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1화 (181/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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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을 희미하게 맴도는 것들이라곤 그저 낯섦. 자신이 어째서 이런 세상에 발을 디디고 있는지에 대한 의아함. 절대자로서 가지는 관조적이고 무미건조한 상념들. 

눈앞의 현실에 혼란스러워진 소년은 차근차근 세상의 법칙과도 같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나열했다.

‘나는 진리의 바벨. 총명하고 지혜로우나 은둔하며, 진리를 탐구하는 모든 학자들의 선조이자 인도자인. 고독을 즐기는…… 즐겼던가?’

잠시 머뭇거린 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새빨갛게 익어 가는 세상을 둘러보았다. 어쩐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쓸쓸함과 큰 상실감이 몰려왔다.

내가 외로움을 즐겼던가.

‘뭐, 그랬겠지.’

그래, 그랬겠지. 그랬던 것 같다. 아닌 것 같기도 했지만 무슨 상관인가? 그는 바벨이었다. 그리고 곧 그 의식조차도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왜인지 모르겠으나 몸이 아주 피로했다.

대체 무엇에 이렇게까지 전력을 다하고 몸 바쳐 온 것인지. 허무할 정도로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질 않았으나, 신기하게도 그것을 억지로 캐내어 알아내야겠다는 의욕은 무시해도 좋을 만큼 아주 희미했다. 알지 않아도 그만 괜찮을 거라는 영문 모르는 편안함이 느껴졌다.

감히 눈으로도 담을 수 없는 광휘가 소년의 몸을 휘감는다.

초고열의 불길도, 전몰하듯 무너져 내리는 돌가루도 그것을 침범하지 못한다. 자그마한 몸이 부유하는 거품처럼 두둥실 떠올랐다.

건물의 천장에는 딱 드래곤의 크기만큼 뚫려 버린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다. 그 모양을 의아하게 바라보던 바벨은 무심히 고개를 꺾어 다시 제 발밑에 깔려 있는 불타는 잔해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무너진 바닥의 희미한 틈 사이로 자신을 향해 웃고 있는 여자를 보았다. 별 가루를 모아 놓은 듯한 빛나는 눈동자가 그를 향해 따스하게 뻗어 온다. 소리로 자아내지 않은 이야기가 천천히 움직이는 입 모양을 통해 자작거리며 흘러들어 왔다.

약속할게. 내가 너를 영원히 기억할게. 그동안…… 정말로 고마웠어.

마치 어제 들은 것처럼 익숙한 말이었다.

무슨 뜻일까. 역시나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가녀린 여자는 곧 달싹이는 것을 멈추고 다시 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바벨은 그 웃음 앞에 잠시 갸웃했지만 언제 자신이 그런 인간에게 시선을 주었냐는 듯 금세 다시 하늘로,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고개를 들었다.

드래곤의 유희는 끝났다.

기억을 잃고 자유로워진 소년은 그렇게 다시 신으로 되돌아갔다.

다만 어째서인지 한 줌도 안 되는 인간의 도시를, 망가지고 부서져 새카만 사체로만 남게 된 한 건물의 잔해를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꾸만 뒤돌아보게 되었다.

마음이 무척이나 아팠지만. 왜 아픈지도 모르는 채로 그는 그렇게 생애 유일했던 친구를 잊었다.

성스럽고 거룩한 존재가 떠나가는 길을 태리는 활짝 핀 미소로 끝까지 올려다보았다. 이제 더는 빌이라는 이름을 부를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더는 비좁은 성안에 웅크리고 있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그녀는 슬프고 또 기뻤다.

쿠웅!

붕괴 앞에서도 힘겹게 버티던 도서관은 바벨이 떠나고 나자 급격하게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지진과도 같은 울림이 간격 없이 찾아오고 우지끈하는 소리와 함께 여러 층의 지지대가 한 번에 끊어졌다.

그로 인한 잔해 더미가 이리저리 구르고 밀리다가 태리가 갇혀 있는 구덩이 위를 막듯이 덮어 버렸다.

아…… 여기를 빠져나가야 하는데. 그리고 클로드를, 그 사람을…….

힘없는 팔다리로 돌 사이를 헤치며 그녀가 구덩이 속을 기어오른다. 오르는 족족 주르륵 미끄러졌지만 손톱을 박으면서까지 버텼다. 기운이 없는 팔에 그나마 있던 감각마저도 사라질 즈음 애달픈 얼굴이 불길을 뚫고 나타났다.

혀를 날름거리며 주변을 먹어 치우려는 불을 가로막으며 클로드가 소리친다. 위에서부터 그녀를 향해 팔을 뻗는다. 잡아, 제발 내 손을 잡아! 태리는 흐려지는 시야를 떨치고 일어나 흐느적거리는 손가락을 겨우 그에게 얽었다.

그러나 클로드도 성하지 못한 상태였다. 가슴에서 터져 나온 피로 상의가 끔찍하리만큼 젖어 있다. 그녀를 붙잡고 있는 어깨가 후들거리는 게 보였다. 두 사람을 연결하고 있는 유일한 손은 평소처럼 쉽게 들어 올려지지 못하고 허공에서 흔들렸다.

이러다간 같이 떨어지고 말 거야. 클로드의 가슴팍에서 겨우 멎은 듯했던 출혈이 다시 터지면서 하얀 이마 위로 핏물이 흘러 떨어졌다. 눈가로 스며들어 오는 붉은 시야를 깜빡여 털어 낸 태리는 그만 그의 손을 놓아주고자 했다.

“빠져나갈 수 있을 때 먼저 빠져나가. 더 늦으면……”

“안 돼, 제발!”

그러자 그가 오열인지 애걸인지 모를 목소리로 외쳤다.

“우리 그러지 않기로 약속했잖아. 희생 같은 건 하지 않기로 했잖아! 둘 다 살아야 돼. 같이 살아야 한다고……!”

악을 쓰며 흐느끼는 그의 울음에 이번에는 뜨거운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붉게 젖어 있었던 시야를 씻어 내려 주었다.

‘살아……. 살아야 돼. 나, 난 살아야 돼.’

턱을 잘게 떤 태리는 다시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녀는 늘 살고 싶었다. 살고 싶었는데 한 번도 그렇다고 말하지를 못했다.

목숨을 바쳐야 할 일이 있다면, 그 목숨으로 책임을 질 누군가가 있어야만 한다면 그것은 모두 공주의 몫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사실은 그녀도 살고 싶었다. 살아서 그를 사랑하고 싶었다.

“살고 싶어……. 살고 싶어.”

마법을 쓸 수 있을 만한 힘이 없다. 로프 런처는 충돌로 인해 고장이 났다.

하지만 로프의 갈고리는 살아 있었다. 고장 난 장치는 더 이상 동력을 발휘해서 그녀를 어딘가로 끌려 올려 주진 못하지만, 로프 끝에 달려 있는 쇠갈고리만은 던지면 어딘가에 박히기는 할 것이다.

태리는 손목에 달려 있던 장치를 분리시켜 그 안에서 로프를 빼내었다. 그러곤 그것을 있는 힘껏 클로드의 팔뚝으로 던진다. 로프는 휘리릭 하고 빠르게 여러 번을 감기며 그의 팔뚝을 조였고 최종적으로 그 끝의 뾰족한 갈고리가 그의 살 안으로 박혀 들어가면서 더욱 단단히 고정되었다.

그 줄을 잡고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안간힘을 다해 조금씩 기어 올라왔다. 와이어를 타고 이젠 가슴만이 아닌 팔에서도 피가 흐르는데, 클로드는 도중에 그녀가 기운을 잃고 포기하지 않도록 자신의 몸을 뒤로 젖혀 가며 등반을 돕는다.

마지막 정상까지, 자신이 있는 그곳까지 그녀를 끌어 올리는 데 성공한 그의 입에서 다시 오열 같은 숨결이 터졌다.

“잘했어, 잘했어. 가자, 이제 여기서 나가자.”

“응…….”

서로의 뺨을 적신 눈물을 닦아 주고, 두 사람은 곧장 불길 사이를 헤치며 뛰었다.

이제 모험은 끝났다. 집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화마는 두 사람에게 쉽사리 탈출로를 내어 주지 않았으나 모험을 끝마친 둘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지 못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한 손에는 태리의 손을 다른 손에는 성검을 잡은 클로드가 불길 속에서 푸른 검을 발검했다. 고열과 연기가 습격하는 길에서 성검은 마침내 그것이 가진 소생의 힘을 처음으로 떨쳤다.

아직 아물지 못한 가슴팍의 성흔에서 여전히 피가 새어 나왔지만 그에게 검을 쥘 수 있는 자격을 허용한다. 소생하는 성검은 화염의 파동 속에서도 두 사람의 지친 몸을 소생시키고, 또 소생시켜 가며 그들이 빠져나갈 길을 찾을 수 있을 때까지 보호해 주었다.

그리하여 비로소 불길 밖으로 안전한 첫발을 내딛게 되었을 때 태리는 머리를 헝클어트리는 강풍을 쐬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사라져 버린 그 모든 것들에 대한 공백을 채우듯 세찬 바람이 불어닥친다.

바람은 그들에게로 달려오는 수많은 사람들의 걱정과 안도로 뒤섞인 울음바다를 누비며, 아직 정신이 멍한 그녀의 귓가에 감각을 일깨웠다. 이제 다 끝났다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어디를 어떻게 다친 줄도 모른 채 무시하고 있었던 찌릿한 통증도 뒤늦게 찾아왔다.

그리고 그제야…… 실감이 났다.

‘살아 있구나.’

살아 있으니 이렇게 추운 것이다. 살아 있으니 이리 아프고 살아 있기 때문에 찬바람 앞에 이토록 눈가가 시리다.

동이 트기 시작하는 새벽하늘이 오래된 이야기의 엔딩을 암시하는 것처럼 어둠을 잘라 먹으며 머리 위를 내리쬐었다. 점점 밝아지기 시작하는 그 빛을 태리는 깜빡이는 눈으로 한참이나 응시하다가 눈꺼풀을 내렸다.

정말 다 끝났어.

THE END. 모니터 속의 선명한 글자를 새기며 그녀는 가슴속에 있던 마지막 돌덩이를 치웠다.

그러자 다시 바람이 불었고 이번에는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좀 자야겠다는 생각도.

너무 긴 하루였다.

* * *

마법이 실패했다.

딸기가 터져 앞섶에 빨간 과즙이 튀고 코로 달콤한 냄새가 퍼진다.

“아, 이런…….”

이번에는 또 무엇이 문제였지. 주문에 실수가 있었나. 아니면 식을 잘못 짰나. 설마 또 멋대로 이상한 힘이 튀어나왔나. 손쓸 수 없게 되어 버린 옷은 그냥 내버려 두고 클로드는 헝겊으로 목덜미와 뺨에 묻은 과즙을 닦았다. 벌써 몇 번째인지 이러다가 몸에 딸기 냄새가 밸 지경이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소질이 없을 수가 있소?”

“진짜 거의 다 됐는데…….”

“그냥 이렇게, 요렇게 하면 금방 되는 것을! 쯧쯧.”

“그러니까 나는 당신네들처럼 타고난 마법사가 아니라서 그렇게 빨리 못 익힌다고.”

“신성력을 쓰지 말고 마력을 쓰라니까. 노력을 하시오, 노력을!”

“아니, 그러니까 노력하는데도 잘 안 되는 걸 어떡해!”

계속되는 핍박에 클로드가 참다 못해 폭발했다. 누구는 지금 잘하고 싶지 않아서 이러는 줄 아나. 오늘 아침부터 낮까지 터트린 딸기만 해도 지금 서너 박스를 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반항 따위 엄격한 스승 앞에선 씨알도 먹히지 않는 어리광이었다.

“참고 하시오! 여기서 살려면 참고 해! 흔한 합체 마법 하나도 제대로 못 쓰는 남자를 우리 공주님이 어떻게 데리고 사신단 말이오? 이 나라에 마법 잘 부리는 젊은 남자가 한둘인 줄 아나!”

“……젠장. 한다, 해. 하면 될 거 아냐.”

결국엔 본전도 못 찾고 다시 연습생 신세. 꿍얼거리는 학생 앞에 다시 딸기 여섯 알과 얼음 한 컵이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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