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8화 (168/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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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그런 생각이 든 스스로를 믿기 힘든 때가 있었다. 너 그게 정말 진심이냐고. 정말로 성검을 포기할 정도로 절실한 사랑이냐고. 그런 절박한 의지가 네 안에 있을 수 있는 거냐고. 

“실감이 안 나긴 했습니다. 이걸 스스로 놓게 될 날이 내게 오기나 할까 싶었죠.”

점점 홀가분해지고 자유로워지는 것처럼 보이는 클로드의 눈빛에 태리는 그를 땅에다가 다시 붙잡아 두려는 것처럼 제발 하지 말라고 애원했다.

그녀는 너무 무서웠다. 그가 지금 결심한 것을 실행한다면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부를 잃게 될 테니까. 그가 그렇게 살지 않기를, 누려야 할 것들을 모두 누리고 승리자로서 편안히 살아가게 되길 바랐던 건 다름 아닌 그녀였었다.

두려움에 떠는 태리의 뒤통수를 클로드는 한 손으로 끌어당기더니 안심시키듯 힘주어 안아 주었다.

“난 괜찮아.”

귓가에 나지막이 퍼지는 음성은 또 얼마나 다정한지. 괜찮으니 걱정 말라고 토닥토닥 두드리는 위로는 지금 누구의 인생이 곤두박질쳐지기 일보 직전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는 정말로 앞으로 본인의 남은 인생쯤은 바보로 살아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듯했다.

끌어안은 팔을 풀기 전 태리의 정수리에 꾹 입을 맞추고 돌아선 클로드가 마침내 검을 든 채 기사들의 앞으로 나아갔다. 태리는 다시 어떻게든 붙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일단 떼 버린 그의 걸음은 누구도 저지시킬 수 없었다.

“이 자리를 빌려 모두에게 나의 오래된 거짓에 대해 자백하고자 한다.”

그 한마디에 가장 먼저 두 눈을 내리감은 것은 일찍부터 심상찮은 분위기를 읽고 있던 미리엘이었다. 차마 보지 못하겠다는 듯이 그가 눈을 감았다.

클로드는 형을 지나쳐 웅성거리고 있는 기사들을 천천히 둘러본다. 모두 자신과 오랫동안 함께한 이들이었다. 그런 전우들에게 사실은 내가 가짜였다고 고백하는 것에 이토록 죄책감이 밀려온다. 진작에 했으면 좋았을걸. 첫마디부터 제대로 나오질 않아서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고개를 깊이 숙이고 나서야 겨우 입이 떨어졌다.

“그동안 나는 너희 모두를 속였다. 나는 성기사가 아니다. 성검을 쓸 수 없음은 물론이요 신의 힘을 조금도 빌릴 수가 없다.”

정적이 흘렀고 멀뚱멀뚱 서 있는 기사들 틈으로 뒤늦게 술렁거림이 퍼져 나갔다.

이게 다 무슨 일이냐고 되묻는 이들과 장난치지 말라고 반발하는 목소리들. 하지만 그들의 머릿속으로 문득 이제껏 한 번도 그들의 자랑스러운 단장이 성검의 비기인 소생술을 사용하는 장면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교차하기 시작한다.

거기에 더해 클로드는 자백의 끈을 놓지 않으며 자신의 그릇됨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했다. 검을 든 채로 수많은 기도문을 외웠으나 여신의 검이 그의 기도에 응한 적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맙소사.”

“단장이 신성력을 전혀…….”

클로드는 깊은 사죄의 뜻으로 기사들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런 뒤 족쇄를 풀듯 미리엘의 발치에 푸르른 성검을 내려놓았다.

“클로드.”

“이만 교단에 돌려드립니다. 모두를 속인 죄는 달게 받겠습니다.”

“그 죄라면 나도―”

“저 혼자 받고 싶습니다.”

그가 이런 무용지물의 몸이란 사실을 공유하고 있던 자들이 어디 클로드 혼자뿐이랴. 미리엘은 물론이고 그의 부모와 황제 또한 다 알고도 벌여 온 사기극이었다. 하지만 클로드는 확고했다. 오직 혼자서 거짓의 죄를 짊어지고 가고자 했다.

충격에 휩싸인 기사들의 망연자실한 눈동자가 정처 없이 미리엘에게로 향했다. 그들은 이제 성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처분을 기다렸다.

‘아아, 신이시여.’

부디 이 선택이 옳은 길이기를. 저는 도무지 이 아이가 스스로 밝힌 진심에 더는 거짓을 보탤 수가…….

오직 최고의 성기사에게만 수여하는 여신의 성스러운 검이다. 미리엘은 질끈 감은 두 눈으로 그것을 회수해 감으로써 그렇게 클로드의 죄를 인정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태리가 털썩 주저앉았다.

* * *

“근데요, 주방장님. 이제 그 기사님…… 아니, 기사인 척했던 잘생긴 아저씨는 어떻게 되는 거래요?”

“글쎄다. 성하인지 뭔지 하는 작자가 이제 그쪽의 대장이 됐을 테니 거기서 알아서 결정하지 않겠느냐. 쫓겨나거나 잡혀가거나 하겠지.”

“잡혀가요?!”

“그래, 사람들이 하는 얘길 주워들으니 제국에선 기사가 죄를 지으면 참회가 끝날 때까지 어느 외딴 섬에 있는 감옥에 가둬 버린다더구나. 한번 들어가면 쉽게 나오질 못한다니 정말 큰일이지.”

기운 없이 당근을 통통 써는 주방장의 말에 릴리와 마치가 동시에 꺅 하고 소리를 질렀다. 정확히 어떤 장소라는 건지 제대로 이해하진 못했지만 듣기만 해도 몹시 무시무시한 장소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아들었다.

“못 가게 막아요!”

“우리가 지켜 줘요!”

“그래. 난 그 지루한 섬으로 끌려가고 싶진 않으니까 부탁 좀 한다.”

때를 맞춰 주방의 뒷문으로 클로드가 과일 바구니를 짊어지고 들어오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바깥은 지금 그에 대한 비난과 헐뜯음으로 발칵 뒤집히다시피 했는데 정작 당사자는 그런 건 관심도 없다는 태평한 얼굴이었다. 온 도시의 웃음거리가 된 주제에 뭐가 저리도 편할까 싶었다.

“힘도 좋지. 그걸 한 번에 다 들고 온 거요.”

“별로 무겁지도 않은데, 뭐.”

“허, 확실히 밥값은 하겠구먼.”

“옮길 거 더 있으면 옮겨 주고.”

스스로의 사기 행각에 대해 자백한 그날로부터 클로드는 이 호텔에 객으로 얹혀살게 되었다. 이유는 이곳 말고는 더는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경악스러운 소식이 도달한 즉시 황궁에서는 그의 모든 직위를 해제했다. 총독은 물론이고 단장직조차 박탈이다.

본래라면 바로 포승줄에 돌돌 묶여서 수도로 잡아 올려진 다음 언제 섬으로 추방할 건지 날짜를 논하고 있을 텐데, 그러지 못한 건 아직까지 그에게 ‘성직자’라는 신분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성기사는 기사이지만 그보다 앞서서 성직자로, 교단에 소속된 사제의 신분이었다.

그러니 그에 대한 처분만큼은 황제가 아닌 교단의 수장인 성하가 결정 내릴 수 있는 권한을 지닌다.

물론 모두가 예상하듯이 그가 성직자 명부에서 파문당하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확정적이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미리엘이 여신의 응답을 듣고 결정하겠다며 두문불출한 채 언급을 하지 않고 있었기에 현재 그의 직분은 파문이 보류된 어정쩡한 상태에 처해 있었다.

아무튼 이러저러하여 하루아침에 존경받는 성기사에서 희대의 사기꾼이 되어 길바닥에 내앉게 된 그를 미운 정이 뭐라고, 길바닥에 자도록 내버려 두지 못하고 거둬들인 것은 이 호텔의 마법사들이었다.

전혀 그래 보이지 않았지만 어디서 피죽도 못 얻어먹고 굶은 꼴이라며 억지로 맛없는 음식을 먹이고 방 하나를 내주어 푹 재운 것도 역시 그들이다.

음식을 먹을 때만은 아주 똥 씹은 표정이었지만 그 이외의 호의에 대해서는 클로드는 당연히 사양하지 않고 받았고, 그 뒤부터 이렇게 쭉 호텔에서 먹고 자는 생활을 이어 오고 있는 중이었다. 백수 노릇이 썩 잘 맞았던지 약간 말랐다 싶었던 얼굴에도 금세 윤기가 돌았다.

맛없는 요리를 마법 부리듯이 잘도 찍어 내는 주방장을 대신해 클로드는 오늘도 팬을 잡았다. 그러자 단숨에 입가가 환해진 릴리와 마치가 얼른 그의 양옆으로 달라붙었다.

“오늘도 요리할 거예요?”

“오늘은 맛있는 거 뭐 해 줄 거예요?”

“릴리가 계란 갖다드릴까요?”

“마치가 양상추도 갖다드릴까요?”

“아니, 내가 다 가져왔어.”

오크가 발가락으로 휘저은 듯한 음식만을 먹다가 클로드가 해 준 정상적인 요리들을 맛보고 아이들은 흥분해서 신이 났다. 클로드가 어디론가 끌려갈지도 모른다는 얘기에 절대 안 된다고 했던 것도 이런 연유 탓이다.

그가 해 준 토스트가 너무너무 맛있어서, 그가 끓여 준 스튜가 깜짝 놀랄 만큼 뛰어난 우주의 맛이어서, 그가 쓱쓱 섞어 내서 만든 초콜릿 퐁듀에는 하루 종일 손가락을 찍어 먹고 싶어서, 아이들은 이 기사님이 절대 다른 곳으로 가지 않았으면 했다. 여기서 우리 공주님이랑 결혼해서 평생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복잡한 어른들의 사정도 모르고 클로드가 식칼을 가볍게 휘두르며 원하는 걸로 만들어 주겠다고 하니 소녀들은 더욱 환호하며 크게 소리 질렀다.

“세 개 만들어서 하나는 공주님 주고, 두 개는 너희 줄게.”

급기야 야호! 하고 쾌재를 부르며 클로드가 됐다는데도 굳이 채소 바구니며 달걀이 든 박스를 꿀 나르는 꿀벌처럼 머리 위로 실어다가 나른다.

달군 팬에 기름을 두르고 야채를 볶는 클로드의 능수능란한 솜씨에 위협을 느낀 건지 주방장이 설레발을 치며 으름장을 놓았다.

“왕년에 어디서 칼 좀 휘두르고 왔다고 내 일자리 뺏을 생각은 꿈에도 마시오.”

“음? 그럴 생각까진 없었는데. 뭐 그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어허, 나는 마법에 서툴러서 그나마 할 줄 아는 재주가 요리뿐이란 말이오.”

“유일한 재주가 요리라면 아무것도 안 하고 사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주방장.”

“무슨 헛소릴! 지난 10년간 아무 문제 없이 잘만 운영해 왔소. 남의 밥그릇 뺏을 궁리 하지 말고 그쪽이야말로 이제부터 뭐 먹고 살 건지 진지하게 고민해 보쇼.”

그런가? 클로드가 들고 있던 칼을 보았다. 그야말로 딱히 이 칼을 쓰는 것 말고는 다른 재주가 없는 사람이었다.

“혹시 이 호텔에 마법사가 아닌 사람은 직원으로 안 뽑나. 대충 마검사로 분류해서 받아 줘도 되는데.”

“참 나, 마법 명문가에 무슨 뜬금없이 마검사요? 우리 이자리스에는 마법사만 있으면 돼……라고 생각했지만 우리 편이 된다면 얘기는 또 달라질지도? 흐음, 그래, 슬슬 마검사를 한번 길러 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괜찮지? 한번 긍정적으로 검토해 봐.”

아무도 주워 가지 않는 오리알 신세가 되긴 했지만 그래도 그는 출신도 좋고 힘도 엄청 센 오리알이다. 태생이 연약한 마법사들 사이에서 일꾼으로 부려 먹으면 아주 적절할 터. 다른 마법사들에게 의향을 물어봐도 아마 대부분 비슷한 이유로 수긍할 이야기였다.

“그럼 우리 호텔에 취직할 거예요?”

“그럼 우리가 마법 가르쳐 줄게요!”

그러자 릴리와 마치가 서로 그에게 마법 선생이 되겠다고 나섰다. 나는 변장을, 나는 소환을, 나는 언어 해독법을, 나는 강령술을. 본인들도 못 하는 무지무지하게 높은 경지의 마법조차 마구잡이로 떠드는 허풍쟁이들이라 오랜만에 주방이 정신없이 시끌벅적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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