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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거면 될까요?”
“그래, 좋네. 수고했어.”
“묘비문은 어떻게…….”
“빌이라는 이름의 친구를 기억하며.”
“정말로요?”
“그래, 우리의 공주께서 그렇게 하길 원하시니.”
브리짓은 무릎을 숙이고 앉아 인부들에 의해 흙이 다시 꾹꾹 다져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푸른 잎이 자라기 시작하는 왕가의 정원, 지하의 왕묘가 아닌 그 입구에 사이좋은 친구처럼 두 개의 묘석이 나란히 서 있었다.
하나는 미려왕 실리안 소네티. 축복 속에 태어났고, 우정으로 인해 하늘의 끝에서 땅의 끝으로 오갔으며, 딸로 인해 비로소 이 자리에 잠든 우리들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왕.
그리고 다른 하나는 빌의 것이었다.
스스로 두고 떠나는 것을 어려워해 그들의 손으로 힘겹게 떠나보낸 신의 자리였다.
이제 그곳에는 빌이라는 이름이 새겨지고 있다.
마법사들은 여전히 신을 믿지 않지만 그럼에도 빌만은 기억하기로 했다.
아마 기억을 잃은 그 신이 우연히 이 땅을 지나갈 때면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대체 이 인간이 누구이기에 이자의 묘 옆에 나와 비슷한 이름을 새겼는가, 하고. 그는 결코 그 이유를 알아내지 못할 테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그의 기억을 대신하여 간직하기로 한 이들이 이 땅에 많이 남아 있었다.
공주가 없을 때에도 공주를 사랑했던 것처럼. 성을 지키던 그 작고 가여운 소년이 없어졌어도 마법사들은 이제 그를 사랑할 수 있었다.
바닥에 튼튼하게 붙은 묘석을 눈에 담던 브리짓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언제 이곳이 검은숲으로 악명을 떨친 적이 있었냐는 듯 숲은 평화롭고 아늑해졌다. 그동안 참아 왔던 것을 한꺼번에 토해 내는 것처럼 숨을 들이마시면 청결한 기운이 폐 속에 가득 담아진다. 그 상쾌한 공기가 아직 어색했지만 누구도 그것을 낯설다고 하지 않았다.
“꼭 새 계절을 맞이하는 것 같아. 추운 겨울을 보내고 이제 우리한테 남은 건 볼품없지만 그래도…… 우리끼리 잘 해내 갈 수 있겠지?”
“우리한테 남은 게 왜 볼품이 없습니까? 이자리스엔 이제 영웅이 둘이나 있는데요.”
“둘?”
“공주님도 계시고 곧 있으면 공주님께 장가를 올 기사도 있잖아요.”
앞으로는 다 좋은 일만 있을 거라며, 영웅이 둘씩이나 되는 조국에 자부심을 가지라는 잔소리에 브리짓은 듣다 말고 맑은 웃음보를 터트렸다. 보기 드물게 깨끗하고 숨김없는 웃음소리여서 모두들 저 독마녀가 저렇게도 웃을 수 있었구나, 하고 입을 뻐끔했다.
“그 둘만 있겠어. 다들 그랬지. 다들 자신이 있어야 하는 자리에, 있어야 하는 순간에 다 같이 있었잖아. 난 영웅이라는 거 대단한 일을 해낸 사람이라기보단 자신이 있어야 하는 그 자리에 물러서지 않고 바로 서 있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든.”
그리고 그 말에는 삽을 들고 흙을 갈무리하던 인부들조차 하던 일을 멈추고 동그랗게 뜬 눈으로 모두 그녀를 바라보았다. 단체로 코끝이 찡해진 얼굴이자 브리짓이 뒤늦게 당황한 말투로 더듬었다.
“뭐, 뭐야. 그런 눈빛들은.”
“아니, 그냥. 수상 감투를 쓰더니 우리 브리가 어른이 다 됐네 싶어서.”
“그러니까. 그렇게나 막무가내로 철없이 굴던 녀석이. 훌쩍!”
“이상한 코 훌쩍 같은 거 하지 마! 그리고 어? 다들 어? 존칭 꼬박꼬박 쓰라고. 은근슬쩍 말 놓지들 말고!”
어른스러워졌다는 칭찬이 낯부끄러웠던 모양인지 이자리스의 새 수상이 된 브리짓은 괜히 성질을 내다가 도망치듯 황급히 자리를 뜬다. 본인에게도 아직은 한참이나 어색한 직위라 사람들이 저렇게 나올 때면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몰라서 줄행랑을 치게 되었다.
사건의 발단은 대략 한 달 전쯤이었다.
도서관 붕괴 이후에 벌어진 난리 통을 수습해 가며, 폐성을 복구하기 위해 갖가지 건물 자재들이 들고 나갔을 딱 그 즈음이다. 어느 날 모든 마법사들이 모인 성의 중앙홀에 서서 태리가 예고도 없이 깜짝 발표를 터트렸다.
이제부터 이자리스의 새 수상은 브리예요.
그게 무슨 황당무계한 소리냐며 웅성거리던 그 분위기란. 다들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단체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항의했다.
― 예에에? 어째서죠?!
― 귀엽잖아요.
― 공주님!!!!!!!
― 농담이에요. 소질을 타고났으니까 브리는 아주 잘할 거예요.
― 안 됩니다! 그 녀석 성격에 필시 폭정을 휘두를 겁니다!
― 맞습니다. 찻집에서도 얼마나 바가지를 씌워서 장사를 했는데요…….
― 권력이 눈에 먼 녀석에 자리를 쥐여 주면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꼴이지요. 욕심 없고 순수한 인물이 낫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