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9화 (179/186)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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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벽으로 붙은 클로드는 나오자마자 속수무책으로 하강해 쭈욱 미끄러졌다. 빙판처럼 얼어 버린 벽에 칼을 박아 긁으며 추락의 속도를 늦췄지만 뼛속까지 파고드는 추위에 손등이 즉각 얼어붙을 것처럼 굳는다.

거기에 강한 돌풍이 도서관 일대를 소용돌이치고 있어서 버티려 해도 표면이 미끄러워서 쉽지가 않았다. 내려오는 중간에 바깥으로 튀어나온 구조물을 잡고 가까스로 추락의 속도를 줄여 안전하게 착지하는 데 겨우 성공한다. 후, 입김을 뱉은 그가 머리를 치켜들고 꼭대기를 올려다보았다.

그곳에 세상을 굽어보는 것처럼 날고 있는 드래곤이 있었다.

‘한 번만 막으면 돼, 단 한 번만.’

그는 신성력을 조금도 다루지 못한다. 하지만 검기는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기사의 의지에 의해 단련되는 것이다. 그리고 클로드는 이미 뛰어난 소드 마스터였다.

신성한 칼날 위로 푸른 오러가 휘감기며 검기가 솟구쳐 올랐다. 신이 선사하는 태양처럼 눈부신 흰빛은 아니나 대장간에서 내리치는 망치질에 막 태어난 불꽃처럼 선명한 푸르름이다. 그것이 주변을 뒤덮은 어두운 냉기를 약간이나마 밀어내면서 손등을 얼리고 팔까지 쇄도하던 동상의 기운을 막아 냈다.

클로드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붉은 깃발을 주워 자신이 서 있는 지점에 꽂아 박았다.

그것은 투석기의 바위가 떨어질 지점을 표시하는 깃발로, 원거리에서 투석기를 조준하고 있는 아군에게 이 지점으로 포격할 것을 지시하는 표식이었다.

갑자기 몰아닥친 한파에 휘말리지 않기 현재 모두가 일정 반경 바깥으로 물러나 있는 상태였지만, 그렇다고 그가 세운 깃발의 의미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거리가 멀어진 것은 아니었다.

잠시 후, 반대편에서 그와 똑같은 그림의 깃발이 펄럭이더니 바위를 실은 투석기의 지렛대가 끼익하고 올라가는 소리가 울렸다.

투웅!

주먹으로 파도를 세차게 내려친 듯한 파동과 함께 바위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온다. 당연히 드래곤에게는 닿지도 못할 사거리였다. 거리도 멀고 높이도 까마득하게 높다. 그러나 허공으로 등반하듯이 뛰어오르려는 자에게는 아주 유효한 발판 역할을 해 줄 수 있었다.

날아오는 즉시 표면이 하얗게 변하면서 얼어붙는 돌덩어리 위를 클로드가 밟아서 위로 뛰어올랐다. 그의 움직임을 따라 연이어서 바위가 퉁, 퉁 소리를 울리며 일정한 간격으로 연거푸 쏘아진다. 마치 허공에 줄이 없는 구름 계단을 만들 듯이 클로드는 그것들에 맞춰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위로 움직였다.

한 번이라도 주춤하면 추락하는 길이었다. 단숨에, 한 번에 올라가야만 한다.

곧 그의 속도에 맞추기보단 능력에 맡기기로 한 것인지 잠시 후 하나가 아닌 여러 개의 투석기에서 동시에 여러 개의 돌들을 던져 쏘아 올린다. 허공에 상당히 많은 수의 발판이 생겼고 그중에서 적당한 위치와 높이의 것을 클로드가 스스로 고를 수 있도록 도왔다.

그런 방식은 자칫하다간 날아오는 돌과 충돌하는 불상사를 일으킬 수도 있었지만, 클로드는 리듬감 있게 밟으며 허공을 도약하다가 경로를 막는 돌이 나타나면 일격에 검기를 날려 바위를 양단 내어 버렸다.

허공으로 나는 돌들을 밟고 천상까지 쳐들어오는 인간 기사를 신의 분노 어린 눈동자가 주시했다.

순식간에 도서관의 정상까지 올라온 그를 마주한 드래곤은 상대할 가치조차도 없다는 듯이 입을 벌렸다. 턱이 바짝 내려지고 폐가 부풀듯 가슴이 팽팽해진다. 당연히 브레스를 뿜어내려는 거였다.

“……!”

그러나 그 순간 푸른 불씨를 던져 넣듯 얇은 초승달 같은 검기가 날아와 혀 위에서 터졌다.

따끔한 감각에 드래곤은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중력에 의해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가 퍼 올려지는 돌덩어리를 밟고 또 금세 공중에 나타난 녀석은 그때부터 죽을 각오라도 한 듯 드래곤의 주둥아리만을 집중적으로 노리고 들어왔다.

인중을 베려고도 했고, 틈새를 노려 검을 밀어 넣는 시도를 하기도 했으며, 한 번은 윗니를 제 어깨로 지탱한 채 거대한 입 속으로 뛰어 들어오기도 했다.

그런다고 해서 인간이 감히 신과의 싸움에서 승기를 잡는 일 따위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도 그는 무리를 하면서까지 끊임없이 입 주변을 공격했다.

그 바람에 드래곤은 내내 행동을 방해받아 한 차례도 브레스를 뱉어 내지 못했다.

“정말로 네놈만은 반드시 죽여 주마!”

결국 그를 상대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접고 드래곤은 지면이 좁은 도서관의 지붕 위에 내려섰다. 맹렬하게 발을 내리찍어 클로드를 몰이하듯이 낭떠러지 끝으로 밀쳐 낸다.

안 밀리겠다고 정면으로 받아칠 수조차 없는 힘의 세기였다. 빠르게 몸을 굴러 범위를 벗어나도 돌아서면 바로 거구의 손아귀가 눈앞에 당도해 있었다.

그러므로 클로드는 회피에 많은 힘을 쏟지 않는다. 피할 수 있는 것은 피하고 막을 수 있는 것은 막지만 드래곤이 밀치는 대로 큰 저항 없이 가장자리까지 밀려났다. 어차피 그에게는 단 한 번의 기회만 있으면 됐다.

분풀이하듯 그를 궁지로 몰아넣은 드래곤은 결국 주변을 얼리겠다는 계획을 포기하고 그 한 사람에게로 주둥이를 틀었다.

저것이 무엇을 뜻하는 행동인지 클로드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줄곧 이 순간을 고대하기도 했었고. 전처럼 숨을 잔뜩 끌어모아 내뱉는 강력한 브레스는 아니나 위력이 줄어들어도 브레스는 브레스. 정면으로 맞고 나면 그는 생사를 장담하기 어려워진다.

신의 방패라도 있지 않은 이상 막을 수 없을 터. 하지만 성기사가 아닌 삶을 살게 된 마검사는 이제 다른 방식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피해 흡수라 했던가.’

폐성에서 처음 사용했었던 그의 새로운 반격 기술을 가리켜 태리는 그것이 마검사들이 주로 사용하는 ‘피해 흡수’라고 가르쳐 주었었다.

선제공격을 허용한 뒤 그로부터 가해지는 피해를 버틸 수만 있다면 그것을 축적했다가 반격에 이용하는 기술이다. 다시 말해, 적의 힘을 자신의 검 안에 모았다가 역으로 반사시킬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 내게 공격해라. 네가 가진 힘을 나에게 쏘아.’

그렇다는 것은 즉 그가 바벨의 힘을 단 한 번이지만 사용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인간의 힘으로는 신을 무찌를 수도, 죽일 수도 없으나 신의 힘은 분명히 신에게 상해를 입힌다. 그것이 부메랑처럼 되돌아온 자기 자신의 힘일지라도.

드래곤의 입가에 고이는 검은 연기를 보며 클로드는 브레스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방어에 최적화된 자세와 구도를 잡는다.

그는 더 이상 기사도 아니었고 기사로서 보낸 모든 인생을 거짓으로 치부당했으나 그 세월만큼은 허투루 보내지는 않았다. 축적되어 쌓아 온 시간과 경험만은 가짜가 아니다.

이윽고 눈앞을 시커먼 흑연이 덮치면서 눈 회오리 속에 갇히는 듯한 냉기가 작렬했다.

검을 일자로 세워 방어하는 검사에게 드래곤은 흔한 속임수조차 부리지 않고 올곧게 일직선으로 입김을 뿜어낸다. 브레스의 흔적은 건물 꼭대기에 두꺼운 얼음 골짜기를 만들어 낼 정도로 오직 그 한 사람을 향해서만 퍼부어졌다.

끝났다. 드래곤이 녀석은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그러나 잠시 후 그 장벽을 깨고 얼음 속에서 희고 깨끗한 얼굴이 솟구치듯이 번쩍하고 튀어나왔다.

커다랗게 떠진 눈으로 드래곤이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은 어째선지 크기가 자란 것처럼 비대해진 검이었다. 분명 저렇게까지 크진 않았는데 마치 무언가를 잡아먹고 순식간에 몸집을 불린 것처럼 검기가 좌우상하로 모두 번져 거대해졌다.

그리고 이어서 본 것은 어깨와 등, 팔다리에서 하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클로드의 몸이었다. 용의 숨결을 바로 코앞에서 뒤집어썼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저걸 맞고도 아직 죽지 않은 것이 대단했는데 그런 녀석이 갑자기 검을 짊어지듯이 천천히 위로 들어 올렸다.

‘……한 번만.’

신의 힘을 흡수한 검은 철근처럼 무겁고 살을 에듯 시리다. 두 다리로 탄탄하게 바닥을 지탱하며 버텼으나 검에 담긴 상상 이상의 힘 아래에 클로드는 당장이라도 압사당할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딱 한 번만.’

이 무게를 짊어진 채 두 번 베어 내는 짓은 하지 못한다. 단 한 번이다. 그에게 허용된 휘두름은 단 한 번.

클로드는 가슴속에서 끓어 넘치는 힘을 폭발적으로 터트리며 어깨를 움직였다.

눈보라로 시야가 가려졌으나 어디에 드래곤의 심장이 있고 다리가 있는지 지나가는 검의 궤적이 이미 알고 있다.

고통을 무시하고 대각선으로 내리그은 검이 천둥을 찢는 듯한 소리를 퍼트렸다. 그토록 견고했던 비늘을 깨트리고 그렇게나 질겼던 근육과 신경들을 가르고 지나간다. 그리고 믿을 수 없게도 드래곤의 왼쪽 어깨에서부터 오른쪽 옆구리까지 이어지는 깊은 피의 고랑을 파 놓았다.

“어떻게……?”

드래곤은 외마디의 비명을 지르기보단 이치가 어긋나는 것을 보았다는 듯 갈려 버린 자신의 몸통을 내려 보았다가, 푸른 검날이 제 살 속으로 파고들어 가 수축하는 것을 느끼며 클로드가 무슨 짓을 했는지를 깨달았다.

“네가, 나의 힘을.”

“예전에도 나한테 한 번 당했을 텐데. 금세 잊었나 보지.”

인간은 결코 신을 찌를 수 없건만. 그러나 이 기사는 그것을 해내고야 만다. 거기에 그가 들고 있는 것은 틀림없이 그만한 힘을 감당할 수 있는 독보적인 무기였다.

제 가슴을 뚫은 검을 다시 힐끔 내려다본 드래곤은 그것을 뽑아내지 않고 거대한 앞발을 뻗어 클로드를 움켜잡더니, 건물의 꼭대기 바닥에 그대로 처박았다.

콰앙!

그 한 번으로 지붕이 뚫렸다. 드래곤이 지나간 너비만큼 천장에는 구멍이 생겼고 그들은 곧장 안으로 떨어진다.

그러고도 또 그 아래를 뚫고, 또 그 아래층을 뚫고 내려가며 둘은 그대로 끝없이 바닥을 향해 떨어졌다. 마치 이대로 지하까지 뚫고 들어가려는 것처럼 드래곤은 맹렬한 속도로 그를 짓누르며 추락하고 있었다.

거대한 손아귀에 잡힌 클로드는 등허리로 퍼지는 엄청난 격통을 그대로 견뎌야만 했다.

바닥을 부수고, 또 부수고, 또 부숴 가며 이어지던 낙하는 도서관의 가장 최하층에 다다라서야 겨우 멈춰 섰다.

그 자리에 분화구와도 같은 거대한 공간이 깊숙하게 파였다. 그 한가운데에 처박힌 클로드의 가슴 앞으로 드래곤의 붉은 눈동자가 이글이글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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