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5화 (165/186)


 

165

사실 요즘 마법사들은 브리짓 말고도 다들 은근히 일이 많아서 바빴다. 

이자리스의 복구와 운영을 위한 여러 가지 일들을 태리가 모두에게 할당하듯이 나누어서 시켰기 때문이었다. 가게 수리가 얼추 마무리가 되어 가는데도 브리짓이 내내 찻집 문을 열지 못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바빠서 장사를 할 짬이 안 났다.

“그 뒤로 공주님 소식은 몰라. 뭔가를 준비하는 것 같긴 했어. 혼자서 꽤 자주 폐성을 들락날락거리는 것 같기도 했고. 그런데도 따로 말을 안 해 주는 걸 보면 그 일을 누군가와 함께 하고 싶은 생각은 아닌 거지.”

혼자서 폐성을 다니는데 그걸 아무도 따라가거나 동행하지 않았다고? 가라앉았던 눈을 치켜올린 클로드가 화를 내며 밀어붙였다.

“그런 줄 알면서도 그냥 손 놓고 보냈다고. 제정신인가.”

“당연히 제정신이지. 대충 봐도 위험한 일을 하려는 것 같은데 거길 왜 따라가. 자기 입으로도 혼자 가게 해 달라고 했어. 우리는 우리 자리에서 각자의 할 일을 다 해 주길 바란다고 그렇게 부탁했다고.”

“뭐?”

막힘없는 브리짓의 대꾸에 클로드는 이제는 정말로 화가 머리꼭지까지 치솟은 표정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손 놓고 바라보기만 할 수 있는지. 그러다가 그녀를 잃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할 건가. 그는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다는 태도로 따져 들었다. 너희는 다 비겁하다고. 공주 하나를 앞세워서 할 일을 전부 떠넘기고 뒤로 숨기만 한다고. 그러자 브리짓은 그보다 더 울컥한 표정으로 소리 지르며 항변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떠들지 마! 너야말로 바보야? 아직도 모르겠어? 걘 우리가 자기한테만 의지하지 않도록 연습시키고 있는 거야! 어느 날 갑자기 자기가 사라져도, 힘겨운 싸움을 하다가 쓰러져도, 우리가…… 별 탈 없이 살아 나갈 수 있도록, 이자리스가 문제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대비시키는 거라고!”

그것을 브리짓만 알까. 아니, 마법사들 중 누구도 이렇게 말하지 못했지만 모두가 비슷하게 깨닫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공주님이 이러시는 건 본인이 이곳에 없을 때를 대비시키려고 하는 거라는 걸. 모두에게 홀로서기 훈련을 시키고 있는 거라는 걸.

그러니 책임감 넘치는 그 공주는 아무도 자신의 뒤를 따라오지 않는 것을 조금도 서운하게 여기지 않을 터였다. 설혹 그러다가 제 목숨이 갑자기 어떻게 되더라도 누군가와 같이 오지 않은 것을 그녀는 외려 다행으로 여길 터였다. 자신만 다칠 뿐 이곳은 안전하니까.

그런 순간이 오면 무척 가슴이 아플 것이다. 찢어져서 피가 철철 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몰아닥쳐도 결코 삶은 끝나지 않는다. 앉은자리가 너덜너덜하게 뜯기고 그곳에 소중한 누군가가 사라진다고 해도, 그래도, 그래도 살아야 된다고 말하는 게 삶이었다.

그 사실을 덤덤히 받아들이고 일찍부터 미리 준비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브리짓은 친구의 고생을 그렇게 이해하고 가슴 아프지만 어른스럽게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도저히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도 있었다. 클로드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

“그녀가 사라지면 이 땅이, 이걸 지킨 게, 그게…… 대체 다 무슨 의미가 있어.”

공주 없이도 무사히 돌아가는 이자리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거기에 어떠한 가치가 있어서 살아남아야 하는가.

절망으로 비틀거리려는 스스로를 지탱하기 위해 클로드는 턱에 힘을 주고 이를 악물었다.

이것이 그녀의 의도였던가. 자신은 죽음을 각오했으니 그런 여자를 사랑하는 실수 따위는 하지 말라고 했던 당부는 이런 뜻이었던가.

정말로 그것이 그녀의 의도라면……

“나는 절대 그렇게 놔둘 수 없어.”

그가 고요한 불길을 태우며 맞물린 턱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식으로 혼자서 처량하고 쓸쓸하게 사라져 버리도록 그냥 두고 볼 줄 알고. 결코 그렇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이자리스의 미래 따위, 그녀의 목숨 앞에 한 줌의 흙보다도 못한 것이었다.

그가 깨진 유리 조각을 스스럼없이 자각자각 밟고 걸으며 브리짓을 지나치더니 약초가 수북하게 쌓여 있는 테이블에 의자를 하나 더 붙여 앉았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여기서 공주님이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

“뭐라고?”

“불만이면 일 시켜.”

“돌았니? 여긴 내 공간이야, 당장 나가!”

“뻔뻔한 네 행태를 내가 지금 곱게 참아 넘어가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겨라.”

“악!”

졸지에 미친놈이 내 집에 둘씩이나 얹혔다고 브리짓이 악다구니를 썼지만 클로드는 눈 하나도 깜빡하지 않았다.

공주 없이도 잘 돌아가는 이자리스? 홀로서기? 그런 세상에 올 바에야 그냥 세상에 망해 버리는 게 더 나았다. 반대로 전부 다 망해 버리고 그녀만 잘 살게 된다면 그건 꽤 살 만한 세상일지도 모르겠지만.

콩나물 다지듯 약초의 이파리를 꼼꼼하게 떼는 그의 손길에 단호한 힘이 실렸다.

* * *

늦은 저녁이었다. 베레모를 눌러쓰고 코트 깃을 코까지 치켜올린 태리는 대화하며 지나가는 사람들 틈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걸어갔다.

브리짓의 찻집은 신시가지의 한가운데에 있어 오며 가며 많은 사람들과 스치게 되지만 방금 지나간 칙칙한 차림새의 사람이 공주라고는 다들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머리 위까지 올라올 정도로 높이 짊어진 배낭 속에는 숲에서 몬스터를 사냥하고 건진 부산물이 산더미처럼 실려 있어서, 어느 모로 봐도 멀리서 찾아온 여행자처럼 비추어질 따름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불이 꺼진 찻집을 빙 둘러보던 태리는 한가운데가 깨져서 두꺼운 커튼으로 막아 놓은 창문을 하나 발견했다.

이건 또 누가 와서 돌을 던진 걸까. 브리짓이 화가 많이 났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녀가 커튼을 걷고 밤바람이 드는 구멍 속으로 쏙 들어갔다.

무거운 배낭을 풀어서 바닥에 내려놓기 무섭게 주방 안쪽에서 사람이 후다닥 튀어나왔다.

“나 왔―”

“쉿!”

브리짓이었다. 양손에 비커와 실린더를 들고 용량을 재고 있던 친구는 깨진 창으로 쏘옥 들어온 태리를 보곤 ‘똑같네, 똑같아.’ 하고 구시렁대더니 얼른 입막음부터 시켰다. 그러더니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서 소곤거렸다.

“오지 말지. 아니면 아주 늦게 오든가.”

“응?”

“누가 널 기다리고 있거든.”

“나를?”

그런 사람이…… 있나? 하고 갸우뚱하자 브리짓이 몸을 비켜서며 턱짓으로 한 방향을 짚었다. 어두컴컴한 한구석에 담요를 깔고 뻗어 있는 이즈의 뾰족 귀가 튀어나와 있었고, 그 옆 기둥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눈을 감고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내내 가사 노동에 시달린 건지 무릎 앞에는 버섯이 한가득 쌓인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클로드……?”

“너 올 때까지 자기는 저 자리에서 꼼짝도 안 한다고 지랄을 하더니, 정말 토 나올 정도로 망부석이더라. 밥도 저기 앉아서 먹고 잠도 저기서 잤어. 화장실 갈 때는 자기 부하 데려다가 대타까지 세우는데 완전 미친 거 아니니?”

뿐인가. 행여나 브리짓이 태리에게 오지 말라고 몰래 전갈이라도 보낼까 봐 실시간으로 감시마저 당했다.

“내가 내 집에서 감시를 당해. 이게 말이야 뭐야. 널 그렇게까지 보려고 하는 이유가 대체 뭐냐고.”

“글쎄, 나도 잘…….”

나를 왜 보려고 했을까. 태리는 아무렇지 않은 척 브리짓의 투정을 받아 주며 중얼거렸지만 가지런하게 드리워진 속눈썹을 본 순간부터 이미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가슴이 깨질 것처럼 뛰고, 화롯불 앞에 선 것처럼 이마가 뜨끈해진다. 그를 만나선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기다렸다는 말에 다리가 먼저 움직이려는 것처럼 들썩거렸다.

“잠든 거야?”

“억지로 재운 거지. 밥에다가 독한 뱀술을 타서 먹였거든.”

뭐? 태리가 깜짝 놀라며 왜 그랬냐고 질책하듯이 쳐다봤다.

“저 사람은 술 못 먹어. 그런 거 먹이면 안 돼.”

“그러거나 말거나.”

내 알 바냐고 브리짓이 흥 콧소리를 냈다.

“한 다섯 방울? 그거밖에 안 떨어트렸어. 그거 먹고 쓰러질 줄 누가 알았대? 그리고 몰래 먹인 것도 아냐. 미리 알려 줬다고. 그런데도 거절하지 않던걸. 한 숟가락씩 퍼 먹을 때마다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긴 했는데 어쨌든 다 지 손으로 퍼 먹은 거야.”

“왜 이기지도 못하는 술을…….”

“때로는 그런 독한 거라도 몸에 넣어야 버틸 수 있는 시기가 있지 않겠어.”

알코올 몇 방울을 위장에 집어넣고 비틀거리던 녀석은 술만 들어갔다 하면 태리를 찾았다.

하지만 그게 녀석의 술주정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는 멀쩡한 정신일 때에도 그녀만 찾았으니까.

발소리를 죽인 태리가 조심스럽게 잠들어 있는 클로드의 앞에 주저앉았다.

혈관 속을 맴도는 술기운 때문에 고통스러운 건지 미간에 깊은 고랑이 파여 있었다.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손가락으로 살살 문질러 인상을 펴 주며 소리 없이 입 끝만 올려 웃는다. 그 감촉을 느낀 건지 새카맣고 긴 속눈썹이 흔들리더니 순식간에 회색 갈퀴 같은 눈동자가 떠올라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

태리는 얼른 손을 내려 숨겼다.

“진짜 왔네.”

술에 혹사당해 평소보다 더 낮게 잠겨 버린 목소리 때문이었을까. 눈을 뜨자마자 그녀를 알아본 클로드의 분위기는 예상외로 단정하고 체념적이었다.

마치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 이곳에서 혼자 아주 많은 마음의 정리를 한 사람같이.

등을 떼며 일어설 때 비틀거리기에 태리는 얼른 클로드의 팔을 잡아 주었다가 가까이에서 눈이 마주치곤 도로 황급히 떼 버렸다.

그녀가 잡았었던 제 팔을 물끄러미 내려다본 클로드는 탁한 눈빛으로 입술을 꾹 깨물었다.

“…….”

왜냐하면 자기가 생각해도 스스로가 너무 우스워서.

팔을 잡힌 순간 가슴 안쪽이 꽉 조여들었다가 펴지며, 이것이 바로 심장이 뛴다는 느낌이라는 걸 그 순간에 알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죽음에서 살아 돌아왔을 때보다 더 벅찬, 이를테면 살아 있는 감각이었다. 어째서 심장이 뛰는 걸 사람이 살아 있는 증거라고 말하는지 이해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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