳐 요란한 소리가 났다.
그 사이 아이든은 하비의 눈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가 짐승만큼 빠르게 달리는 모습은 아무리 보아도 적응이 되질 않았다.
정말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자리를 공허하게 바라보던 하비는 결국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플로라가 탈출을 시도했고, 아마 그녀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성공할 것이다. 변수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아이든 님뿐이었다.
과연 아이든 님은 막을 수 있을까.
만약에 그러지 못한다면…….
하비는 최악의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려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재앙이야. 재앙이 시작될 거야.’
* * *
성의 지층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걸 알리듯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몇 기사들은 치유사에게 다친 곳을 치료받고 있었고, 몇은 목에 화살이 박힌 채 미동도 없이 누워 있었다.
“……아이든 님! 플로라 경이!”
그 참혹한 광경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는 아이든에게 한 기사가 다가왔다.
“플로라는 어디 있지?”
“기사들과 대치하다 성을 빠져나갔습니다. 아마 절벽으로……!”
아이든은 기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핏자국들을 따라 달렸다.
몇몇 이들이 말을 타고 따라붙어 그녀가 도망친 곳으로 길을 안내했다.
길 곳곳에는 도망자를 뒤쫓던 기사들이 다친 채 쓰러져 있거나 죽어 있었다. 그들을 지나치다 보니 어느새 절벽이었다.
그리고 그 끝에, 아이든이 찾아 헤매던 여자가 위태롭게 서 있었다.
“플로라!”
“왔구나. 아이든. 역시 빠르다니까.”
아이든은 그녀를 향해 화살을 겨누고 있는 기사들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땀에 젖어 엉망이 된 은빛 머리칼과 흰 피부에는 그동안의 전투를 알리듯 피가 얼룩져 있었다.
그녀는 상당히 지쳐 보였다. 활시위를 겨누는 팔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선연히 보일 정도였다.
“왜 이러는 거야? 플로라. 거긴 위험하잖아. 이리 와.”
그녀가 한 걸음 더 물러선다면 절벽 아래로 추락할 것이다.
그럼 아무리 센칸 최고의 기사라고 칭송받는 플로라라도 죽을지 몰랐다. 절벽에서 떨어져 살아남는 법은 훈련에 없었다. 그건 그저 운일 뿐이니까.
아이든은 어린아이를 달래듯 말하며 손을 뻗었다. 플로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설마 떨어질 생각이야? 거기서 떨어지면 죽어. 플로라.”
“네게 돌아가느니 죽는 게 나아.”
“시발. 대체 왜 이러는 건데?”
다정한 척, 걱정하는 척하던 아이든의 인내심이 벗겨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네가 죽였잖아. 르네를.”
르네. 아이든은 그 이름을 잠시 생각해야 했다. 그의 표정을 본 플로라가 기가 찬 듯 실소를 흘렸다.
“설마 기억 못 하는 거야? 하기야. 네 손으로 죽인 사람이 어디 한 둘이어야지.”
플로라가 이렇게 역정을 낼 정도의 인물. 그 계집의 이름이 르네인지는 모르겠으나 얼굴만큼은 선연하게 떠올랐다. 어느 기사 놈의 애를 낳곤, 실성해 도망치려는 걸 잡아 죽였었지.
근데, 그게 뭐? 고작 그년 때문이라고?
순간 아이든의 눈빛에 살기가 어렸다.
“벌써 몇 년 전 일을 이제 와 꺼내고 지랄이야? 그건 감히 내게서 도망치려던 년이야. 죽어 마땅한 짓을 했으니, 죽어야지.”
르네가 도망치다 걸려 죽었을 당시에도 플로라는 한동안 넋을 놓은 사람처럼 살았다.
그 계집과 플로라가 가까운 동료라는 걸 알고 있던 아이든은 그녀를 걱정해 예의주시했다. 그러나 시간이 약이라는 말처럼, 플로라는 점차 나아졌다.
……근데 이제 와 이런 깜찍한 짓을 벌인다고? 눈이 안 뒤집힐 수가 없었다.
“설마 너도 그 꼴이 되고 싶은 거야? 네가 가진 그 부와 명예들을 다 버리고?”
뒤엉킨 분노가 말과 함께 속사포처럼 섞여 나왔다.
분홍빛을 띠는 아이든의 동공이 정처 없이 흔들리는 것을 본 플로라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얻은 부와 명예가 무슨 소용이야? 행복하지 않은데.”
“그래서 어쩌자고? 내가 사과라도 하길 바라는 거야?”
“사과? 그래. 할 수 있으면 어디 한 번 해봐. 무릎 꿇고 개처럼 빌어.”
미친 계집애. 선을 넘는 것도 정도껏이지……!
아이든은 잇새 사이로 욕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야 했다. 그녀는 척 보기에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온전치 못한 상태니, 진짜 절벽 아래로 떨어질 무모함 또한 있을 터였다.
이대로 플로라를 놓칠 순 없었다. 그녀는 센칸의 자산이니까. 아이든이 다시 한번 표정을 풀고 애원했다.
“네가 순순히 이리 온다면, 할게. 무릎 꿇고 개처럼 빌게. 네가 원하는 게 그거라면. 그러니까 플로라…….”
“넌 르네의 아이도 죽였어. 말도 하지 못하는 그 작은 애를…….”
애? 아이든은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불현듯 얼굴까지 새카맣게 독이 올라 숨이 끊긴 루엘을 떠올렸다. 최근에 죽은 아이는 그 애 한 명이었다.
평소처럼 마력을 주입하기 위해 벌인 실험이었다. 연구원에게 루엘 중에서 가장 어린아이를 데려오라 했다. 어리기 때문에 더 효율이 좋을 줄 알았다.
밀수입한 최상급 마법석과 연금술이 제대로 어우러져 성공한 것 같았지만, 결국 그 애는 자신에게 주어진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죽어 버렸다.
“몰랐어.”
“……그랬겠지.”
메린 성의 주인, 그리고 왕의 신임까지 얻는 플로라니 연구원들은 거리낌 없이 루엘에 관한 정보를 넘겼을 것이다. 그렇게 계속 그 계집의 애새끼를 주시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다 사과할게. 플로라. 응? 그러니까 그만 화내고 이리…….”
아이든은 겉으로는 애원하는 척하며 등 뒤로는 서 있는 기사들에게 손짓했다.
신호를 하면 공격할 것. 척하면 척, 알아듣는 기사들은 아이든의 손끝에 집중하며 활을 쏠 타이밍을 봤다.
“아이든.”
“그래, 플로라.”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그땐 내가 널 죽일 거야. 반드시.”
그렇게 아이든이 주먹을 쥔 찰나였다. 화살이 다다다, 공중을 향해 날았으나 표적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다급하게 절벽으로 뛰어간 아이든이 아래를 내려보았다.
절벽으로 부딪쳐오는 파도는 거셌고, 그가 찾는 이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플로라!”
없다. 플로라가 눈에서 사라졌다. 일말의 희망이라도 잡으려는 눈동자가 바쁘게 바다를 훑었지만 소용없었다.
* * *
모두가 잠들었을 야심한 시각의 하네칸 제국. 낮보다 밤이 더 바쁜 황제의 침실은 여전히 환했다.
<폐하, 지난달 찾은 의문의 시체의 신원은 결국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낮은 테이블에 앉아 구부정한 자세로 서류를 살피던 황제, 시몬은 머릿속으로 들려오는 근위대장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또 이상한 징후가 있었나?”
<네. 동쪽 해안 인근의 에브르 지역입니다. 오늘 결계에서 수상한 신호가 감지되었다는 지역 마법부의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기사 몇을 보내 확인했지만 별다른 흔적은 없었습니다. 마법부의 보고도 마찬가지였고요.>
시몬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마법 결계를 불법으로 넘나들 수 있다니…… 제국에 밀입국하려는 자들은 보통 결계가 없는 지역을 노리던데, 당당해도 너무 당당하군. 날 도발하는 건가?”
<새로운 마수의 출현일지 몰라 그쪽으로도 의심해보고 있습니다. 그들의 진화는 워낙 빠르니까요.>
“아니. 마수들이었다면 진작 제국에서 문제를 일으키고도 남았을 거야. 발견된 시체와도 아무런 접점이 없어 보이고.”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내가 즉위한 이후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다들 날 재앙처럼 여기더군.”
<…….>
“이 일의 배후에 쥐새끼 한 마리가 숨어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드네?”
대제국 하네칸의 영지는 귀족과 마법부, 그리고 아르제카 신전에 의해 관리된다.
보통은 전염병이나 자연재해를 막고 지역발전을 위해 마력을 쓰는 게 대부분이지만, 마수가 자주 출몰하는 지역이나 침략 가능성이 있는 국경 외곽은 특히 결계까지 설치해 불법 침입자들을 관리했다.
의문의 신호가 처음 시작된 것은 몇 달 전이었다.
마법부에서 경각심을 가지고 그 지역을 몇 달이나 수색했으나, 바로 지난달,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시체만이 결계 주변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오늘은 다른 지역에서 그와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다.
결계는 출입을 허가받지 못한 이에게 닿으면 온몸에 독이 퍼지거나 마비된다. 기한 내로 마법을 풀지 못하면 결국 죽는다.
그런데 이번 역시 시체도,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꽤 강한 마법이라, 결계에서 몇 발자국 걸을 수도 없었을 터인데…… 이것 참, 수상한 일이고 흥미가 돋았다.
<이번에도 계속 수색은 하겠지만…… 죽은 후에나 발견될지 모르겠습니다.>
“뭔가 나오면 다시 보고해. 그리고 또 다른 지역에서 이상 신호가 나타나면 바로 말하도록. 이번엔 내가 직접 가겠어. 배후가 있다면, 그가 누군지 밝힐 수 있다면…… 황권을 바로잡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몰라.”
<……알겠습니다.>
“이만 가서 쉬어.”
근위대장인 에르네는 시몬의 명에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시몬은 안경을 고쳐 쓰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더 할 말 있나?”
<시간이 늦었습니다. 폐하. 이만 잠자리에 드시지요.>
“이것만 마저 처리하고 자도록 하지.”
에르네는 그럼 자기도 그때까지 자리를 지키겠다는 듯, 석상처럼 딱딱하게 굳어 선 채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하여간 저 고집.
시몬은 하는 수 없다는 듯 혀를 쯧 차곤 다시 서류에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