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4화 (184/186)

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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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망의 기로에서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헤매었던 곳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성안에서 꾸려진 공주의 결혼식은 눈부시도록 성대하고 화려했다.

마법사들이 이 예식에 얼마나 혼신의 힘을 쏟아 넣었는지 사방을 뒤덮은 휘황찬란함에 하객들은 시선이 앗겨 걷다가 어딘가에 머리를 부딪치고 정신을 차릴 정도였다. 실내인데도 귀밑머리를 기분 좋게 들썩이는 실바람이 연신 휘감아 돌고, 광이 나도록 닦인 크리스털이 천장에서 하늘빛을 뿌렸다.

물이 쏟아지는 분수대에서는 저절로 아름다운 연주 음악이 들려 다들 한 번씩 물속에 손을 집어넣었다가 빼 보곤 했다.

흰 꽃으로 엮은 화관을 머리에 얹은 공주가 수줍은 듯 사람들 사이로 입장했을 때는 그녀의 걸음을 따라서 양옆의 커튼이 열리고 닫히며 햇살을 그녀에게만 집중시켜 주었다. 마치 무대 위의 하이라이트 조명처럼 햇빛이 드레스의 움직임을 따라 공주만을 쫓아다녔다.

일찌감치 서 있던 클로드는 제 신부가 다 도착하기도 전에 먼저 뛰어 내려와서 그녀를 안아 들었다.

반듯하고 강인한 두 팔이 하얀 드레스를 떠받치고 화관이 얹힌 이마가 남자의 턱 밑으로 자기 자리를 찾아 알맞게 쏙 들어갔다.

그 모습이 너무 그림같이 아름다워서 사람들은 그로부터 누구 하나 의심할 바 없이 깨달을 수 있었다.

사악한 저주는 모두 다 끝났고 이제 세상은 더없이 평화롭고 안전하다는 것을.

그동안 치고 박고 싸우던 일이 무색하게도 칼을 찬 기사들과 지팡이를 낀 마법사들은 서로 나란히 붙어 서서 꽃바구니를 나눠 든 채, 두 사람의 결혼을 축복하며 하늘로 꽃잎을 흩뿌렸다.

그리고 이어서 영원하고도 온전한 결합을 맹세하는 서약서를 클로드가 낭독할 차례가 돌아왔을 땐 다 같이 한마음, 한뜻으로 모여서 열띠게 응원했다.

왜냐하면 그가 ‘사랑하는’이라는 처음 네 글자까지 읽곤, 곧바로 감정이 복받쳐서 다음 구절들을 전혀 읽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며칠을 고민해서 완성한 어렵고 멋있고 현학적인 말들이 줄줄이 쓰여 있었는데 한 줄, 한 줄 넘어갈 때마다 고비가 있었다. 세 문장쯤 겨우 잘 넘어가나 싶었는데 네 번째 문장의 가운데에서 등장한 ‘내 아내가 되어 주어서’ 라는 부분에서 또 급격히 눈시울이 붉어져선 한참이나 다시 말을 잇지 못했다.

인내심을 가지고 응원하던 하객석에서도 차차 웃음과 한숨이 동시에 퍼졌다.

“쉿, 다들 웃지 마라. 웃음이 나와도 참아! 우리 단장은 진지하단 말이다! 목이 메어서 말이 안 나오는데 어쩌란 말이냐!”

물론 이렇게 충실한 부류도 있긴 했다. 비록 이제는 옛 단장이 되어 버렸으나 한때나마 충성을 바쳤던 상관에게 끝까지 예우를 지키고자 하는 고리타분한 기사들. 하지만 마법사들은 저게 무슨 추태냐며 뒷목을 잡으려고 했다.

자신의 남편이 점점 더 울보가 되기 전에 태리는 부케를 잡은 손으로 클로드의 뺨을 연신 닦아 주었다. 이렇게 좋은 날에 예쁘게 잘 차려입고 왜 울먹인담.

눈꽃으로 빚은 것처럼 화려한 그녀의 웨딩드레스와는 다르게 그의 연미복은 번잡한 장식을 자제한 깔끔한 쪽이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그의 훤칠한 얼굴이 더욱 돋보이고 있었다. 조각상처럼 분명하고 날렵한 선과 남자다운 굵직함이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그런데 뭐가 그렇게 감정의 파도를 주체할 수가 없는 건지, 시원스럽게 넘긴 이마 아래의 이목구비에는 끓어 넘치는 울컥함을 참는 모습이 역력했다.

“왜 울고 그래요.”

“안 울어. 아까 나한테 걸어오던 모습이 자꾸 생각나서.”

“그게 어땠는데?”

“그게 너무 예뻤어.”

그러니까 그 모습이 자꾸 생각나서 이런단 말인가. 물론 달콤하고 듣기 좋은 소리였지만 거기에 무한정 공감을 해 주다간 그를 여기서 더 울리게 될 것 같았다.

태리는 서둘러 클로드의 뺨을 다독여서 달랜 뒤 그의 손에서 서약서의 끄트머리를 뺏어 가, 한쪽씩 나눠 든 듯한 자세로 내용을 들여다보았다.

“뭘 이렇게 많이 썼어요.”

“쓰다 보니까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제게 무슨 맹세를 이렇게나 많이 하고 싶었던 건지. 자신은 그냥 이 사람은 앞으로 영원히 내 남편입니다, 그 한마디면 되는데. 하지만 진지한 얼굴을 보니 그는 진심이었다. 해 주고 싶은 게 많아서 할 말도 이렇게나 많았던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길지 않아도 돼요. 나는 당신 한 사람만 있으면 돼요.”

그러니 어쩔 수 없이 태리는 이 순진한 남자에게 속삭여 줘야 했다. 나는 너만 있으면 된다고.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때부터.

그녀가 부케를 들어 향기 나는 손끝으로 곧 있으면 남편이 될 자의 눈가를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울지 말고 다시 해 봐요.”

넋이 나간 채로 그녀의 손길을 받던 클로드는 믿기지 않는 것처럼 가느다란 손끝에 기대어 멀뚱멀뚱하더니 금세 푹 젖은 눈으로, 하지만 훨씬 더 깊어진 눈빛으로 천천히 입을 뗐다.

“나의 삶은 당신을 만나 모험을 시작했고.”

그러나 거기서 또 울컥. 매 문장마다 고비가 있는 건지 다시 요동치는 감정을 보였지만 이번에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태리가 행복한 미소를 띤 채 눈앞에서 격려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당신의 곁에서 모험을 마쳤습니다. 그 자리가 내 평생의 안식처임을 영혼 깊이 새기겠습니다.”

이거 봐. 잘하네. 차분히 하면 여기서 제일 잘하잖아. 그녀가 그런 기특한 웃음으로 눈을 들었을 땐 바다처럼 깊고 넓은 눈동자가 그 끝에 드리워져 있었다.

처음으로 한 줄 이상 끊지 않고 낭독한 게 대견해서 입가를 활짝 편다. 하객들도 전부 같은 마음이었는지 환호와 격려가 담긴 박수를 보내 주고 있었다.

클로드는 태리의 방긋거리는 미소를 보며 턱에 힘이 들었다가 한순간에 풀어지며 서약서를 내려놓고 그녀의 등을 감싸 제게로 끌어왔다. 화관의 꽃잎이 다시 남자의 턱 밑을 스쳤다.

눈물이 나서 더는 못 읽겠다는 순진무구한 말 뒤로 담백한 진심이 마지막 문장을 장식하며 사뿐히 귓가에 내려앉았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정말로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허리를 깊숙이 숙이고 공주의 얼굴에 드리워진 면사포를 들춘 뒤, 그 속에 숨어 있던 자그마한 입술을 자신의 뜨거운 것으로 덮어 삼켰다.

우레와 같은 환호 속에 성혼의 키스가 이루어졌다.

드레스 밑의 두 다리가 녹아 흐를 것 같은 감각에 태리는 발꿈치를 세워 부드러운 머리칼이 만져지는 남자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에게 자신의 전부를 내맡기는 듯한 이 기분이 싫지 않았다.

끝내 소리로는 완성되지 못했으나 서약은 그렇게 온전한 형태로 마무리되어 끝이 났다.

그곳에 적힌 어느 한 줄의 맹세조차 태리는 남김없이 모조리 받아들였다.

* * *

웬만한 마수 정도는 한주먹으로도 쉽게 쳐서 날려 버릴 수 있을 만한 남자가 결혼식장에서 그리 연약한 눈물을 쏟아 내다니.

다사다난했던 예식은 그 잘난 외모의 신랑의 눈물 바람과, 그보다 더 사랑스러운 신부가 연신 그것을 닦아 주는 모습을 구경하느라 쏜살같이 지나가 버렸다.

그리고 이어진 피로연에서는 막 부부가 된 이들을 향한 축하 인사와 선물을 전달하려는 행렬이 춤추듯이 길게 이어졌다.

가장 먼저 선물을 가지고 올라온 건 클로드의 부모인 공작 부부와 형인 미리엘이었다. 먼 타국으로 장가를 보내게 된 막내가 자랑스러우면서 그립고 보고 싶을 것 같은지 그들은 눈물을 글썽이다가 말없이 서로를 한 번씩 꼭 안아 보았다.

태리가 수줍은 목소리로 ‘제가 데려가서 잘 살게요.’라고 말하자 공작과 공작 부인은 따뜻한 미소로 그녀에게도 마찬가지로 단단한 포옹을 해 주었다.

그러면서 속삭이길 처음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것을 보았을 때부터 잘 되기를 소원했다고 얘기해 주었다.

미래라는 것은 뜻대로 되지 않기가 일쑤지만 그래도 두 사람에게만은 그 행운이 허락되길 기도했었노라고. 그리고 그 기도가 꿈에서 현실이 된 지금 모두에게 더없이 감사하고 행복하다면서.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 말에는 그만 태리마저도 눈물이 핑 돌아서 손에 낀 까칠한 레이스 장갑으로 눈가를 찍었다.

연약한 피부에 생채기가 날 것을 염려했는지 부드러운 천이 닿은 것은 그 직후였다. 마찬가지로 코가 빨개진 미리엘이 손수건을 내밀었다.

“성하님.”

“공주님.”

“정말 고마워요.”

“별말씀을. 공주님과 이자리스의 명예가 이렇게 지켜질 수 있어서 기쁩니다. 제 아우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애의 가슴속은 오랫동안 아무것도 들지 않은 채로 비어 있었습니다. 이제는 끓어 넘칠 정도로 꽉 찬 듯하니 조만간 뭔가 큰 사고를 칠지도 모릅니다.”

그는 오래전부터 그렇게 생각해 왔었다. 조종당하는 인생이 시시해 늘 텅 빈 가슴으로 사는 녀석에게 누군가 불씨를 붙일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그때부터 우리 집 막내는 아주 큰일을 해내고야 말 거라고.

하늘을 흔들거나 혹은 땅을 흔들거나. 아무튼 세상이 뒤집힐 만한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이루고 난 뒤, 후대에 길이길이 이름을 남기지 않겠나 싶었다.

조심하라는 농담과 함께 미리엘이 고귀해 보이는 상자 안에서 그보다 더 고급스러운 문서를 꺼내 전달했다.

“이것은 발로란의 황제께서 전하시는 축하 인사이자 선물입니다.”

두루마리처럼 말려 있는 실크 재질의 문서를 태리는 두 손으로 받아 조심스럽게 펼쳤다. 내용을 살펴보니 놀랍게도 그것은 황제의 성명서였다.

이자리스의 새 왕으로 즉위한 공주를 이 일대의 주인으로서 인정한다는 격식 있는 공표였다. 더불어 그 아래에는 세상을 구한 영웅의 귀환을 자신이 아낌없이 축하하노라고도 적어 놓았다.

“공관의 군대는 제가 돌아가는 길을 따라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모두 철수할 예정입니다. 공주님께서 원하신다면 신시가지의 귀족들도 모두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조치하라 명하셨습니다. 이자리스는 앞으로 온전히 공주님의 땅이자 마법사들의 영토입니다.”

일 잘하는 군주답게 군더더기 하나 없는 깔끔한 뒤처리였다. 지저분하게 어디 일부를 떼어 달라는 흥정도 없다. 태리는 우아한 몸가짐을 갖춰 황제를 대신하여 참석해 준 미리엘에게 화답했다.

“이자리스는 발로란이 보여 준 침략과 참회, 그리고 신의와 은혜를 모두 잊지 않을 겁니다. 훗날 기회가 될 때 보답하겠다고 약속드릴게요.”

은혜뿐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했던 침략의 행동까지 함께 잊지 않겠노라고 선언하는 깜찍한 태도라니. 미리엘은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전해 주겠다며 그에 못지않은 반듯한 눈웃음으로 이 결혼에 축복을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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