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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질이 벗겨지는 것처럼 모서리에서부터 깎인 덩어리들이 위협적으로 아래를 향해 떨어졌다.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그러한 위협은 더욱 빈번해진다.
벽을 타고 오르는 태리의 머리 바로 위로도 바위가 굴러왔다.
그녀는 그것들을 향해 총을 발사한다. 탄환에 의해 산산조각 난 바위는 작은 돌조각과 가루로 잘게 부서져 이마 위에서 흩어져 사라졌다.
타점에 조금이라도 실수가 있었더라면 머리통이 깨져 추락사했을 위기였다. 그러나 살아남았다고 자축할 여유 같은 건 없었다.
잡고 있던 벽을 놓고 공중으로 뛴 클로드가 바윗덩어리를 힘껏 밟으며 그 반동으로 높이까지 치솟아 오른다.
왼손의 철퇴가 기둥을 향해 휘둘러지고, 오른손의 대검이 건물의 철근을 으깼다.
무게감이 상당한 두 개의 무기를 양손에 쥐고도 엄청난 힘과 속도를 발휘한다.
그가 휘몰아치며 파괴를 지속해 나가자 바로 섰던 건물이 다시 기우뚱하며 비틀거렸다.
물론 막대한 피해를 준 것만큼이나 그의 손도 뼈가 으스러질 것처럼 저렸다. 하지만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더욱 강하게 부딪친다. 그러면 태리가 깨진 창문으로 내부와 외부를 신속하게 들고 나오며 건물의 경추를 끊어 놓듯 중요 부위마다 도끼를 내리쳐 날려 버렸다.
이번에도 도서관의 상단부 좌측 옆구리가 터지면서 그 밖으로 태리가 튕겨진 총알처럼 날렵하게 튀어나왔다. 낙하하는 것조차도 두려워하지 않고 맨몸으로 뛰어내리더니 곧 손목에서 발사된 로프를 삐죽 튀어나온 철근에 감아 단숨에 다시 위로 쏘아져 올라온다.
도서관의 꼭대기에 올라서 있는 드래곤은 무수하게 찍히는 그 공격들을 떨쳐 내려 했지만 그때마다 매번 절묘한 타이밍에 맞춰 날아온 화살이 그의 피부 어딘가를 치지직 하며 지졌다.
“이놈들!”
맹렬한 살인 욕구가 자그마한 인간들에게로 향했다. 그러나 태리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는 다시금 망설이고 말았다.
하나뿐인 나의 친구, 실리의 유일한 딸.
그것이 매번 그의 발목을 붙잡는다.
결코 분출할 수 없는 분노를 대신해서 화풀이하듯 그는 흘러내리는 바윗덩어리 하나를 발톱으로 움켜쥐어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실어 이즈에게로 내던졌다.
“……!”
날아오던 화살을 바위가 직선 경로에서 잡아먹고 그 너머에 있던 명사수에게로 직격했다.
맞은 직후에는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했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피하지도 못했던 이즈는 걸레짝이 되어 허공으로 밀렸다가 땅으로 처박혔다.
떨어지고 나서야 고통스러운 신음이 터졌다. 장기 하나가 터진 것처럼 생생한 통증이 사지로 퍼져 나갔다. 무엇보다 어깨가 말을 듣질 않았다. 눈을 부릅뜨고 고개를 드니 활을 잡은 한쪽 팔이 반대로 꺾여 있었다.
팔이 꺾였다는 것은 궁수에게 있어서 전투 능력의 상실과도 같은 것. 으아악 소리를 지르는 이즈에게로 부상자들의 치료를 도맡던 미리엘과 그의 사제들이 황급히 달려와 부축하며 둘러쌌다.
그들은 곧장 회복 기도를 펼칠 준비를 한다. 그러나 그 순간 이즈의 눈에 들어온 것은 사제들의 자비로운 손길이 아니었다.
고통으로 인해 핏줄이 터져 버린 아름다운 엘프의 눈동자는 미리엘의 등 뒤에 꽂혀 있었다. 천에 둘둘 말려 업혀 있는 듯한 성검을 그가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그래, 그거야. 시발……. 이제 보니까 제일 중요한 게 없었잖아.
“야, 너, 그거 내놔.”
“치료를―”
“시발, 치료 같은 거 필요 없으니까 그거 당장 내놓으라고!”
그거라니? 미리엘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멈칫한 사이 그 잠깐조차도 기다리지 못한 이즈는 고통을 악물며 몸을 일으킨 뒤, 우악스럽게 검을 뺏어서 그나마 성한 다른 쪽 팔로 있는 힘껏 클로드에게로 던졌다.
기사한테는 검이 있어야지. 아무리 뛰어나도, 아무리 능숙해도 기사가 다루는 무기는 오로지 검이다.
광채를 터트린 성검이 바람을 가르고 직선으로 날아갔고 클로드는 그것을 정확하게 잡아냈다. 그가 자신에게 익숙한 그 검을 손에 쥔 순간 마치 계시라도 내려지는 것처럼 칼끝이 번쩍였다.
‘방금 그것은?’
깜짝 놀란 미리엘의 시선이 위로 향한다. 성검은 얻은 클로드는 눈 깜짝할 새에 다시 잔해를 밟고 뛰어오르고 있었다.
드래곤도 직감적으로 어떤 낌새를 느낀 것인지 갑자기 등줄기의 가시들을 모조리 곤두세우더니 주변의 공기를 대량으로 흡수하기 시작했다.
송곳니가 드러나는 입가로 그을음 같은 검은 냉기가 흘렀다. 별안간 발생한 강풍에 사람들은 끌려가지 않기 위해 바닥에 바짝 몸을 엎드리고 버텨야만 했다.
까닥 잘못했다간 급류에 휘말려 떠내려가듯이 손쓸 수도 없이 어디론가 날아가 버릴 터였다.
드래곤으로부터 가장 가깝게 붙어 있던 태리와 클로드도 바람에 날려 떨어지기 직전에 재빨리 건물 안으로 떨어져 피신했다.
안은 물론 엉망진창으로 으스러지고 망가진 상태였다. 제멋대로 굴러다니는 물건들과 터진 기둥의 잔해 사이를 정신없이 구른 두 사람은 계단과 계단을 잇는 판판한 층계참에서 가까스로 추락을 멈췄다.
그리고 거의 간발의 차로 직후에 건물 꼭대기에서부터 차가운 브레스가 뿜어져 나왔다.
용의 입김으로부터 나온 검은 냉기들은 건물 사이사이로 스며들어 가 살점이 뜯겨 나간 것처럼 구멍이 난 부위에 얼음을 채우고, 부러진 철골을 대신하여 얼음 기둥을 만들어 흔들림을 고정시킨다. 망가지려던 것이 또 한 번 그 상태에서 멈췄다.
뿐만 아니라 내부로까지 냉기가 번지더니 두 사람이 디디고 있는 층계참의 바닥에까지 스멀스멀 서리가 끼기 시작했다. 태리는 화염을 뜻하는 마법식을 재빨리 바닥에 그려 그 부분만은 어는 것을 막았다.
“혹한이 불어닥친 것처럼 엄청난 추위입니다.”
너덜너덜하게 뜯긴 창틀 너머로 아래를 내려다본 클로드가 낮은 신음을 흘리며 바깥의 상황을 전했다.
드래곤이 뱉어 낸 브레스는 도서관을 중심으로 일정한 반경 이내의 모든 것들에 영향을 끼쳤다.
그 여파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성기사와 마법사들은 일찍부터 서둘러 물러났으나, 몇몇 사람들은 제때에 피하지 못해서 그대로 얼어 버렸고, 주변의 풀이나 나무, 흙, 심지어 날아다니던 날벌레들마저 허공에서 얼어붙었다.
드래곤의 입김에 닿은 모든 것들이 그 순간에 급속 냉동되어 세상이 그 자리에 멈춰 서 버린 듯한 광경이었다.
‘유일한 대항은 불로 녹이는 것뿐인데.’
그러나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은 마법사뿐. 태리는 클로드를 따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꽁꽁 얼어 버린 세상은 혼란스러웠고 재앙이 닥쳤던 과거의 그날만큼이나 어지러워졌다.
마법사들은 얼마 남지 않은 마력까지 모두 쥐어짜며 최선을 다해 불을 소환하려 애쓰고 있지만 폭풍 앞의 등불처럼 버거워 보였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는 반면 드래곤은 몇 번이고 브레스를 뿜어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가진 마나를 전부 다 소모한다면…….’
태리는 명치에 손을 올려 남아 있는 마나의 양을 가늠했다. 이걸 다 쓰면 혼절하겠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해 볼 만한 수준의 양까지는 될 것 같았다. 그녀는 즉각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화염 마법을 떠올려 보았다.
가장 강력하고 확실하기로는 단연 메테오 스톰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소환한다면 이자리스를 아예 통째로 불태우게 될 것이다. 또한 그만한 상위 마법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긴 주문과 시간이 필요했다.
‘불가능해.’
즉각 발동시킬 수 있는 하위 계열의 화염 마법이면서 동시에 강력한 화기를 분출시킬 수 있어야 한다. 목표는 도서관의 완전 전소였으니.
‘그러려면 단순한 마법을 증폭시킬 수 있어야 하는데 내 능력으로는 안 되지. 그래도 지금은 매개물이 있으니까 시도할 만한 가치가 있어.’
막강한 주문력을 발휘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능력이 요구되나, 태리는 아직 그만한 대마법사로는 성장하지 못했다. 하지만 언제는 능력이 뛰어나고 재주가 대단해서 클로드와 함께 번번이 죽을 고비를 넘겨 왔던가.
그렇지 않았다.
차분한 표정으로 그녀가 허리춤에 꽂혀 있는 샷건을 뽑아 탄창을 열었다. 그리고 안에 있는 모든 탄환을 털어 냈다. 총 다섯 발이었다.
총알은 하나하나가 화약 가루를 꾹꾹 눌러 담은 막강한 화력을 가진 폭발물이었다. 거기에 자신이 가진 모든 마나를 소모해서 화염 속성을 대폭 강화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녀가 그러한 가정으로 탄환을 한 주먹 안에 꾹 쥐었을 때였다. 바깥 상황을 내내 주시하고 있던 클로드가 그만 나가야 한다고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아니요, 난 나가지 않을래요.”
그러나 태리는 떠나는 것을 거절했다.
“이미 빌이 폭주를 제어할 수 있는 상태를 넘어선 것 같아요. 그러면 숨이 모이는 즉시 브레스를 계속해서 퍼부어 댈 테죠. 당장은 이곳에만 쏘았지만 곧 이자리스 전역으로 향할 거고, 그러면 누구도 그 빙결을 깨지 못해요. 그러니 얼음이 더 견고해지기 전에 이 안에서 승부를 봐야겠어요.”
유일한 해결책은 불로 얼음을 상쇄하는 것이다. 반드시 이 방벽과도 같은 검은 얼음을 불로 녹여야만 한다. 그녀는 그것을 밖이 아닌 안에서 시도해 보겠다고 했다.
“브레스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은 없습니까.”
“없어요. 강제로 입을 다물게 하지 않는 이상.”
그때 다시 하늘이 우르릉거렸다. 누가 설명해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드래곤이 또 한 번의 브레스를 준비 중이라는 것을.
너무 이른 공격에 태리는 얼굴이 어두워진다. 하지만 클로드의 눈빛은 달라졌다. 브레스를 뿜는다면 뿜는 그 순간이 오히려 약점이 드러나는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기사들의 싸움에서도 늘 그러했다. 강력한 공격에 성공해서 상대를 제압했다고 여긴 바로 그때가 그 강력함에 허술함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 성검은……
‘비록 자격은 없지만.’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을 만큼 충분히 예리하고 날카로웠다.
“그렇게 기운 없어 하지 마십시오. 저 한 번의 브레스 정도는 내가 어떻게든 막아 볼 테니까. 그동안 당신은 해야 될 일을 하면 됩니다.”
“무슨…… 소리예요. 우리 최악의 수 같은 건 쓰지 않기로 했잖아요. 희생 같은 거 하지 않기로 했잖아!”
“맞아, 그랬었지. 그런데 한 번의 희생으로 역전의 각이 보일 때면…… 그땐 내가 어떻게든 해 본다고도 말했었잖아.”
그러니까 당신은 이곳에 있어. 이곳에 남아서 당신이 정확히 해야 될 일을 해.
“걱정 마, 죽지 않을게.”
그 부질없는 약속을 마지막으로 클로드는 한겨울로 변해 버린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냉혹한 찬바람이 그를 납치해 가듯이 떠나면서 빈자리를 휭 소리가 날 정도로 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