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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 행렬에서는 마법사들이 줄지어 늘어섰다.
폐허에서 고생했던 과거가 무색하게도 다들 어찌나 근사하게 차려입었는지. 그 모습에 태리는 어깨 위의 자그마한 짐조차 모두 내려놓고 활짝 핀 꽃처럼 그들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었다.
“수고하셨어요, 공주님.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공주님은 저희에게 평생의 기적이랍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영원히 당신을 위해 목숨을 바칠 거예요. 그러니 더는 죄책감 따위 갖지 마시고 부디 행복하세요.”
울먹이는 안시의 목소리 뒤로 물결처럼 밀려드는 수십 개의 축사가 가슴을 데웠다.
태리는 그 사랑스러운 이야기들이 차곡차곡 제 마음속에 쌓이는 것을 느꼈고, 그 목소리들이 모여 귓가에서 하늘하늘 흔들리는 소리를 들었다. 작고 소중하고 따뜻한 것들이 마음속에서 뭉쳐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마음속에 그녀가 앞으로 살아가게 될 새로운 삶이 있었다.
* * *
피로연이 거의 끝나 갈 즈음이었다.
더는 인사하러 올 사람도 없을 듯한 가장 막바지에 태리는 브리짓과 함께 걸어 올라오는 반가운 얼굴을 발견했다.
“이즈!”
“어이.”
작별 인사도 없이 훌쩍 떠나 버린 이즈가 오래된 옛 친구를 대하듯 멀리서부터 손을 휘적휘적 흔들며 걸어왔다.
그녀가 먼저 반갑게 일어서며 반기자 클로드가 샐쭉하게 입을 내밀었다.
“브리랑 같이 왔구나.”
“어휴, 혼자서는 죽어도 쑥스러워서 못 올라오겠다고 이 미친놈이 네 첫날밤에 들이닥친다잖아.”
뭐? 돌았나. 클로드가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머리채를 잡으려 했지만, 예상했다는 듯 잽싸게 회피한 이즈가 ‘난 사람 많은 거 별로야.’ 라며 자신의 소신을 심드렁하게 전했다.
“그렇다고 어딜 쳐들어와.”
“내 말이. 그래서 억지로 끌고 온 거야.”
“어서 와, 이즈.”
태리가 두 팔을 벌려 환영하자 이즈는 그답지 않게 머뭇거리더니, 무슨 말부터 시작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것처럼 어정쩡하게 그녀를 마주 안았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역시나 인간은 엘프에게 너무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었다.
숲을 빠져나가서 인간과 인연을 맺고 돌아온 엘프들은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마음을 다쳐 다시는 세상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고향으로 되돌아갔을 때 이즈도 솔직히 그런 마음이었다. 숲으로 들어가서 그녀가 죽을 때까지 다시는 나오지 않으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녀가 죽어서 더는 이 세상에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한쪽 가슴이 꽉 조여들어선…… 죽는 게 그녀가 아니라 자신이 될 것만 같은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그래서 늦었다. 그런 것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그것을 깨닫는 데까지 한참이나 걸려 버려서.
“늦어서 미안.”
“제때에 왔잖아.”
“아니, 늦었어. 이건 늦은 거야. 빌어먹을. 엘프는 이런 게 문제야. 쓸데없이 신중해. 그래서 늦고 그래서 놓치게 되는 게 많아. 너한테도 그래서 좀 늦어 버렸어. 더 빨리 왔어야 했는데.”
옆에서 곁눈질을 한 브리짓이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알아듣곤 ‘그것 참 딱한 사정이네.’라고 대꾸하자, 클로드가 ‘딱하긴 뭐가 딱해!’ 하며 곧장 이빨을 세웠다.
“너 말이야…….”
“응?”
“이 자식이 아직도 그렇게 좋아?”
남의 결혼식에 와서 시종일관 대단한 발언이었고 심술맞은 질문이었다. 태리가 답할 틈조차 없이 격분한 클로드가 먼저 알량한 엘프의 목을 졸라서 인정사정없이 흔들었다. 대체 왜 돌아왔냐고.
그러나 험악한 손길에도 이즈는 전혀 굽어 드는 기색이 아니다. 오히려 헹,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얼핏 안쓰러운 감정을 내보이는 듯한 태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자신을 그리 안타깝게 여길 건 하나도 없었다.
안타까운 건, 그런 건 줄 수 있는 게 더 이상 없을 때나 드는 감정이고 그는 아직 그녀에게 줄 게 많았다.
“뭐, 늦은 건 내 잘못이니까 할 말은 없지.”
이자리스를 떠나 있는 동안 나름 심도 깊은 고민을 거쳐 그만의 결론을 이미 내어 온 상태였다. 홀가분한 목소리로 그가 옆구리에 끼고 왔던 화분을 태리의 품에 안겼다.
“일단 이건 임시방편 같은 건데. 그래, 임시선물이라고 하자.”
“이게 뭔데?”
“너를 위해서 세계수의 가지를 꺾어 왔어.”
뭐라고? 태리는 하마터면 놀라서 화분을 떨어트릴 뻔했다. 그런 짓을 하면 그의 동족들이 절대 가만히 있으려 하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이즈는 그러거나 말거나의 자세였다. 그는 어차피 인생을 막 사는 엘프였다. 또 어차피 탈옥범이기도 했다.
“탈옥범에 도둑놈 딱지 하나 더 붙어 봤자 거기서 거기일 뿐이야. 그 뭐냐. 네가 가꾸고 있다는 장미원에다가 잘 옮겨 심어 봐라.”
“아무리 그래도 이런 걸 선물로 주면 어떡해.”
“임시라니까.”
이렇게 대단한 게 임시면 본격적인 선물은 뭘 얼마나 더 경기를 일으킬 물건을 가져오려고 그러는 걸까. 태리의 염려를 읽은 건지 이즈가 자신만만한 웃음을 입가에 드리워 보였다. 좌우로 시원스럽게 퍼진 입술이 그림처럼 곱고 아름다웠다.
“약속할게.”
“뭘?”
“내가 반드시 네가 영생할 수 있는 약을 구해 올게.”
말도 안 되는 허언에 클로드가 먼저 예식용 칼을 뽑아서 이즈의 뱃가죽을 툭툭 찔렀고, 브리짓이 그런 전설적인 영약의 레시피가 있다면 자신에게도 공유를 하라며 닦달했지만 주위에서 뭐라건 이즈는 자신의 주장을 번복하지 않았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의 거짓도 과장도 없음을 태리의 앞에 거듭 순수하게 약속했다.
난 널 영원히 살게 할 거야, 고결한 엘프의 맹세가 은은한 노랫소리처럼 울렸다.
어안이 벙벙해졌던 태리는 잠시 후 살며시 눈가를 접어 목소리에 웃음기를 담았다.
“그럼 그게 제일 대단한 결혼 선물이 되겠네.”
“당연하지. 너 말고는 아무도 받지 못했던 유일한 선물이 될 거야.”
“내 거 딱 하나만 구해 오는 거야?”
“그럼 누굴 챙겨? 당연히 네 것뿐이야.”
그러면서 자랑처럼 늘어놓길 엘프는 수명이 길기 때문에 자신만큼이나 그녀가 오래 살아 주어야만 후일을 기약할 수 있다고 했다. 누가 뭐래도 시간은 확실히 그의 편이었다.
“아무튼 걱정 마. 내가 어떻게든 영생의 비결을 찾아와서 널 오래오래 살도록 해 줄 테니.”
그리고 오래 살아라. 그건 그의 기다리겠다는 말과도 다르지 않았다. 태리가 영생할 수 있는 약만 찾으면 언젠가는 자신의 차례도 돌아오지 않겠냐는 거였다.
이런 미친놈을 보았나. 클로드가 칼을 쥔 손으로 이즈의 멱살을 후려잡았다.
“나가.”
“아니, 왜! 뭐가 문젠데. 너 죽을 때까지 방해 안 하고 얌전히 기다리겠다는 소리 아냐.”
“헛소리하지 말고 당장 꺼지란 말이다.”
영생이고 나발이고 내가 그 꼴을 두고 볼 줄 아나. 그녀가 영생하게 된다면 자신도 반드시 영생해서 두 눈을 부릅뜨고 옆을 지킬 것이다.
네놈은 다시는 이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라고 그가 이즈의 멱살을 움켜잡은 채로 질질 끌어냈다.
그러나 이즈는 포기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바닥에 힘을 주고 버텨 가며 제 할 말을 다 했다.
“내가 짝사랑을 못 끝내면 다 이 녀석 때문이야! 그냥 놔두면 혼자 질리게 좋아하다가 알아서 떨어져 나갈 텐데! 너, 내가 언젠가 너한테 나도 널 사랑해 줄까 하고 물었던 거 기억나지…… 아악!”
하지만 욕심은 화를 부르는 법. 탐스러운 은발 머리가 결국 잔혹하게 뜯겨 나갔다.
마귀가 된 새신랑이 엘프의 머리칼을 또 한 번 칼로 썩둑 썰었으니. 그리하여 단발머리 왕자님 같았던 그의 머리는 짧고 단출한 머리가 되어 보통의 남자들 수준으로 맵시가 몹시 단정해졌다.
“이 새끼야약!”
미용이 잘못된 성난 말티즈처럼 이즈가 즉각 달려들었고 클로드는 어서 오라는 한마디로 그 도전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가 보기엔 차라리 이게 더 나았다. 엘프는 쓸데없이 너무 오래 산다. 이렇게 해서 그의 수명을 단축시킬 수 있으면 그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결혼 선물이었다.
눈앞에서 벌어진 익숙한 난장판을 브리짓은 웬일로 평소처럼 강 건너 불구경으로 삼지 않고, 지체 없이 몸을 움직여 두 남자가 사라진 빈자리에 얼른 자신의 존재감을 채웠다.
그러곤 마치 새치기하듯 도중에 끊긴 이즈의 이야기를 본인이 대신 이어받았다. 왜냐하면 이 기회에 그녀도 슬쩍 자신의 오래된 마음을 얹어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클로드의 눈치를 보느라 하지 못했던 말들이 꽤 많이 쌓여 있었다.
“내가 너한테 반말을 하는 건 이번이 마지막일 거야.”
“너라면 난 상관없는데.”
“무슨 소리야. 넌 앞으로 우리의 왕이 될 사람이야. 존중받고 떠받들어지는 아주 대단한 존재가 될 거라고!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나도 한 번만 안아 볼게.”
클로드가 제지하기 전에 곧 왕이 될 고귀한 왕녀를 브리짓은 흡사 덮쳐 들 듯이 꼭 껴안아 보았다. 하나뿐인 내 친구. 그녀가 힘주어 끌어당기며 말했다.
“내가 예전에 너한테 쌀쌀맞게 굴었다는 거 알아. 도망간 공주라고 업신여겼던 것도. 그런데 그 뒤로 나 정말 후회 많이 했어. 사과하고 싶었는데 자존심 때문에 미루다가 결국 못 했어. 그리고 네가 죽을 뻔했을 때나 되어서야 알게 됐지. 널 희생해서 지켜 낸 이자리스는 전처럼 내게 소중하지 않을 거라는 걸.”
그러더니 브리짓은 이쪽의 상황을 알아챈 클로드가 눈에 불을 켜고 달려오기 전에 얼른 이즈가 미처 끝마치지 못했던 고백을 제 것으로 삼아 뱉었다.
“우리의 공주님. 나는 너를 아주 많이,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내 마음속에서 사랑할 거야.”
우리는 정말로 너를 사랑해. 귀신처럼 날뛰는 신랑에게 잡혀갈까 서둘러 내지른 그 말이 오늘 이 성대한 결혼식의 마지막 축하 인사가 되었다.
너를 아주 많이 사랑한다고.
그리고 클로드는 그 말을 듣고 인내심을 상실했다. 그가 의자를 들어서 두 명의 훼방꾼들에게 맹렬하게 휘둘렀다.
* * *
밀도 높은 진득한 키스가 이마에서 시작해 눈 코 입을 따라 턱 밑까지 이어졌다. 속이 비치는 얇은 한 장의 슈미즈가 어깨에서 끌어 내려져 허리에 걸쳐졌다가 밑에서부터 성급한 주름을 만들며 말려 올라갔다.
살결 위로 쉴 새 없이 떨어지는 뜨거운 입맞춤에 잘게 떨고 있던 태리는 또다시 여유도 없이 파고들려는 클로드의 벌어진 어깨를 급하게 잡아 세웠다.
“그만, 그만. 이러다간 내일 못 일어날 것 같단 말이야.”
“그런 말 하면 더 못 참는데.”
귓불을 깨물며 들려주는 음성에는 어느새 뜨거움을 넘어 절절 끓는 기운까지 있어서 태리는 몸을 움츠리며 얼굴을 숨기려 했다.
그와의 모든 접촉이 지나칠 정도로 중독적이었다. 만류하며 어깨를 잡았던 손은 여전히 제자리인데 몸은 이미 수없이 맛보았던 그 열정을 기억하고 금세 다시 젖어 들었다. 하룻밤 새에 벌써 몇 번째인지도 모르는 잠자리였다.
입술 안쪽의 부드러운 부분이 서로 얽히며 자극하고 지나갔다.
달콤한 꿀단지 속에 혀를 집어넣듯 클로드는 두 손으로 태리의 턱을 받쳐 들고 고개를 꺾어 가며 입맞춤을 퍼부었다. 움찔하던 그녀가 제게 기대듯이 차츰 힘을 빼면 주저하지 않고 더 안으로 들어가 은밀한 곳까지 모두 음미했다. 성대를 긁는 듯한 신음이 목구멍에서 거칠게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