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1화 (171/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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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가 거칠게 항의했다. 

“너무 위험해! 드래곤이라며! 신이라며! 어떻게 붙잡고 있으려고!”

“빌은 나를 죽이지 못해.”

“그걸 어떻게 장담해.”

“이미 봤잖아. 날 다치게 했을 때 빌이 어떻게 폭주했었는지.”

“그건―”

“이렇게 분담하는 게 효율적이야. 이대로 해.”

태리가 더는 듣지 않겠다는 듯이 못을 박았고 클로드는 핏줄이 불거질 정도로 주먹을 움켜쥐며 참고 또 참다가, 억눌린 것을 토해 내듯이 그녀를 설득했다.

“그럼 조금만 더 준비를 해. 일주일이라도 시간을 가지자고.”

커다란 건축물을 단시간 내에 부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완전히 가루로 만들 듯이 무너뜨리겠다고 한다면 우선 구조를 파악하는 치밀한 사전 작업이 필요한데, 함부로 들어가서 조사를 할 수도, 설계도를 구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는 거의 말도 안 되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그것은 무려 드래곤이 만든 건물이었다. 당연히 물리적인 조건을 뛰어넘는 수준의 단단한 보호가 되어 있으리라고 짐작되었다.

“맞습니다. 공주님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우리에겐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하지만 태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강하게 부정했다.

“우리한테는 그럴 시간이 없어요. 최대한 서둘러야 돼요. 빌이 다쳐서 힘이 꺾여 있을 때 시도해야 된다고요. 상처가 회복되면 절대 그를 상대할 수 없을 거예요.”

“그러면 언제가 좋겠습니까.”

잠자코 정적을 지키고 있던 미리엘이 처음으로 동생을 제치고 나서며 가장 이성적인 물음을 던졌다.

“말씀해 주십시오. 공주님이 생각하시는 적기는 언제입니까.”

“지금 당장이요.”

“……!”

망치로 창을 두드리듯이 기존의 예상과, 그다음 예상과, 또 그다음의 예상들을 깨부수는 발언이었다. 공간에 있는 전부가 할 말을 잃고 제 귀를 의심하는 와중에도 태리는 그것이 변치 않는 진심임을 드러냈다.

“상대가 신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요.”

시간을 끌면 끌수록 발각될 것이다. 떠오른 즉시 덤벼들어야 했다. 재고 말고의 여지조차도 없이.

물론 이들의 염려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왕묘를 토벌하러 갔을 때처럼 거대한 존재와 맞서기 위해서는 세밀한 사전 준비부터 그에 못지않은 인력과 물자가 요구된다. 그런 밑 작업 없이 무작정 부딪쳐 승리를 기대하는 건 억지에 가까웠다.

“성안에 내가 미리 준비해 놓은 것들이 꽤 있어요. 언젠가는 그것과 싸우게 될 거라는 걸 알았거든요. 성이 최후의 결전지가 될 거라는 것도.”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태리는 그동안 몇 가지 일들을 자신이 먼저 대비해 두었다고 덧댔지만 오히려 모두는 그 덤덤한 이야기에 설마 했던 진실을 깨달아 버렸다.

공주는 정말로 자기 혼자 그 존재에게 대적할 계획이었다는 것을. 이런 일이 없었더라면 그녀는 언젠가 그 길을 홀로 걸어 싸우러 갔을 거라고.

“안시, 모든 마법사들에게 연락을 해 두었겠죠.”

“……예, 부르면 당장에 달려올 겁니다.”

“제드 경도 기사들에게 대기해 두라 일러 놓았겠죠.”

“언제든 출정할 수 있도록 명령은 해 놓았습니다만…….”

“그러면 됐어요. 내가 빌을 유인해서 그를 성안에 붙잡아 놓는 동안, 여러분들은 대기하고 있다가 곧바로 파괴를 시작하세요. 반드시 그 건물을 통째로 다 부숴야 합니다. 성하께선 주변의 민가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보호를 부탁드려요.”

“알겠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공주의 정중한 부탁과 당부가 진심을 담아 스며들었다.

도서관을 무너뜨린다는 일이 결코 쉽지는 않을 것이다. 빌이 방어해 두지 않았을 리도 없었다. 그 방어를 깨트리는 데에 마법사들의 능력이 필요하고 물리적으로 부수는 일에는 기사들의 역할이 가장 중요했다.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우리에겐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죠. 그러니 부디 내 말대로 해 줘요.”

그 말이 곧 자신들마저 따라오지 말라는 뜻임을 알고 안시와 브리짓은 눈물을 훔쳤다. 미리엘 역시 고개를 끄덕이고 이즈는 욕을 하며 바닥만을 찼다.

‘공주께서 자기 자신을 내던져서 희생하는 일이신데 안 된다고 할 수가…….’

이렇게 하는 게 옳은 일인지 감을 못 잡던 제드조차 하는 수 없이 동참에 손을 들려던 그때였다. 불현듯 한쪽 뺨에 구멍이 날 듯한 시선을 받은 그가 무심코 왼편으로 고개를 틀었다.

‘이크.’

눈빛으로도 드래곤 한 마리를 너끈히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그의 옛 대장이 그를 협박하고 있었다. 말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대화가 읽힐 정도로 의도조차 눈에 선했다.

‘너에게 시킬 게 있다, 제드.’

‘설마 저더러 대장을 데려가라고 공주님께 조르라는 건 아니겠죠.’

‘알면 바로 실행해.’

‘아니, 좀!’

도대체가 구제 불능의 인간 같으니라고. 지금 세상이 망하네 마네 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인데, 기껏 자신을 위협해서 시킬 거리가 그런 것이라니.

누가 사랑에 출세도 팔고 영혼도 판 남자 아니랄까 봐, 남의 눈치고 자기 체면이고 간에 싹 다 내다 버렸다. 저 공주님한테 미쳐도 너무 미쳐 있어서…….

다들 한 진지 하고 한 진중 하기 그지없는데 그런 말을 꺼내면 아마도 말을 꺼낸 이의 꼴만 우스워질 터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충직한 부하는 오래된 신의를 저버리지 않았다. 누구 때문에 못 살겠다고 토로하면서도 그 누구와 함께한 시간만큼은 가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설혹 그 누구에게 속았다 해도.

“저어, 대신 저도 부탁드릴 게 하나 있습니다, 공주님.”

의문을 띤 오렌지 빛의 눈동자가 즉각 그에게로 향했다. 무엇이든 들어줄 테니 말해 보라는 곧은 눈빛과 강직하고 흔들림 없는 표정이 과연 세상을 구하러 가는 영웅다웠다.

“저희 대장, 아니, 대장이었던 저 한량도 함께 데려가 주십시오. 어차피 저 인간 더는 성기사도 아니어서 저희들 쪽으로 합류시킬 수도 없습니다. 다른 기사들도 불편해할 거고요. 그리고…… 안 데려가시면 여기서 말라 죽을 것 같으니 제발 사람 하나 살린다 여기시고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당장 오늘 세상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래,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붙어라도 있으라고 그가 허리를 푹 굽히며 정중히 호소했다.

* * *

성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그동안 혼자서 수십 번은 더 넘게 오갔던 길이라 눈에 훤히 익었으면서도 태리는 걷다가 한 번씩 뒤를 돌아보며 의식했다.

그녀의 뒤를 졸졸졸 쫓아서 오는 사람이 있었다.

제드가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을 때 그녀는 망설였을지언정 안 된다고 거절하지 못했다. 지금도 가까이 오란 소리는 못 하지만 그에게 돌아가란 말도 하지 않는다.

사지로 가는지 뻔히 알면서.

어제까지만 해도 그녀는 빌을 처치하고 나면 자신은 그와 함께 이 세상에서 영원히 소멸되어 버릴 운명이라고 미래를 읽고 있었다.

그런데 참 신기하다.

본래 클로드가 짊어져야 했을 몫이 제게로 왔기 때문일까. 불과 하루 사이에 이야기의 엔딩으로 가는 방향이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이제 그녀의 목표는, 아니 모두의 목표는 도서관을 파괴하는 것이 되었다. 그리하여 빌의 기억이 사라지게끔만 하면 된다. 그녀는 더 이상 소년의 목숨을 노리지 않아도 되었다.

‘빌을 죽이지 않아도 돼.’

그 가여운 아이를 어떻게든 끝내 줘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가슴 아팠는데 그 강제적인 족쇄로부터 해방되자 막혔던 시야가 커다랗게 트였다. 더불어서 달라지는 결말 따윈 없으리라 믿고 심장 밑에 파묻었던 잿더미 속에서 하나의 싹이 툭 하고 터 올랐다.

빌을 죽이지 않는다면, 그렇게 된다면 나도 이곳에 남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엔딩이 내려오고 난 이후에도 계속해서 이곳에 남아서, 그와 함께 그리고 모두와 함께 계속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꿈같은 기대가 가슴 안에서 부풀어 올라서 빠르지 않은 걸음에도 다리가 후들거리는 사람처럼 멈춰 섰다.

그녀가 우두커니 멈춰 서자 클로드도 일정한 간격을 두고 걸음을 붙였다. 그 거리 이상 좁히지 못하는 걸 보니 행여나 그녀가 쫓아오지 못하도록 쫓아낼까 봐 걱정하는 듯했다.

태리는 밭은 호흡을 정리하고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죽을 자리를 골라 들어가면서도 그녀가 따라오지 못하게 할까 봐 쩔쩔매고 있는 남자가 어물쩍 시선을 피한다.

성검을 빼앗기고 아무 싸구려 검이나 주워 잡은 손이 보였다. 고결하고 영화로웠던 흰 제복도 없고 언제나 그의 몸을 보호해 주던 성스러운 갑옷도 모조리 앗겼다. 더 이상 기사도 아니었고 그저 검사였다.

두르고 있던 화려한 껍데기 없이도 그는 조금도 빛바래지 않았으나 태리는 남루해진 그의 모습이 제 탓인 것을 알아 뜨겁게 울컥하는 속을 감추지 못한다.

그를 아프게 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내내 상처 입혔던 말들도. 내가 원하는 대로 해 달라 협박하고 이용했던 일들마저.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그렇게 말하지 말 걸 그랬다.

사실대로 전부 얘기해 줄걸. 얘기하고 그의 가슴팍에 기대서 그냥 실컷 울어 보기라도 할걸.

오직 자신만이 미래를 안다, 설쳤던 교만이 저 사람을 저렇게 만들었다.

눈꼬리가 젖어 들다가 한 줄기가 툭 떨어지자 흠칫한 클로드가 한달음에 놀라서 다가왔다.

“왜 그래.”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무슨 생각.”

“내가 잘못했던 거.”

바보처럼 제게 그렇게나 당해 놓고도 그녀가 잘못한 게 뭐가 있냐고 두둔하는 어리석은 남자 때문에 태리는 속으로 삭이던 서글픔을 눈물로 그러모아 토해 냈다. 그동안 하고 싶었는데 하지 못한 말들이 많았다. 그걸 해야겠다고 생각하니까 왜 이렇게 서러움이 빗발치는지 모를 일이었다.

“신성력을 못 쓴다는 거, 그거 가지고 협박하고, 마음 아프게 해서 미안해.”

“갑자기 그런 얘기는 왜……. 됐어. 어차피 한 번도 마음 쓴 적 없었어.”

“절대 진심이 아니었어.”

“당연히 알지. 내가 그런 것도 모를까 봐.”

“청혼 거절한 거. 그것도 내가 다 잘못했어…….”

“그래, 알아 알아.”

안다고, 알고 있었다고 다독여 주는 손길이 녹아 흐를 정도로 다정했다. 무슨 말을 해도 전부 다 들어줄 사람처럼 따스해서 어떤 상황이 닥친다 해도 절대로 자신을 포기하지 않을 것처럼 굳건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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