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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위험에서부터 가까스로 벗어났고, 하나의 위협을 드래곤에게 성공시켰다.
그러나 고작 그 하나만으로 태고의 존재를 제압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다.
반항하던 드래곤은 기울어진 자세를 금세 다시 바로 세웠다. 등허리에 걸린 끈끈한 그물을 떨쳐 내진 못했지만 그러지 않아도 상관없어 보였다. 다소 성가시지만 무시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뜻이었다.
하늘을 선회하듯이 드래곤은 머리의 방향을 바꿔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제게 싸움을 걸어온 도전자들을 명확하게 적으로 구분 짓는 행동이었다.
발톱이 박힌 다리가 쿵, 지면을 울리며 땅 위로 내려섰다. 그저 착지했을 뿐인데 지축이 흔들리면서 커다란 홈이 바닥에 파인다. 광활하고 드넓다고 생각했었던 대서고가 비좁게 느껴졌다.
과연 모두의 상상 속에서 살고 죽었을 법한 그 전설적인 존재다웠다. 자청해 경외하고 싶을 만큼 압도적이고 무릎을 꿇어 다시는 고개를 들고 싶지 않을 만큼 무시무시하며 두렵다.
장난감처럼 작고 연약해 보이는 두 명의 인간을 내려다보며 드래곤은 연기처럼 새어 나오는 서늘한 숨결을 송곳니 사이로 흘렸다. 공간 안의 기온이 갑자기 뚝 떨어졌다.
“나를 막아서고자 한다면 너희 모두 죽이겠다.”
으스스한 음성이 그들에게 죽음을 예언했다. 나약한 소년의 느낌 따위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완연한 신의 경고였다.
두말할 것도 없이 당연히 굴복해야 했지만 태리는 전혀 다른 이야기로 응수했다.
“그래도 나는 널 죽이지 않아.”
두렵지 않은 게 아니다. 공포를 자아내는 안광 앞에서 여전히 등골이 떨렸다. 그래도 그녀는 몇 번이고 되새겨 줄 것처럼 자신의 뜻을 가파르게 마주 세웠다.
“네가 가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해서 널 막아 줄게. 넌 이곳을 빠져나가려면 나와 오랫동안 싸워야 할 거고, 빠져나간다면 빠져나간 그곳에서조차 나를 쓰러트려야 될 거야.”
“감히, 네가!”
지하에서부터 고함을 지른 듯한 살벌한 땅 울림이었다. 그러나 태리는 끝까지 양보하지도 타협하지도 않는다. 더 나아가 명령마저도 서슴지 않았다.
“나는 이 나라의 하나뿐인 공주고 유일한 후계자야. 이자리스는 누구도 아닌 오직 나의 통치 아래에 있고 타국의 간섭도 신의 관여도 통하지 않아. 난 누구에게든 이곳에서의 추방을 명령할 권한이 있고 너 또한 예외가 아니야. 그러니 내 말을 들어. 넌 더 이상 내 나라에서 네 멋대로 행동할 수 없어.”
“나에게 감히……!”
“여기는 내 땅이야!”
용의 주둥아리를 한 번에 다물게 만들어 버리는 또랑또랑한 명령에 클로드의 눈이 놀란 것처럼 커다랗게 뜨였다가 잠시 후 웃음으로 인해 가늘어졌다.
그래, 이런 것이 후계자의 기품이다. 이런 것이 공주이다.
그는 언제나 그녀가 지닌 이 공주로서의 당당함을 무척이나 자랑스럽게 여겼었다.
그리고 내내 타인에게 그 자리를 떠넘길 것처럼 회피해 왔던 그녀는 이제 막 자신의 권리를 제대로 행사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정말 역사적인 날이군. 드래곤에게 훤히 보란 듯이 그가 도발적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즉시 그를 압살하겠다는 듯 거대한 체구가 확 팽창했으나 일단 한번 튕겨 낸 공포는 더는 효과가 없다.
“여길 빠져나가려면 뭐 저승으로나 오든지.”
그가 먼저 바닥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강인한 용의 다리가 갈고리 같은 발톱으로 벽면을 찍어 타고 달린다.
책장을 뜯어 내고, 벽돌을 부수고, 석벽과 철골의 구분조차도 없이 인정사정없이 이빨로 물어뜯어 끊어 낸다.
좁은 공간으로 인해 날개를 온전히 펼칠 수 없었던 용은 그렇게라도 벽을 타고 올라가 천장을 뚫고 나가려고 했다.
클로드는 드래곤이 절단 내 놓은 큼지막한 파편들을 밟고 뛰어오르며 커다란 몸체 밑으로 파고들었다. 비늘의 강도가 칼로는 깰 수 없을 만큼 대단해서 접혀 있는 날갯죽지나 턱 아래, 혹은 옆구리와 등이 이어지는 연약한 부위만을 노려 침투하는 것이다.
자신의 배 아래로 파고든 그를 드래곤이 몸을 뒤틀어 강력한 힘으로 밀쳐 냈다.
맞은 부위에 얼얼한 통증이 퍼지며 공중에서 튕겨져 나간다. 떨어지는 그를 향해 작살 같은 발톱이 다가오며 정수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조준점이 약간만 더 위였더라면 단숨에 목이 없는 시체가 되었을 테지만 드래곤에게 이것은 그저 화풀이, 감정적인 격노에 따른 단순한 반사 작용에 불과할 뿐이었다.
낙법으로 땅을 굴러 착지하자 숨 돌릴 틈도 없이 꼬리가 곧바로 쾅 하고 떨어졌다. 바닥에 부딪혔던 반발력을 다시 추진력으로 삼아 허공으로 뛰어오르자마자 이번에는 쐐액 하고 방금 전 그가 있었던 자리를 거대한 날개가 할퀴고 지나갔다.
일정하게 세워진 책장을 클로드가 징검다리처럼 가볍게 탁탁 밟으며 도망칠 때마다 거대한 발이 뒤따라오며 그가 디딘 자리들을 밟아서 으스러뜨렸다.
이렇게까지 쉴 새 없이 따돌리는데도 간격은 순식간에 좁혀진다. 몸집이 거대한 만큼 한 번에 움직이는 반경 자체가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클로드가 열 걸음을 뛰어 달아난 자리를 드래곤은 한 걸음에 쫓아온다. 그리고 이어서 무자비한 발톱과 이빨을 들이밀었다.
한입에 집어 삼키고 싶어 하는 것처럼 연속적으로 자신을 향해 턱을 벌려 오는 드래곤을 피해 클로드는 힘겨운 방어전을 펼쳤다. 검이 드래곤의 이빨에 부딪히고 인중에 스칠 때마다 푸른 검기가 유리 종처럼 챙 하고 울려 퍼진다.
물론 막아 내기만 할 뿐 그 이상은 접근할 수 없었다. 아무리 예리하게 칼을 뻗어도 광택이 빛나는 저 아름다운 비늘에는 사소한 흠집 하나 생기질 않았다. 그에게는 용을 이길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결국엔 이기지 못한다고 해도.
다만 긴 시간을 버텼으면 그것으로 원하는 바를 달성한다. 얼마나 버텼느냐가 관건이지 승패는 중요하지 않았다.
드래곤의 목표는 도서관의 붕괴를 막는 것이고 두 사람의 목표는 그런 그를 저지시키는 것이었다. 그의 기억이 온전히 철거될 때까지.
‘버텨야 한다, 최대한 오래.’
긴 주문을 준비하고 있는 태리의 위치를 확인한 클로드는 드래곤이 그녀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그 사이로 막으면서 끼어들었다가 휘두른 발톱에 긁히고 말았다.
왼쪽 다리에 후끈한 감각이 들면서 허벅지에서부터 주르륵 피가 흘러나왔다.
부상을 각오하면서까지 신의 행동을 막는 것. 이것은 훌륭한 대응이 아니다. 하지만 어떤 마음가짐으로 얼마나 끈질기게 그의 탈출을 봉쇄하고자 하는지를 드러내기에는 조금의 부족함도 없었다.
그 징그러운 각오를 눈치챈 드래곤은 콧김을 거세게 뿜어내더니, 두 사람을 내버려 두고 자신을 가둬 둔 이 공간을 빠져나가는 데에 주력했다.
피막 같은 얇은 날개가 반쯤 펴지며 위로 솟구치는 돌풍이 터졌다.
하지만 펄럭거리는 용의 날개를 무언가가 아래에서 잡아끌어 내리려고 한다. 거목만 한 발목에 로프를 감는 데 성공한 태리가 자객처럼 순식간에 뛰어 올라왔다. 코트가 뒤로 완전히 젖혀질 정도의 빠른 속도였다.
밑바닥에 가벼운 바람을 깔아 허공에서의 체공 시간을 늘린 그녀의 손바닥 안으로 둔화, 기절, 수면, 사슬 같은 온갖 속박 마법식의 펜타그램이 어지럽게 맴돌았다.
저 중에 무엇을?
마법을 파훼하기 위해 그녀의 의도를 간파하려는 듯 빌이 붉은 눈동자를 가늘게 좁혔을 때였다. 여러 개의 주문들이 팽이처럼 뒤섞더니 폭풍의 눈이라도 된 것처럼 똘똘 뭉쳐졌다.
끔찍한 양의 마나가 그 하나의 점에 모였고, 그것이 동시에 퍼져 나가며 드래곤을 향해 각기 다른 마법을 일으킨다.
처음에는 날개를 결박하듯 어깨 주변의 근육이 둔화되었고, 이어서 철렁 하고 쇠사슬이 나타나 용의 허리를 가로지르며 묶었다. 그런 뒤에는 정신이 아득해지며 어디론가 떨어지는 듯한 감각을 안겼다.
한 번에 세 개의 마법을 중첩시키는 트리플캐스트.
왕묘 전투에서 죽음에서 돌아온 언데드의 왕, 발데마르가 보여 주었었던 바로 그 동시 마법이었다.
셀 수 없을 만큼의 무수한 붉은 광선들이 벽과 벽을 이으며 빗금으로 이루어진 감옥을 만든다. 태리는 명치 부근의 코어가 불타는 고통에 입술을 깨물었다. 배 속이 불을 삼킨 것처럼 쓰라렸지만 기어이 그것을 완성시켜 낸다.
공격 마법은 단 하나도 없었다. 클로드가 그랬던 것처럼 붙잡아 두는 데 총력을 다했다. 그럼에도 난전과도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드래곤은 그녀가 건 모든 속박을 우습다는 듯이 몸으로 깨부쉈다. 거대한 몸집이 마법에 저항하며 움직일 때마다 서로 다른 힘 사이에 반발력이 발생하며 공기가 타는 것처럼 치지직 연기가 나고, 짧은 번개처럼 스파크가 팍 튀었다.
아무리 수없이 많은 마법을 생성해 내도 드래곤에게는 그저 허들 돌파에 불과하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둘은 이렇게 해서 벌써 몇 번이고 한 턴을, 또 한 턴을 꾸준히 벌어 오고 있었다. 짧지 않은 시간을 조금씩 이어서 긴 시간을 지연시킨 것이다.
그것을 드래곤도 일찍부터 인지하고 떨쳐 내려 했으나, 두 사람은 이미 숱한 싸움을 치르며 성장해 온 숙련된 사냥꾼들이었고, 감정이 이끄는 대로 그저 죽여 끝내기엔 자신을 향해 밀어붙여 오는 오렌지 빛의 눈을 보면 마음 한구석이 매번 흔들려서 하질 못했다.
“시간 벌이는 여기까지다!”
하지만 이번에는 할 것이다. 더는 자비를 두지 않을 것임을 드래곤은 포효하는 울음으로 널리 알렸다.
실리의 딸을 잃느냐, 실리와의 추억을 잃느냐. 둘 중에 선택해야 한다면 그의 선택은 맹세코 전자였다.
좁은 공간이라 비행이 원활하지 않음에도 팽팽하게 날개를 확장시키며 날아오를 준비를 한다. 동시에 턱을 당기고 흉부를 팽창시켰다.
머리 위 천장을 향해서 브레스를 뿜어낼 작정이었다.
그렇게 되면 아래에 있는 저 작은 사냥꾼들에게 몸 어딘가를 노출당하게 되겠지만 마냥 이들에게 붙잡혀 있을 수는 없었다.
“……!”
드래곤의 가슴이 공기를 모으는 것처럼 부풀어 오르자 클로드는 그 즉시 의도를 알아차리고 망토를 젖히며 달렸다. 폭력적이라고 해야 할 만큼 닥치는 대로 마법을 돌파하며 끊고 올라가는 강철 같은 육체를 추격한다.
돌기가 돋아난 꼬리와 등, 우둘투둘한 비늘을 잡고 그가 가까스로 드래곤의 등 위에 올라탔다. 그 어떤 마수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단단한 가죽이다. 다리에 힘을 주고 날갯죽지까지 기어 올라온 그는 그 사이의 빈틈을 노렸다.
드래곤의 등이 더 크게 부푸는 순간 클로드는 그 부위를 향해 있는 힘껏 칼날을 쑤셔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