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과거 & 계략
포르틸라는 아무것도 모른다. 셀로신이 그녀를 얼마나 오랜 기간 원했고 지켜봤는지를.
“하아…. 먹기 싫어.”
“조금만 더 드셔야 합니다.”
“싫어, 치워.”
식사 시중을 들던 이들이 한숨을 쉬며 음식을 빠르게 물렸다. 작고 작은 아이는 흐린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삶에 의미가 없던 소년. 늘 기운이 없었고 숨은 잘 쉬어지질 않았다. 소년은 태어날 때부터 탯줄을 목에 감고 나와 그는 굉장히 몸이 허약했다.
십 대 초반까지 몸이 작고 허약해 보통 소년들보다 3살은 더 어려 보였다. 특히 잔병치레가 많다 보니 왕궁에서조차 그를 당장이라도 깨질 것 같은 금 간 유리처럼 대했다.
덕분에 심신이 꽤나 나약했고 어리광쟁이로 자랐던 셀로신은 스스로를 ‘성년이 되기도 전에 죽을 불쌍한 아이’로 생각했다. 모든 것이 무력했고, 관심도 없었다.
식사도 제때 하지 않았으며 왕궁 의사가 지어주는 약도 먹질 않곤 슬쩍 바닥에 버리기를 반복했었다. 늘 기력이 없었기에 힐러가 활력을 불어넣어 줘야 겨우 움직이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나라 안 정국이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시기가 있었다. 왕의 정책에 반기를 드는 귀족 몇몇이 들고 일어났고, 그때 국왕의 정적이었던 급진 귀족파에서 어렸던 셀로신을 납치한 적이 있었다.
셀로신은 요양을 하러 내려갔던 작은 성에서 괴한들에게 끌려갔었다. 그 기억은 꽤 괴로운 기억이었다.
13살이었으나 10살 어린아이만큼 몸이 작고 허약했던 셀로신은 커다란 납치범들의 손아귀에 손쉽게 끌려갔다. 얼굴 위로 씌워졌던 검은 천. 꽁꽁 묶인 팔다리. 긴장으로 튀어나오는 계속된 기침. 두려움에 휩쓸린 나약한 정신력 덕분에 쏟아지는 눈물. 정말 하찮기 그지없던 시절이었다.
“으어어엉, …콜록콜록, 흑흑흑. 콜록, 콜록! …으아아! 아버님… 쿨럭쿨럭.”
무척이나 좁은 방 안에 갇혔던 셀로신은 괴로움에 몸부림쳤었다. 납치범들은 소년이 협상을 위해 잡아 왔던 아이였기에 당장은 크게 위협을 하진 않았지만, 여차하면 죽여버릴 생각도 하고 있는 듯했다.
예민했던 소년의 귀에 문밖에서 소곤거리는 소리는 바로 옆에서 떠드는 것처럼 들렸다.
“아, 시끄러워 죽겠네. 저거 언제까지 붙들고 있어야 해?”
“조금만 기다려. 국왕이 곧 한발 뒤로 물러날 거야.”
“젠장, 빨리 좀 하라고. 애새끼 우는 소리 듣고 싶지 않다고. 그냥 콱 죽여버릴까?”
병으로 죽는 건 늘 상상해왔기에 두렵지 않았지만, 타인의 손에 의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나약했던 셀로신을 공황상태로 몰아넣기 충분했다. 어린 소년은 입술을 깨물며 끅끅거리는 울음소리를 막으려 애를 썼다.
하지만 끌려온 건 저 혼자가 아니었다. 두려움에 떨며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헐떡거리는 와중 웬 작은 손바닥이 소년의 몸을 톡하고 건드렸다. 어둠 속에 갇혀있던 소년은 흠칫 놀랐지만, 곧 조용히 속삭이는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무척이나 작고 여린 목소리였다.
“울지 마.”
“흐아… 아…?”
소년이 놀라 발버둥을 치자 뭔가 깨달은 듯 ‘아, 안 보이는구나.’라며 작은 목소리가 들린다. 그러곤 곧 얼굴을 덮고 있던 검은 천이 벗겨졌다. 눈앞에는 놀라울 만큼 작은 아이가 제 손을 잡고 있었다. 핑크색의 머리칼을 양쪽으로 곱게 딴 아이였다.
5살은 됐을까. 작은 아이는 얼마나 발버둥을 쳤었는지 드레스가 온통 흙투성이였고 곱게 땋은 머리칼도 엉망진창이었다. 하지만 소녀는 저처럼 눈물을 흘리지도 두려움에 차 있지도 않았다.
“훌쩍, 뭐, 뭐야? 너는….”
“나? 미래의 대마법사!”
꼬맹이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지껄였다. 마법사가 뭔 줄은 알고 저런 소리를 하는 것인지.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짧은 팔다리를 잘도 휘두르며 좁아터진 방 안을 돌아다녔다. 작은 침대 위를 맨발로 밟고 올라가더니 창문 밖을 내다보다 쪼르르 뛰어 내려와 셀로신의 곁에 앉았다. 그 꼴이 꼭 새끼 고양이와 같다.
“있짜나, 울면 안 돼. 저기 밖에 있는 나쁜 아저씨들이 막 화내고 욕해. 그리니까 쪼금만 참아.”
소녀는 뭔가 흥분된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그리고 나 쫌 무서웠는데 오빠가 와서 이제 괜찮아. 근데 오빠가 하도 울어서 나도 쫌 울 뻔했다?”
그 조그만 가슴을 통통 치며 여기가 아팠다는 둥, 이제 둘이라서 하나도 안 무섭다는 둥 조잘거림이 쉼이 없었다.
“울 선생님이 그러는데 막 마음이 약해지면 자기가 진짜 하고 싶은 걸 할 수가 없대. 그러니까 여기가 튼튼해야 해. 오빠도 울지 말고 튼튼해지면 좋겠어.”
소녀는 나이에 비교해 무척이나 어려 보이던 셀로신을 제 또래로 생각했는지 거침없이 셀로신의 가슴팍을 팡팡 치며 조잘거렸다.
하지만 소녀의 말에 셀로신은 부끄러워졌다. 저렇게 쪼그만 아이도 울지 않는데, 13살이나 된 사내아이가 엉엉 울었다는 사실이 창피스러웠다.
얼굴이 부끄러움에 붉어지자 아이는 방긋 웃으며 셀로신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괜찮아. 컴컴하면 나도 무섭거든. 오빠도 무서웠지? 내가 불 켜줄까? 며칠 전에 배운 건데….”
쉬지도 않고 쫑알거리는 꼬맹이가 중얼거리다 라이트닝이라고 외치자 흐릿한 빛이 손바닥에서 떠올랐다. 반 토막도 되지 않던 아이가 자그마한 손바닥을 펼쳐 보이자 방 안으로 흐릿한 빛이 떠올라, 캄캄한 방 안에 온통 빛이 둥실둥실 별이 쏟아진 것처럼 움직였다.
셀로신은 깜짝 놀라 방 안을 둘러보다 소녀를 다시 돌아보았다. 저렇게 어린아이가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건 들어본 적이 없었다. 꼬맹이는 이를 드러내며 싱긋 웃었다. 그러곤 되지도 않는 소리를 지껄였다.
“이건 비밀인데 오빠한테만 알려줄게. 난 한 번 본 건 잘 잊어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가, 뭐든지 금방 배워. 마법도 배운지 한 달밖에 안 됐거든. 난 엄청 재미있고 쉽던데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울 엄마 아빠가 나보고 천재래. 내가 크면 엄청난 힘을 가질 거래. 힘을 가진 사람은 약한 사람을 도와줘야 한데! 그러니까 이 천재가 오빠를 지켜줄게.”
기가 막힌 말이었다. 키도 제 반 토막밖에 안 되는 꼬맹이 계집. 그런데 그런 아이가 13살이나 되는 저를 지켜주겠다니. 약한 사람이라니? 얼굴이 온통 새빨갛게 변했다. 부끄러움이 치밀어올랐다. 셀로신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그때야 깨달았다. 자신이 그동안 잦은 잔병치레를 이유로 너무나 온실에서만 자랐다는 사실을 말이다.
“시끄러워!”
두 아이의 소곤거림이 생각보다 컸던 것인지 결국 문밖을 지키고 있던 사내가 방 안으로 박차고 들어왔다.
“허, 저 망할 꼬맹이가 마법을 썼어? 빌어먹을!”
그는 나무 방망이를 쥐곤 성큼성큼 다가왔다. 납치범은 아이들에게 두려움을 주기 위해 몽둥이를 붕붕 휘두르며 위협을 했다.
협상을 위해 아이들을 납치했건만, 저 어린 계집아이가 마법을 사용할 줄 상상도 못했다. 게다가 이 밤중에 수백 개나 띄워놓은 불빛이라니…. 납치한 위치가 이곳이오! 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발각되는 날엔 그들의 계획이 모조리 망가질 터였다.
그는 망할 꼬맹이들에게 매운맛을 보여주겠다며 험한 말을 내뱉었다.
“깜찍한 꼬맹아, 당장 저 빌어먹을 빛을 없애지 못해?”
셀로신은 화들짝 놀라 몸을 웅크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작고 나약한 몸으로 받들어지기만 하고 살았기에, 잠깐의 깨달음을 얻는다고 해도 소년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낯선 폭력에 몸이 굳어버릴 뿐이다.
하지만 제 옆에서 시끄럽게 떠들던 소녀가 셀로신의 앞을 지키듯 나서더니 손을 쭉 뻗었다. 그러곤 작은 목소리로 몽둥이를 휘두르려던 사내의 발밑으로 영창을 시도했다.
“디그.”
사내는 아이들에게 몽둥이를 휘두를 수 없었다. 바닥이 뒤엎어지며 남자가 서 있던 자리에 구덩이가 커다랗게 패였다. 머리끝까지 몸이 거꾸로 처박혀버렸다. 게다가 그가 들고 있던 몽둥이가 손에서 빠져나와 빙글빙글 돌더니 창문을 제대로 깨트렸다.
소녀는 잽싸게 침대 위로 뛰어오르더니 망가진 창문 밖으로 작은 손을 내밀어 걸쇠를 빼버리곤 창을 밖으로 활짝 열었다.
자그마한 창문은 기껏 해봤자 소녀의 머리통 하나만큼의 크기였지만 방 안 가득 띄워 놓았던 빛이 둥실둥실 쏟아져 밖으로 흘러가기엔 충분한 크기였다.
그렇게 온종일 쫑알거리던 소녀의 라이트닝 덕분에 둘은 무사히 구조되었다. 창밖으로 둥실둥실 쏟아지듯 떠내려간 라이트닝이 마치 은하수처럼 길을 만들어 소녀를 찾고 있던 이들에게 발견된 덕이었다.
아이들을 납치했던 반 왕당파인 급진 귀족파들은 몽땅 잡혀 들어갔다. 왕족 시해 미수범으로 끌려간 그들은 영지를 모조리 회수당하고 작위까지 빼앗겼다. 결국, 거지꼴로 쫓겨난 이들은 더는 귀족으로 사는 삶을 꾸려나갈 수 없었다.
헤실거리던 꼬맹이가 지켜준다고 했던 말은 정말로 실현되었다. 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셀로신에겐 그 사건은 무척이나 충격적이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왕궁으로 무사히 돌아온 셀로신은 그날부터 완전히 바뀌었다. 잘 먹지도 않던 식사를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의사가 챙겨준 약도 정성껏 챙겼다.
그렇게 1년여를 지나자 계절마다 저를 괴롭히던 질병이 하나둘 나았다. 잔병치레가 사라지자 셀로신은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체력이 어느 정도 붙자 소년은 검을 배우기 시작했다. 검을 배우기 시작한 이후 셀로신은 제게 엄청난 재능이 숨어있었던 걸 깨닫게 됐다.
‘나도 여기가 제법 튼튼해졌어. 꼬맹아.’
제법 몸이 좋아진 셀로신은 근육으로 꽉 들어찬 두툼해진 가슴팍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그는 검술에 미쳐 한동안 꼬맹이를 한쪽 가슴에 품고 살았다. 언젠간 소녀에게 제 변한 모습을 당당히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수년 뒤 두 사람은 마굴에서 최악의 형태로 다시 만나게 된다.
그 뒤 셀로신은 발칙하고 귀여웠던 꼬맹이를 남몰래 지켜보기 시작했다. 역시, 스스로를 천재라고 부르던 아이는 날이 갈수록 대단해져 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6서클이라는 엄청난 마법사가 되어있지 않았던가.
그녀는 자신만만했고 늘 빛나는 사람이었다. 활기차고 당당했던 꼬맹이는 정말 멋진 소녀로 자라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순수함의 극치라고 할까. 그 순수함을 노리고 그녀의 곁에 수많은 사람이 다가섰다.
이상하리만큼 그런 자들을 볼 때마다 울컥울컥 기분이 나빠졌다. 그녀에게 호감을 들어내는 자들의 등장이 그렇게 불쾌할 수가 없었다.
‘포르틸라. 그대를 좋아합니다.’
누군가 이난을 좋아한다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입에 발린 소리. 셀로신은 그자가 얼마나 쓰레기 같은 놈인지 알고 있었다.
놈은 이미 약혼녀가 있었다. 그런 놈이 감히 자신의 소녀에게 양다리를 걸치려 들다니. 이난은 그 사실을 모르고 놈과 한동안 교제를 했던 것 같다. 물론 깊은 관계로 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놈은 철저하게 이난을 이용했으니까.
6서클 마법사와 사귀는 상단주의 아들. 그 타이틀 하나만으로도 상단의 위세는 엄청나게 커졌다. 신속, 안전배달! 당시 성행하던 도적들은 모조리 꽁무니를 뺏고 상단의 용병 고용 비용 감소는 순수하게 그들의 이익으로 돌아갔다. 또한, 신용도의 상승은 상단의 몸집을 부풀리는데 어마어마한 도움이 되었다.
애정이 없는 관계는 오래갈 수 없는 법. 두 사람이 결별 후 셀로신은 조용히 놈의 양다리를 부러트려 버렸다.
게다가 포르틸라가 성인이 되어 혼기가 차게 되자 그녀의 권력을 노리고 다가서는 쓰레기들은 더욱 노골적으로 나타났다.
셀로신은 그녀에게 다가서는 놈들이 마굴에 나타나면 다리를 부러트리는 걸 아무렇지 않게 시도했다. 또는 그녀의 곁에 맴도는 사내놈들이 사교계에 얼굴을 드러내면 엘런트 공작의 권력으로 소리소문없이 짓밟는 것 또한 쉽사리 행했다. 덕분에 묘한 소문이 돌았다.
‘포르틸라의 곁에 가면 저주를 받는다.’
그럼에도 그녀의 결혼 시장에서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다행히 포르틸라는 과거를 교훈 삼아 섣불리 남자들의 구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덕분에 사내들은 그녀와의 관계가 틀어질 때마다 악질스러운 소문을 냈다.
도도하고 건방진 마법사라느니, 저주받은 마법사라느니…. 마법에 미쳐 욕심이 많은 여자라는 둥 원색적인 소문이 쏟아졌다. 그럴 때마다 활기차고 당찼던 그녀의 얼굴에 표정이 사라져갔다. 급기야 말 섞는 것조차 조심스러워하더니 마굴에 발길을 끊어버렸다.
셀로신은 안타까움과 함께 지독한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그녀의 단단한 울타리가 되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오해로 포르틸라는 셀로신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 앞에 당당히 나설 수가 없었다. 결국, 그녀가 소원하는 7서클 마법사로 만들어주고자 했다.
셀로신은 이난에 대한 애정으로 그녀를 위해 마정석을 모으기로 결정했다. 그는 밤낮을 쉬지 않고 마굴을 헤집고 다니며 마정석을 쓸어 담았다. 덕분에 그에게 붙은 수식어가 생겼으니 ‘마굴의 주인’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준비되었다고 생각한 어느 날, 셀로신은 포르틸라를 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계획을 실행했다. 자연스레 국왕인 형님을 이용했다. 그녀에게 청혼서를 넣어달라고, 그녀가 타국의 남자와 결혼하면 얼마나 큰 손실로 이어지게 되는지 브리핑 한 번으로 그는 승낙을 해주었다.
또한, SM 의뢰서를 넣은 것도 자신이었다. 별거 아니었다. 포르틸라가 의심하지 않게 제 기억조차 봉인해버렸다. 특정 키워드를 통해 기억이 돌아오게 말이다. 키워드는 그녀의 입을 통해 ‘고자 새끼’라는 단어를 듣는 것. 자신 있었다.
잊었던 기억이 돌아온 순간 그는 포르틸라에 청혼했다. 그렇게 자연스레 포르틸라가 손아귀에 굴러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