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0화 (180/186)

180

“그래, 너에게 아가사의 손톱이 있었지. 그 여자, 정의를 구현한다며 저울을 들고 남을 심판하기를 즐기는 이였다. 너희들에게 열렬히 추앙받아서인지 남 일에 간섭하기도 참 좋아했어.” 

“으윽……!”

“해서 너의 신이 판단하기에 나는 어떻던가. 저주를 내리고도 풀어 주지 않으니 올바르지 않은 악신은 그 손으로 처단하라고 하던가.”

검의 손잡이에 의지해 간신히 버티고 있는 클로드는 어떠한 대답도, 하다못해 짧은 신음소리조차도 내지 않고 삼켰다.

시답잖은 반항 같은 건 아니었다. 그저 태리가 하고 있을 일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던 것뿐.

어마어마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소리를 참는 인간의 의지에 오기를 느꼈는지 드래곤은 움켜쥔 손을 더욱 비좁게 오므렸다. 갈고리처럼 뾰족하게 휜 발톱이 클로드의 흉갑을 으스러뜨리고 심장 부근의 살 속을 조금 밀고 들어갔다.

“으윽……!”

살을 파고드는 손톱. 그것만큼은 도저히 클로드도 참을 수 없었다.

정신이 그대로 나가 버릴 듯한 고통이었다. 신의 손톱이 그의 가슴속을 무자비하게 파고들고 있다.

어렸을 적 그는 형의 어깨뼈 아래에서 오래된 흉터 자국을 본 적이 있었다. 갓난아이였을 당시에 그의 형은 죽을 고비를 넘긴 적이 있었다고 했었는데 그때 여신 아가사가 그를 시험해 보며 남겼던 고통의 흔적이라고 했다.

그것이 바로 신이 다녀갔다는 증거인 성흔.

하지만 지금 클로드가 당하고 있는 고통은 그따위 시험 같은 것도, 성흔을 입는 것도 아니다. 그저 죽이려는 것이다. 형처럼 살아남는다면 이 고통은 흉터로 남아 성흔이 되겠으나 그것이 아니라면 오직 죽음뿐이었다.

살아야 해. 난 살아서 반드시……. 클로드는 벗어나기 위해서 발버둥 쳤다. 이를 악물고 전신을 뒤틀어 가며 가진 힘을 쏟아붓는다.

그러나 서서히 움직임이 뜸해지고 느려지더니 잠시 후에는 겨우 팔다리만 들썩일 정도로 저항이 잦아들었다.

힘이 부족해서? 그것도 맞았지만 결정적으로 그의 몸이 얼어붙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장을 파고든 손톱을 따라 냉기가 스며들면서 혈관이 얼고 피의 흐름이 멈추려 한다.

배 속의 장기들이 냉각되고 신경이 삐걱거리듯 감각이 둔해지더니 희미하게 뛰던 가슴 속의 맥박마저 주춤해졌다. 그리고 그것까지 멈추고 나면 그의 알량한 목숨도 거기서 끝난다.

마지막까지도 얼지 않았던 클로드의 안구가 드래곤의 뒤편으로 스륵 넘어갔다.

눈동자의 움직임?

이 상황에서 다른 곳에 한눈을 팔다니.

그로부터 드래곤은 느닷없는 의아함을 느꼈다. 이어서 어디선가 뜨거움이 확 치밀더니 건물 내부에서 펑펑 하고 연이어서 터지는 대폭발음이 울린다.

그것에 살갗을 덴 듯 화들짝 놀란 드래곤이 움켜쥔 손을 푼 순간 클로드의 가슴에서 피가 솟구치면서 그의 몸이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힘을 잃고 쓰러졌다.

다시 천천히 퍼져 나가는 열기에 몸이 녹았지만 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등에 불길이 옮겨 붙어 비늘이 벗겨진 드래곤의 거대한 몸집이 서서히 작아지고 줄어들어 왜소한 소년의 등으로 변하는 것까지 모조리 지켜보고 나서야 의식을 잃고 기절했다.

그가 그토록 염원했던 한 번이 온전히 성공한 순간이었다.

* * *

뇌전이 내리꽂히듯 도서관이 우르릉 흔들리기 시작했다. 심상찮은 낌새를 보이던 건물은 안에서 거대한 폭발이 연속적으로 터지자, 그나마 남아 있었던 유리창들이 한꺼번에 분쇄되면서 바깥으로 동시에 유리 가루가 팍 터져 나왔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너머로 불꽃이 넘실거리는 광경을 목격했다.

불은 덩치를 키우면서 절대 녹지 않을 것처럼 굳건했던 얼음을 조금씩 깎아 나가더니, 잠시 후 홱 뒤집어지는 것처럼 도로 그 얼음에 의해 이지러지고 만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는 저항군처럼 도로 불씨를 되살려 꾸역꾸역 냉기를 몰아내고 넓은 화염을 도서관 전체에 기어코 펼쳐 냈다.

그리하여 마치 시시각각 달라지는 변덕스러운 날씨처럼 도서관은 아주 잠깐 사이에도 냉동되었다가 또 곧장 열에 의해 녹기를 반복했다.

들어 올리려는 자와 찍어 누르려는 자 간의 대결처럼 서로 다른 정반대의 기운이 만만치 않은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씩, 아주 조금씩 피부를 감싼 한기가 약해지는 것이 느껴질 때면 사람들은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를 알게 되었다. 오랫동안 이자리스를 에워싸던 그 냉혹한 겨울이 사라지려 하고 있다는 걸. 그것을 물리쳐 내려 하는 것은 공주였고 그녀는 그 치열한 싸움에서 스스로를 불태워 가며 버티고 있었다.

‘여기서 더는…….’

아무리 탄환을 매개로 발동시켰다지만 1서클의 화염 계열 마법 파이어볼을 궁극에 가까운 수준까지 증폭하여 끌어 올린 뒤, 무려 탄환의 개수만큼이나 터트렸다.

한계에 가까운 마법 운용으로 인해 자신의 정신력과 체력이 모두 고갈되었다는 것을 태리는 직감했다.

여기서 나는 얼마나 더 힘을 쏟아부을 수 있을까. 내 손으로 끝까지 마무리 지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당장은 이 얼음에 밀려나지 않고 팽팽한 대립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그녀는 손안에 남아 있는 마지막 탄환 하나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이제 남은 것은 이것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앞에는 얼음이 뚝뚝 떨어지는 긴 낫을 목덜미에 들이대고 있는 빌이 눈물을 흘리며 서 있었다.

“왜! 왜!”

불길에 성대가 말라비틀어진 것처럼 잔뜩 상한 목소리였다.

“정말 간직하려는 것뿐이었어. 소중한 걸 전부 잃었으니까, 혼자만 남았으니까 너무 외로워서…… 너무 외로워서 그랬다고……!”

어떻게 이것마저 전부 앗아 가려 할 수 있어?

피가 방울방울 맺힌 듯한 울음에 태리는 고요히 저녁 그늘 앞에 수그러지는 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외로워서.

알지, 그 질병 같은 외로움.

상실을 겪은 사람들은 모두 마음속에 그런 희귀한 병을 앓고 있다. 살짝 스치기만 해도 고통스러워서 건드리지도, 내버리지도 못하고 마음 한 자리에 평생 얹어 두고 사는.

이 소년이라고 해서 어째서 그 미련을 놓아 보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도 못 한 것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그 외로움이 떨쳐지지가 않아서. 알면서도 포기하지 못했던 거였다.

얼마나 마음 아팠니. 혼자 남았을 때…… 얼마나 외롭고 쓸쓸했니.

그녀 또한 이 순간 소년을 잃고자 하니 속이 헐 것처럼 지독히도 슬프다.

비틀거리는 손을 뻗어 태리는 제 목에 드리워진 날을 잡았다. 손을 덴 순간 입술이 파랗게 변할 정도의 오한이 팔다리로 퍼졌지만, 반대편 손안에서 그녀의 마나를 머금고 마법의 말이 덧씌워진 탄환이 어떻게든 몸이 완전히 얼어 버리는 것만은 막아 내고 있다.

이마저도 코어 안의 마나가 동나면 끝.

내리깔린 가느다란 눈매 아래에 눈물이 고였다. 눈물방울은 피부로 침범하는 냉기에 뺨으로 굴러떨어지지 못하고 작은 구슬로 변해 속눈썹에 매달린다. 슬픔이 빚어낸 투명한 구슬이었다. 태리는 눈가에 매달린 그 무게들을 느끼며, 이곳에서 산 채로 태워지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빌의 기억을 완전히 전소시키고야 말겠다고 결심했다.

“내가 기억할게.”

물기로 젖어 든 빌의 눈동자가 출렁거리듯 흔들렸다.

“내가 대신 기억할게. 외로웠던 너를 잊지 않고 영원히…… 영원히 너를…….”

말끝이 사그라져 지워지는 것처럼 귓속으로 들어온 순간 흐려지며 삼켜졌다. 그리고 태리는 나머지 손으로도 소년의 낫을 붙잡았다.

그걸 막았어야 했는데. 그 순간에 망설이지 말았어야 했는데. 죽이기로 했으니까 죽였어야 했는데.

그런데 기억하겠다는 그 한마디.

그 한마디에 빌은 태리의 행동을 막지 못했다.

달그락.

기어이 그 소리가 울렸다. 운명의 주사위가 판 위로 구르는 것처럼 달그락, 하는 추락 소리.

탄환이 그들의 발아래로 떨어지고, 떨어진 순간 여러 조각으로 갈라지며 귓속에 엄청난 이명을 일으켰다.

순수하면서도 뜨거운 에너지가 확 뻗어 나간다. 앞서 먼저 터져 나갔던 비슷한 형태의 불꽃들은 그것이 마지막 점화 신호라는 것을 알아들었는지, 탄환이 깨진 순간 서로 떨어져 있던 자리에서 스멀스멀 움직여 손을 잡고 뭉쳐져 거대한 화마로 재탄생했다.

불꽃이 얼음을 깨트리고 사방을 점령해 나간다.

도서관이 마침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순식간에 이루어질 수 있는지 누군가는 큰 화재에 휩싸인 풍경 앞에서 그리 한탄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것은 소년이 공주의 힘없고 가느다란 손가락에 붙잡혀 낫을 제때에 휘두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뒷골이 쭈뼛 설 만큼의 혹한은 불꽃을 진압할 수 있었던 유일한 기회를 놓쳤다.

더는 몰아낼 적수가 없자 불은 마음 놓고 제 영역을 확보해 나갔다. 바닥과 기물을 감싸 핥고, 널려 있는 책과 책장들을 땔감으로 삼으며 불기둥을 만들어 낸다.

불에 탄 집기들이 기울어짐을 버티다 못해 쓰러졌고 아예 주저앉아 버리며 무너지는 것들도 있었다.

빌과 태리의 가운데로 여러 개의 기둥이 쓰러지면서 땅이 함몰된 구덩이가 그 자리에 움푹 파였다. 버틸 기력이 없었던 태리는 서 있던 자세에서 균형을 잃었고 발밑이 빠지는 느낌과 함께 구덩이 속으로 떨어져 버렸다.

캄캄하다. 뜨겁고 어두웠다.

방금 전 그녀가 서 있던 자리를 고열의 불길이 휩쓸었다. 돌가루가 섞인 비가 부스스하게 이마 위로 떨어졌다.

어둠 속, 떨어져 갇힌 채로 태리는 무너져 가고 있는 세상을 올려다보았다.

이것은 파괴의 극치였다. 접합된 부위를 모조리 끊어 먹고,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들을 불로 지져 무엇 하나도 남김없이 잿더미로 만들고 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사소한 틈, 별것 아닌 구석구석까지 몰아닥치며 빌의 기억들을 지워 나간다.

그토록 소중했었던 추억이 그리는 인생 최후의 그림이었다.

처음 그것을 보고 빌이 떠올린 것은 절규였다. 비참한 절규. 끝없는 절규. 그다음에는 손가락 사이로 모래처럼 빠져나가는 그것들 사이에서 열없이 허우적거리며 옛것을 반추하는 일이었다.

정에 고팠으나, 정이 무엇인지도 고픔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어느 날에 누군가가 제게 주었던 관심을. 친구라는 관계에 우정이라는 이름을.

처음 만난 날이 어땠더라. 별이 수놓아진 까만 밤하늘에…… 까만 밤하늘 아래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안 돼, 안 돼! 그는 다시 황급히 머릿속을 뒤졌다. 내 친구가 좋아하는 것은 뭐였지? 아, 그래, 고양이와 책 그리고 푸른 잎이 달린 싱싱한 오렌지. 싫어하는 것. 싫어했던 것은 달리기, 금세 녹아 버리는 눈, 물건을 숨 막히도록 꽁꽁 묶어 버린 불필요한 포장지.

그리고.

그리고……

‘내가 왜 여기에 있지?’

그리고 그다음에는 아무것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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