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7화 (167/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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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손으로 젖은 눈가를 문질러 닦아 주니 빼꼼해진 눈으로 훌쩍대며 그를 올려다본다. 닦아 준 게 무색하게도 금세 물기가 고여 촉촉해지는 눈가가 안쓰러웠다. 

“내가…… 밉지 않아?”

“미워. 아주.”

그녀는 자신을 망가트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고 반지를 바치러 온 제 가슴을 찢어 숲길에 버려두고 감으로써 그 유일무이한 권력을 휘두른 사람이었다.

보지 못한 동안 얼마나 미웠는지 모른다.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그리워하지도 않을 거라고 하루 종일 벽에 대고 외치다가 목이 쉰 적도 있었다.

그런데 품에 안겨 준 순간 그런 미움 따위는 전부 보잘것없어졌다. 미워했던 그 감정조차 사랑에 가까운 무언가였다.

“미운 것보다 더 좋아해. 좋아해서 미치겠으니까 이제 다른 데로는 가지 마.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줄 테니까 떠나지만 말아 줘. 당신 안 보고는 이제 못 산다고, 나는…….”

이미 안고 있는데도 또 어디론가 사라질까 봐 클로드는 못 본 새에 더 비쩍 마른 몸을 계속 품 안으로 욱여넣어 가며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해서 말했다.

나는 땅도, 왕위도 다 필요 없다고. 빌어먹을 저주이니 뭐니 하는 것도 신경도 안 쓰니까 다른 데 가지 말고 그냥 여기에 계속 있어 달라고 했다.

다만 그 말이 여자의 가슴을 얼마나 아리게 하는지는 몰라서 다시금 눈물을 글썽이며 훌쩍이기 시작하는 그녀를 안고 닳도록 쓰다듬는다. 그러곤 때마침 떠올랐다는 듯이 마음속으로 결심했던 이야기들을 툭 누설해 버렸다.

“그리고 그 계약서 어차피 내가 다 찢어 버렸어.”

“뭐……?”

거짓, 거짓말하지 마. 태리는 짓무른 눈가를 문지르며 고개를 들어 사실을 다그쳤다. 하지만 클로드에게는 그저 입 맞추기 참 좋은 각도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거짓말은. 꽃병에 넣어 뒀었지? 가서 확인해 봐. 없으니까. 내가 당신 잘 때 들어가서 찾아서 찢어 버렸어. 한 이백 등분 정도 냈나. 그다음에는 벽난로에서 화형시켰고. 그러니까 그 계약서는 이제 이 세상에 없어. 존재하질 않아. 무효가 됐다고.”

믿을 수 없다는 듯 흔들리던 태리의 눈빛이 차차 돌처럼 굳어지더니 곧이어 ‘야 이, 미친놈아!’ 하고 소리칠 정도로 경악스럽게 변한다.

그러나 클로드는 여전히 그 사실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자랑스러워했다. 태우길 참 잘했지. 그 당시에도 그 일을 세상에서 제일 잘한 짓이라고 생각했었다. 물론 지금은 평생에 걸쳐 한 것 중 가장 위대한 일이 되리라 확신했고.

“이젠 있지도 않은 계약이니까 더 이상 내가 지킬 필요도 없다는 소리야. 구두 계약도 계약이란 말 같은 건 집어치워. 종이 계약서 없으면 무조건 무효야. 그러니까 여기 남아서 왕 노릇 하든가, 그게 싫어서 어디론가 갈 거면 나도 같이 데려가든가 알아서 하라고.”

날 혼자 이곳에 내버려 두고 떠나려고 해? 어림도 없다. 찻집에서 기다리는 며칠 동안 그는 결혼하지 않고도 그녀의 옆에 머무를 수 있는 수십 가지의 방안에 대해 생각해 냈다. 그리고 그중에 가장 적절한 것 한 가지를 이미 실행에 옮기기로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그토록 순수하고 착했던 남자에게 뒤통수를 맞은 충격에 태리가 기함하는데도 그는 걱정 말라며, 드래곤을 사냥하는 일에는 결코 소홀히 하지 않을 거라면서, 자신을 이용해 먹는 데 그따위 종이 쪼가리 같은 건 없어도 된다며 그녀의 뺨에 뜨거운 입술을 붙이고 말했다.

“뭐든 당신에게 협조할 거야. 그런데 계약으로는 절대 안 해.”

“이……!”

“내가 필요하다고 한마디만 해 봐.”

네가 필요하다는 그 한마디면 된다. 그거면 다 조종할 수 있다.

유혹하는 남자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스며들었다.

울던 낯빛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태리는 아연실색했다.

그렇게나 상처받고도 그녀의 한마디면 뭐든 해 주겠다는 멍청한 남자의 속 편한 말 때문에. 또 미워 죽겠는데 그 전에 그것보다 더 좋아서 죽겠다는 그의 고백 때문에.

대체 어느 사이에 계약서까지 찢고…….

설마 진짜는 아니겠지. 진짜로 찢은 거야?

귓가에 대고 연신 ‘필요해? 응? 내가 필요하지?’ 하고 속삭이며 꾀어내려는 잘생긴 얼굴에 대고 태리는 ‘이 바보!’라고 크게 소리 질러 버렸다.

“바보?”

한쪽 눈썹이 구부정하게 올라가더니 금세 제자리로 되돌아오며 평온해진다.

“그래, 알겠어. 바보 할게.”

뭐 그것도 나쁘진 않겠다고 배알도 없이 웃는다. 저 바보가. 그러더니 클로드는 바닥에 떨어진 그녀의 가방을 자신의 어깨로 걸쳐 올렸다. 달라고 손을 뻗으니 닿지 못하는 위치까지 번쩍 올려 버렸다.

“어디 가지 말고 얌전히 호텔에 가 있어.”

“난 할 일이―”

“오래 걸리지 않으니까 가서 나 기다리고 있어. 보여 줄 거 있으니까. 또 말도 없이 사라질 생각 말고. 이 가방은 그때까지 인질이야.”

“뭐?”

“나 기다리겠다고 하면 돌려줄게.”

높은 위치에서 가방을 달랑달랑 흔드는 손길이 왜 이렇게 얄미운지. 펄쩍펄쩍 뛰며 허공에서 손을 허우적대던 태리는 몇 번을 해도 닿지 못하자 에잇! 하고 그의 발등을 콱 밟아 버렸다.

호텔에서 뭘 보여 주려고 이러는 건지. 기대하라는 듯이 웃는 눈꼬리가 불안한데 지금은 다른 선택지도 없었다.

태리는 그길로 당장 호텔 방으로 뛰어와서 탁상 위의 꽃병 속을 확인했다.

감쪽같이 사라진 계약서에 그녀가 허탈하게 바닥에 주저앉았다.

“진짜였어…….”

클로드의 말은 진짜였다. 설마설마했는데 정말로 이런 짓을 할 줄이야. 그 선량하고 착한 남자가.

그거 하나를 믿고 제 운명을 받아들여도 괜찮겠다고 여겼는데.

“진짜…… 오기만 해 봐.”

어디 오기만 해 봐라. 정신이 나갈 때까지 탈탈 털어 주겠다.

다른 데 가지 말고 얌전히 자신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선포하고 간 뒤통수꾼을 태리는 일찍부터 로비로 내려와서 기다렸다. 오랜만에 호텔로 돌아온 공주님을 사람들은 웬일인가 하면서도 하나같이 기뻐하며 반겼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떼 지어 우르르 몰려온 기사 무리에 곧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게 무슨 일이래.”

틀림없이 오겠다던 말 그대로 클로드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호텔로 출두했다. 그런데 그냥 온 게 아니라 뒤로 상당한 수의 기사들을 대동하고 쳐들어왔다. 심지어 미리엘까지 끌고서.

대단한 행렬이었다. 그래, 그것은 거의 행렬이라고 봐야 할 만큼 많은 숫자였다.

“확인했습니까.”

당최 무슨 짓을 벌이려는 건지, 느긋한 표정으로 나선 클로드는 태리를 보자마자 그렇게 첫마디를 뗐다.

계약서가 없어진 걸 잘 확인했냐는 뜻. 삐쭉 선 태리의 눈꼬리에서 만족스러운 결과를 알아들은 그는 본인의 계획대로 술술 풀린 것에 흡족했는지, 느긋한 미소로 허리에 걸려 있던 성검을 검집 채로 분리시켜 냈다.

갑자기 여기서 성검은 왜?

그녀가 의아하게 생각했듯 뒤에 선 기사들도 그의 행동을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이게 다 뭐예요. 저 사람들은 또 뭐고요.”

“증인이죠.”

“증인?”

“이대로 두면 공주님이 또 도망갈 테니 뭘 좀 하긴 해야겠는데. 둘이서만 하면 효력이 없을 거 아닙니까. 사실 진작에 이랬어야 했는데 쓸데없이 당신한테 약점이 잡혀서 못한 거였고. 마땅한 때가 됐으니 그걸 이 자리에서 지금 내 손으로 없애려는 겁니다.”

말투도 점잖고 표현도 바른데 알맹이가 전혀 그렇게 와닿지 않았다. 해석하자면 오히려 이렇게 들렸다.

계약서도 찢어서 없앴겠다, 더는 우린 계약 관계도 계약 약혼도 아니니 이제 자신이 어떤 폭탄을 터트려도 거리낄 게 없다고. 걸리적거리는 것들을 이 자리에서 몽땅 제거해서 다시는 그녀가 도망갈 거리가 남아 있지 않도록 만들어 줄 테니 거기서 두 눈 똑바로 뜨고 잘 지켜보라고.

안 돼. 설마. 태리는 퍼뜩 불안감을 느껴 클로드의 손을 막았지만 그는 그녀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검을 뽑아냈다.

아가사의 거룩하고도 성스러운 검.

여신이 제 손톱 하나를 뽑아 인간에게 선물한 것이라던 성물이 조명 아래에 푸르게 빛났다. 빛이 퍼진 순간 로비에 있는 모두가 경외하듯 그것을 우러러보았다.

“이깟 검 한 자루가 뭐라고.”

자조 섞인 어조로 허탈한 웃음을 지은 건 클로드 혼자였다.

그동안 이것을 놓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며 살아왔던 지난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다른 건 몰라도 그는 제 인생에서 이것만큼은, 이 검을 위해서만큼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며 살아왔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스스로 성검의 노예를 자처했을 정도로 그는 이 검의 진정한 주인처럼 보이는 일에 자신의 평생을 몰두해 왔었다.

그가 그것을 높이 치켜들었다가 천천히 내려놓자 태리가 다시 한번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무슨 짓을 할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그게 뭐든 그만둬요.”

안 돼, 정말로 그런 짓은 하지 마. 경계선에서 넘칠락 말락 했던 불안감이 턱 끝까지 치솟는다. 하지만 검을 든 채로 힘없이 내려놓은 팔과 달리 흘러나오는 클로드의 목소리는 굵고 강하며 확신에 차 있었다.

“한 시대를 성검의 주인으로서 산다는 건 기사로서 대단히 영예로운 일입니다. 검의 무게가 아무리 무거워도 그것은 분명 가치가 있는 일이었습니다.”

“클로드.”

“그럼에도 제게는 유독 버거웠습니다. 원래 자기 게 아닌 것을 제 것인 척 흉내 낸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잖습니까. 그래도 지금까지 나름 잘 버텼다고 생각합니다.”

“제발. 하지 말아요, 제발.”

“나는…… 이것이 내 것이 아닌 게 들통나는 순간 내가 괴물로 취급받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얼마나 손가락질 받고 얼마나 모욕을 당할까. 내가 기사로서 살아온 인생 전부가 부정당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아마 당신이 내게 그 점을 가지고 협박했을 때 저항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약혼하되 내가 원할 때 순순히 헤어져 줄 것.

그 잔인한 계약을 받아 주지 않으면 공주는 그가 성검을 쓰지 못한다는 사실을 세상에 폭로하겠다고 겁박한 적이 있었다.

아닌 척하고 싶었지만 그때의 그는 그녀의 말에 묶여서 꼼짝을 못 했다. 그것만 아니었다면 그런 터무니없는 약혼을 해 줄 리도, 오두막에서 그리 순순히 헤어져 줄 리도 없었을 텐데.

그에게 있어서 이 성검은 그만큼이나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치부였다.

“그런데 우리가 헤어지고 나서 며칠이 지나니, 신기하게도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

“아, 이제 그만 괴물로 살아도 되지 않을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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