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
“술 마셨다면서요. 속은 좀 어때요.”
“볼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자신의 건강을 염려하는 공주의 음성을 그는 차게 끊었다.
속은 썩어 문드러져 가는 주제에 사무적인 태도로 서선 흔한 인사말도 없이 용건만을 덩그러니 밝혔다.
“확인할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우연히 제 손으로 들어온 것인데, 수신인이 공주님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보내는 이가 누구인지는 적혀 있지 않더군요.”
직접 전해 주겠다고 꼬박 며칠을 이 자리에서 기다린 편지 봉투를 그가 볼품없는 휴지 조각 꺼내듯 품 안에서 빼 건네 보였다.
“정체를 밝히지 않고 보내는 편지가 얼마나 수상하고 위험한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알고 계시겠지요. 상황이 좋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말인데 총독으로서 이것의 정체를 알아야겠습니다. 어떤 목적을 가진 누구로부터 온 것인지 먼저 읽어 보시고 설명해 주십시오.”
우연히 얻은 것도 아니고, 빼돌린 편지가 이것 하나뿐인 것도 아니다. 하지만 핑계를 대기에 적절한 편지는 이것 하나뿐이었다. 보내는 사람의 자리가 비어 있어 수상하니 확인해 달라고 찾아오면 알맞은 내용이었다.
태리는 그가 건네는 편지를 받으면서도 내용을 확인하는 대신 그의 얼굴부터 살폈다.
눈 밑은 그늘이 진 것처럼 어두웠고, 만지는 대로 흐트러지던 부드러운 머릿결은 그 끝이 다 상해 있었다. 얼굴 살이 빠진 건지 안 그래도 날카로웠던 턱선이 이제는 베일 것처럼 날렵해졌다.
측은한 목소리와 냉랭한 목소리가 번갈아 오갔다.
“얼굴이 왜 이렇게 많이 상했어요.”
“누가 보낸 겁니까.”
“식사는 제대로 챙겨 먹고 있어요?”
“보낸 사람부터 확인해 주십시오.”
“자꾸 이런 데서 밤새면……”
“어서.”
그 이상의 접근을 단절하는 듯한 차갑고 딱딱한 말투였다.
아, 이 사람은 이제 내가 미운가 보다 하여 태리는 저도 모르게 찔끔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가슴 아팠지만 그와의 관계는 이렇게 무너져 있었다. 무너졌으므로 망가진 틈 사이로 무엇이든 흘러들 수 있는 것이었다. 비록 그것이 지금처럼 쓰고 짠 냉대라 할지라도.
이걸 어떻게 얻은 건지, 어디서 난 건지도 묻지 않고 그녀가 바스락거리는 봉투를 뜯어 열었다.
“뭐라고 쓰여 있습니까.”
“그냥 평범한 안부 글이에요. 날이 추워지면 새 이불을 지어 보내 주고 싶다고 원하는 색깔이 있는지 물어보는 거예요.”
“뭐 하는 놈인데 이불까지…….”
“네?”
“아니, 그, 정신 나간, 아니, 보낸 사람이 누굽니까.”
“내가 아는 사람이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그러니까 아는 사람 누구. 어디 사는 누구냔 말입니다.”
“란돌프 해링. 마법사예요.”
마법사. 란돌프 해링.
클로드는 발신인의 이름을 잊지 않겠다는 듯이 똑같이 따라 읊곤 얼른 편지를 도로 뺏어 갔다. 태리가 이 허튼수작질 같은 편지에 절대 답장하지 못하도록 차단하려는 게 첫 번째였고, 두 번째는 그냥 그녀의 손에 들려 있게 하기가 싫었다.
란돌프. 누가 봐도 남자 이름이었으니까.
“그럼 돌아가서 이자의 신원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문제가 없는지. 확실한 건지.”
아니, 내가 아는 사람이라니까 무슨 또 조사를 한다는 건지. 태리는 도통 클로드의 기행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에 따른 실랑이는 하지 않았다.
그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었다. 앞으로 언제까지나 자신은 그에게 죄인일 테고 끝없는 죄스러움을 지고 살아갈 테니.
“이게 날 만나려고 했던 이유였어요?”
“예.”
“그럼…… 볼일은 이제 끝이에요?”
“예, 끝났습니다.”
끝났다는 군더더기 없는 말씨에 태리는 순간적으로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 눈가가 어그러졌다. 약한 부위를 연거푸 톡톡 쏘인 것처럼 움츠러든다.
이별의 후유증을 조금도 이겨 내지 못한 이에게 끝이라는 단어는 잔인할 정도로 날카로웠다.
그리고 그녀의 표정이라면 손톱만큼만 찡그려져도 바로 알아차리는 클로드는 파르르 경련하듯 떨리는 여자의 눈매에서 서글픔과 서운함을 곧바로 읽어 냈다.
혹시 내게 흔들리는 걸까 싶어서 일말의 기대를 품었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잠시 후 얼굴을 고친 태리가 ‘그래요.’ 하고 짧은 한 마디를 떨어트리곤 그 자리에서 돌아서 버렸다.
그에게서 돌아선 그녀는 가방 안의 것들을 모두 꺼내 내려놓고, 찻집의 찬장으로 가 브리짓이 만들어 둔 약병을 익숙하게 꺼내 간다.
묵묵히 빈 가방을 다시 새 물약으로 채워 넣는 손길에는 방금 전과 같은 감정이 엿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등에서 눈을 떼지 못한 클로드는 하염없이 조급해하는 자기 자신을 다독이며 기다렸다.
이제는 보겠지. 이번에는 날 보겠지. 다 넣으면 돌아봐 주겠지.
그러나 약병을 가득 채워 넣은 태리는 그 길로 곧장 여장을 꾸려 한쪽 어깨에 배낭을 걸치곤 그대로 밖으로 나가 버렸다.
딸랑거리는 종소리가 비참하게 귓속을 후벼 팠다. 이어서는 화를 불러일으켰다.
가로막으려는 브리짓의 손길에도 불구하고 클로드는 질주하는 경주마처럼 뛰쳐나가 앞서가고 있는 태리의 어깨를 거칠하게 잡아 세웠다.
꽤 강한 힘에 그녀가 작은 신음을 냈지만 성난 목소리가 더 크게 덮쳐들었다.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습니까! 어떻게 이대로 그냥 갈 수가 있어요. 정말 날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습니까?”
격양된 목소리에 태리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안다. 이해할 수 없겠지. 얼마나 못됐다고 생각할까. 며칠을 밤새서 기다렸는데 겨우 만난 여자가 이리도 무감각하면.
하지만 계속 같이 있다간 금세 예전으로 되돌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조금만 더 오래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간 머리를 배신하는 손을 멋대로 뻗어 그의 메마른 뺨을 쓰다듬었을 테다.
얼마나 지독한 마음가짐으로 이별을 고했는데 그렇게 휩쓸릴 순 없었다.
“놔요. 갈 거예요.”
하지만 그는 끌려올지언정 죽어도 놓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어디 가는데.”
그로서는 이제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혼자 다닌다는 이야기에, 언제 어디서 죽어도 상관없는 사람처럼 미련 없는 모습에 그녀가 이대로 사라질까 봐 무서웠다.
하지만 몇 번을 물어도 묵묵부답. 밧줄로 칭칭 감겨 입막음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태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예 고개를 푹 숙이고 쳐다보지도 않으려는 태도에 클로드는 서러워서 죽고 싶어졌다.
공관의 작은 방에 틀어박혀서, 보고 싶지 않다 외치며 그녀가 찾아와 주길 며칠이고 기다리던 그때로 다시 되돌아간 기분이었다. 그대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찾아 헤맸는데 눈앞까지 찾아와도 그녀는 자신을 봐 주지 않는다.
이제는 못 참아. 정말로 못 참는다.
클로드는 작정한 사람처럼 큰 보폭으로 앞질러 가 벙어리가 된 공주의 두 팔을 옭아매어 버렸다. 두 팔을 붙잡고 움직이지 못하도록 그 자리에 아주 못 박아 버렸다.
“어디 가는지 말해. 말하고 가. 어디 가는지! 언제 올 건지! 전부 다 말하고 가라고. 못 하면 여기서 한 발자국도 못 움직일 줄 알아. 이대로 들쳐 업고 가서 내 방에 가둬 버릴 거야.”
그러자 이번엔 그렁그렁하게 변한 눈망울이 그를 원망스럽게 올려다보았다. 울먹거리며 뱉어 낸 말이라고는 상관 말라는 흐느낌뿐이었다.
“상관 마……? 걱정되니까 그런 거잖아! 이제 나한테 그런 것도 말 안 해 줘? 진짜 이렇게까지 멋대로 굴 거야? 호텔로 하루에도 협박 편지가 몇 통씩 오는지 알기나 해?!”
그 속에 공주를 해코지하겠다는 내용은 그다지 없었지만 이러나저러나 클로드에게는 별반 차이 없는 내용들이었다. 토끼처럼 새빨개진 눈으로 태리가 그마저도 그냥 두라고 하자 그의 얼굴이 무시무시하게 변했다.
“누구 맘대로.”
“…….”
“난 당신을 건드리는 게 있으면 그게 뭐든 전부 제거할 거고, 허튼짓을 벌이는 놈이 있으면 찾아다가 끝장을 낼 거야. 몇 놈은 이미 불구로 만들었어!”
상대를 짓누르듯 고압적인 말투였으나 그의 말 속에는 여유가 없었다.
확 끓어올랐다가 눌어붙은 듯한 낡고 지친 눈빛이 태리의 어깨 위로 쓰러졌다.
“헤어져 줬잖아.”
“…….”
“이제 안 따라다니잖아. 귀찮게도 안 하잖아! 그럼 어디 가는지 정도는…… 말해 줄 수 있잖아. 내가 하루라도 좀 편히 있고 싶어서 그래. 어디 가는지라도 알면 마음이 좀 나아서, 그래서 그런다고.”
새벽의 숲길에서, 절망 같은 작별을 맞이한 이후부터 클로드에게는 밤과 낮이 없었다. 얼마나 지났는지는 달력을 보고 날짜를 세어야 알았고, 창밖에 빛이 어른거려도 그것이 해인지 달인지를 구분하지를 못한다.
잠들 수가 없어서.
아무리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지가 않았다.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 나를 생각하는지 아니면 벌써 다 잊어버렸는지. 정말로 그대로 영영 떠나서 나를 버리는 건지.
비루하기 그지없는 나날들이었다.
“나 좀 살려 줘. 제발.”
결국 버티고 버티다 못해 떨어진 건 어딘가에 사무치는 듯한 애걸이었다. 고집부리며 움켜잡은 부위도 느슨해졌다. 커다란 몸집이 쓰러질 것처럼 기대 온다. 그녀가 마주 안아 주길 바라는 몸이었다.
태리는 자신의 어깨에 제 전부를 기댄 듯한 남자의 몸을 힘주어 지탱했지만 차마 안지는 못 하고 아랫입술을 꽉 깨물어 흐느끼는 소리를 삼켰다.
어디를 가냐고 서툴게 다그치는 것도, 아플 정도로 세게 움켜잡은 것도, 제 풀이 지쳐서 이렇게 기대 오는 것도 전부 살려 달라는 소리로만 들렸다. 네가 없어서 죽을 것 같으니 제발 좀 살려 달라고 필사적으로 외치는 것만 같다.
이 모든 걸 자초한 것은 그녀 자신. 그러니 괴로워하는 그를 지켜보는 일이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버티는 것 또한 그녀의 몫이었는데 빌듯이 애원하는 목소리에 그만 무너지고 말았다.
“다시는 결혼해 달라고 매달리지 않을게…….”
청혼해서 미안하다는, 잘못했다는 미련한 사과가,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서글픈 약속이 이 남자가 떠나간 연인을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다.
힘겹게 참고 참으며 쌓아 왔던 울음보가 터진다. 도저히,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었다. 외면할 수가 없었다.
유리막이 깨지는 것처럼 태리는 흐으윽 크게 목 놓아 울며 두 팔로 클로드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제자리를 되찾은 몸이 절실하게 품속을 파고든다. 그에게 돌아가지 않도록 두 팔을 꽉 묶어 두었던 것 같은 무거운 배낭이 한쪽 어깨에서 스르륵 떨어졌다.
클로드는 눈물로 얼룩져 흠뻑 젖어 있는 태리의 얼굴을 소중하게 감싸서 들여다보았다. 무엇이 그리도 서럽고 힘겨운지 눈가가 짓무르도록 펑펑 우는 얼굴이었는데 어처구니없게도 그의 눈에는 그냥 예쁘다는 생각만 들었다.
예쁘다. 너무 예뻐. 며칠 만에 보니까 더 예쁘네.
누구 말대로 자신은 정말 이 사랑에 영혼이라도 판 걸까. 어제까지만 해도 그렇게나 살기 싫더니 왜 이렇게 갑자기 생의 의지가 불타오르는지 모를 일이었다. 분명 미래 따위 개나 줘도 상관없었는데…… 이제는 살아야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