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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끝까지 끓어 넘치는 욕망을 억누르지 못한 그는 기어코 그녀의 가느다란 속옷 끈을 잡아 찢듯이 끌어 내렸다.
금욕적인 성기사라고 생각했던 과거가 무색하게도 가느다란 허리를 움켜쥔 남자의 손은 도드라진 뼈마디마다 위험한 관능을 분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손으로 지금은 그녀에게 애써 잠가 놓은 속옷의 끈을 다시 풀라고 강요하고 있었다.
“이거, 다시 벗어야겠는데. 전부 다.”
“당신이 자꾸…….”
“내가 뭘. 그러니까 애초에 입지 말라고 했잖아.”
“결혼하면 다들 다른 사람이 된다고 하더니 진짜잖아.”
“난 변한 거 없어.”
“음흉해졌는데?”
“그건 이제까지 열심히 숨기고 산 거고. 그런 건 상을 줘야지.”
“이렇게까지 감쪽같이 숨길 수 있다고?”
“숨긴 게 아니면?”
“나 몰래 무슨 못된 마법이라도 부렸을지 내가 어떻게 알아.”
입술을 삐쭉거리며 하는 태리의 발언에 그런 귀여운 소리를 잘도 한다는 듯이 클로드가 넓은 어깨를 흔들며 낮은 음성으로 웃었다.
“내가 이러는 게 마법이라면 난 그 마법 영원히 안 풀 거야. 쭉 이대로 살 거야. 이렇게 사는 게 정말 좋거든.”
동그란 뺨을 매만지고, 예뻐 죽겠다는 얼굴로 코끝으로 비비더니 입술에 쪽 하는 짧은 입맞춤을 남긴다.
저런 목소리로, 저런 표정으로, 이런 다정한 입맞춤은 반칙인데.
태리는 허벅지를 벌리는 그의 손목을 저지하지 못하고 제 흰 피부 위에서 어지럽게 흐트러지는 검은 머리칼을 만졌다.
너무 짓궂게 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제 위로 다시 묵직하게 타고 오르는 걸 보니 그는 전혀 그럴 마음이 없어 보였다.
벗겨지는 것을 순순히 용납한 뒤부터 클로드의 숨소리가 커지고 움직임이 조급해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정하고 부드러운 그도 좋았지만 이렇게 다듬어지지 않은 듯한 거친 모습도 좋다.
오직 자신만이 보고, 나만이 갖고 싶은 모습이라 근육이 오르내리는 어깨와 등을 쓰다듬으며 안 그래도 인내심이 없는 남자에게 부추기는 듯한 손길을 더했다.
“정말 우리 이제 앞으로 뭐 하고 살지?”
“이런 거.”
“농담하지 마.”
“농담 아니야.”
태리가 들으면 경악할 일이겠지만 클로드는 정말 그랬다. 그가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은 종일 그녀를 안으면서 귀찮다고 투정 부리면 조심스럽게 달래서 안고, 찡얼거리면 그게 뭐든 다 들어준 뒤 또 온종일 안아 보는 것이었다. 가끔은 울음이 나올 정도로 괴롭혀 가며 질리게 만족시켜 주고 싶기도 했고.
아내에게 환장하는 정신 나간 변태가 딱 좋았다.
하지만 이런 진심을 솔직하게 말했다간 아마 그녀는 저 커다란 눈을 더욱 커다랗게 뜨며 놀란 새처럼 도망갈 게 분명했다. 종아리를 간지럽히듯이 주물러서 타고 오르며 그가 아내의 새 고민거리에 대해 정성껏 귀를 기울였다.
“뭘 하고 싶은데?”
“음, 원래는 은퇴하면 하고 싶었던 게 있었는데.”
“그런 게 있었어?”
“있었지. 남쪽 휴양지 섬에 가서 눈곱도 안 떼고 수영하고 출출하면 과일 먹고 졸리면 자고. 예쁜 샌들 신고 모래사장에서 뛰는 거.”
“그런 섬이 있어?”
“있지, 많아.”
“어딘데.”
“당신은 설명해도 몰라. 나만 알지.”
“……그런 데면 가지마.”
“걱정 마. 안 가니까.”
그때에는 제 운명이 이렇게 될 줄 몰랐던 때라. 은퇴 이후의 세웠던 그 계획에는 클로드가 없었다. 아니, 그냥 아무도 없이 그녀 혼자만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삶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생겼다. 혼자서 즐기며 살겠다는 휴양지행이 아닌 그들과 함께하는 미래를 다시 그려야 한다. 아주 시끄럽고 즐거운 일이 될 것이다. 태리가 방긋거리는 미소로 자신에게 열중하고 있는 남자의 이마를 손끝으로 쓸었다.
그는 순종하는 늑대처럼 그녀의 코앞으로 단숨에 끌려왔다.
“왜?”
“그냥. 신기해서. 난 아직도 가끔 내 시간이 꾸준히 흐르고 있다는 게 실감이 안 나. 끝인 줄 알았는데 내일도, 그 모레도 계속 있어.”
본래라면 빌을 죽이는 것으로 저주를 풀고 종결되는 이야기였으니.
그를 죽이지 않고도 저주를 끝낼 수 있다는 숨겨진 틈새를 찾아내게 되었을 때 그녀는 처음으로 엔딩 이후의 제 삶에 대해 희망을 가졌었다.
빌을 죽이지 않는다면 나도 이곳에 남을 수 있을지도 몰라.
사라지지 않고 여기서 모두와 함께 살 수 있을지도 몰라.
그것이 희망으로 끝나지 않길 얼마나 간절히 바랐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 간절함은 이제 이렇게 눈앞의 현실이 되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 매일 아침 눈을 뜨고 일어날 때마다 그녀는 하루하루가 눈물이 날 정도로 소중하고 감격스러웠다.
“끝날 일 없어.”
응, 알아. 태리가 작게 대답하며 끄덕였다.
현실이 된 희망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이건 누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삶이 되었으니까. 주어진 결말 같은 것도 없고 끝이란 것도 없어졌다.
참 많은 일들이 있었지. 그녀는 눈을 감으며 그동안 정신없이 달려온 길을 처음으로 멈춰 서서 뒤돌아보게 되었다.
공주가 되었고 숨겨 넣고 살던 슬픔을 모두 쏟아 내었다. 슬픔이 나가고 난 자리에는 수많은 애정들이 들어와 찼다. 그 애정을 발판 삼아 그녀는 모험을 나섰고 드래곤에 맞서 싸웠으며 나라를 구한 뒤 눈앞에 있는 이 근사한 남자를 얻었다.
‘정말 큰 보상이었지.’
늘 나를 지켜봐 주었던 사람. 제게 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렸던 사람.
그로 인해 얼마나 가슴이 들떴고 또 미어졌던가.
그럼에도 그 모든 순간들을 지나쳐 제게 결말이 없는 이 삶을 선물해 준 그의 가슴에 그녀는 눈을 감은 채로 깊이 파묻혀서 기댔다.
그리고 본 것은 찰나의 한 장면이었다. 눈을 감았던 그 잠깐 사이에 그녀는 스쳐 지나가는 듯한 짤막한 장면을 보았다.
마치 엔딩 크레딧이 모두 올라가고 난 뒤에 덧붙여지는 짧은 클립처럼 순식간에 지나가는 장면.
울창한 나무와 만 가지 색의 꽃이 지천으로 널린 장미원이었다. 어느새 저렇게 많이 자랐지? 하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성문을 열고 나와 그곳을 향해 뛰어가는 자신의 뒷모습을 보았다.
꽃밭을 가로질러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 오렌지 나무 밑을 지나 숨을 몰아쉬며 장미원의 한가운데로 뛰어간다.
난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했더니 자신이 향한 곳은 어딘가가 아니 누군가에게로였다.
자신의 숨 가쁜 발소리에 당연하다는 듯이 호미를 들고 허리를 일으키는 남자가 그곳에 서 있었다. 자신을 위해 장미원을 가꾸고 하루도 빠짐없이 꽃을 심은 사람이었다.
아, 역시 당신이구나.
그가 돌아보았을 때 술렁거림이 느껴졌다. 풀들이 몸을 기울이고 장미원 전체가 숨을 들이켜는 것처럼. 꽃밭 한가운데에서 그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자 밀짚모자를 덮어쓴 얼굴이 여지없이 붉어진다.
단추를 풀어 놓아 바람결에 휘날리는 셔츠가 늘 그랬듯 다정하게 느껴졌다. 얇은 차림새로 달려 나온 자신을 보고 허겁지겁 셔츠를 벗어 덮어 주려고 했지만, 그보다 먼저 힘껏 달려가서 덥석 품 안으로 안긴다. 등 뒤로 들고 있던 호미가 툭 떨어졌다.
“아얏.”
가슴의 연한 부위를 깨물리는 약한 통증에 태리는 다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아팠어? 하고 물어보는 클로드의 얼굴이 흥분에 취한 것처럼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태리가 배시시 웃으며 그의 볼을 잡았다.
“잠깐 몇 초 사이에 꿈이라도 꿨나 봐. 그런데 우리 둘이 같이 있었어.”
그녀의 살 내음에 취해 있으면서도 그 말만은 듣기 좋았는지 다시 보드라운 피부를 빨아들이는 입 끝이 부드럽게 올라갔다.
“꿈속에 내가 나왔어? 우리 같이 뭐 했는데?”
“뭘 했냐면…… 진짜 뭘 했냐면…….”
태리는 괜히 말끝을 빙빙 끌고 늘이면서 클로드의 궁금증을 부추겼다. 그 모습이 꽃봉오리 속으로 들어갔다 나오며 잡힐 듯 말 듯 장난치듯 요정같이 느껴져서 클로드는 다시 욕구에 눈먼 짐승처럼 이성이 간당간당해졌다.
“어쩌려고 이래, 진짜. 안 그래도 죽겠는데…….”
이번만큼은 거칠게 하지 않으려고 했단 말이다. 하지만 더 거세게 덮쳐 버렸다. 허겁지겁 집어삼키는 입술 사이로 태리의 맑은 웃음소리가 흘렀다.
젠장, 심장이 제어가 되지 않을 정도 뛰어서 터지려 한다.
행복이 극점에 이르러서 지난날을 떠올리게 된 건 그 순간의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를 위해 그는 처음으로 진짜 영웅이 되어 보려 했었다. 신이 두렵지 않았고 반드시 살아남겠다고 다짐했었다.
묵직하게 하반신을 밀어붙이고 들어오는 움직임에 태리는 밭은 호흡을 흘리면서도 천천히 그를 받아들였다.
점점 더 깊어져 가는 삽입이 힘겨운지 가냘픈 소리가 끊이지 않긴 했지만, 그 사이사이로 하다만 이야기를 속삭이며 그녀는 더욱 클로드를 애타게 만들었다.
“아까 꿈에서 당신 얼굴에 흙 잔뜩 묻어 있는 거 봤어. 손에 호미도 들고.”
“뭐야. 그런 건전하고 시시한 꿈이었어? 재미없었겠네.”
“아니, 난 너무 좋았어.”
젖은 채로 바르르 떨리는 입술을 움직이며 태리가 행복에 겨워 말했다.
“그리고 나, 앞으로 뭐 하고 살지도 찾았어.”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뺨이 어쩐지 기대에 부풀어서 들뜬 것 같더라니. 그 답을 찾고 있었던 건가. 헐떡임이 터져 나오는 입술 앞으로 클로드는 상체를 숙여 귀를 갖다 댔다.
그러자 대단한 자랑이 하고 싶어서 한시도 기다리지 못하는 참새처럼 태리가 얼른 그의 귓속으로 속삭인다.
“난 앞으로…….”
이 옆구리에 딱 붙어서 하루 종일 수다 떨 거야. 그리고 엄청 귀찮게 굴 거야. 매일 업어 달라고, 맛있는 거 만들어 달라고 할 거야. 일도 안 할 거고, 당신이 일하면 옆에서 부채질이나 하고 수박이나 베어 먹다가 구경이나 하지. 난 앞으로 그렇게 살래.
그래도 괜찮아? 라고 다디단 음성이 종지부를 찍었을 때 클로드는 그녀를 향해 제 온몸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무엇으로도 저항할 수 없었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서약서만 다 읽어 내면 더는 울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눈앞이 뿌옇게 가려지며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그래, 내가…… 그렇게 살도록 해 줄게.”
차마 목이 메어서 그다음 말들은 소리 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틀림없이 약속했다.
나는 네가 시키는 대로 네가 바라는 일을 하며 살아갈 테니, 너는 그런 내 옆에 붙어서 늘 재잘거려 줘.
우리가 깊이 사랑하는 일에 대하여.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