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3화 (163/186)


 

163

두 사람은 그 기간 동안 한 번도 서로를 찾지 않았고, 한 번도 만나지 않았으며 어떤 식으로든 서로에게 연락을 취하지도 않았다.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 어떻게 지내는지조차도 알려고 하지 않는 분위기. 누가 봐도 헤어진 연인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우습게도 단 한순간도 그렇게 냉랭해 본 적 없는 연인의 결별이란 그들이 이전에 얼마나 서로에게 다정했고 얼마나 서로를 생각했었는지를 더욱 강렬하게 부각시켰다.

말은 못 하고 있지만 둘의 관계를 반대하던 사람들은 연인의 결별에 대해 묘한 죄책감과 양심의 가책들을 느끼고 있었다.

제드도 줄곧 반대하던 입장이었으므로 역시나 거기서 자유롭지 못했다.

저렇게나 좋아해서 죽고 못 사는데 그걸 기어코 헤어지게 만든 건…… 이건…… 어쩌면 우리가 정말 큰 잘못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오늘은 또 어떤 꼴을 하고 있을지.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한 그가 단장실에 똑똑 노크를 한 후 들어갔다. 그리고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광경에 바로 곡소리를 냈다. 아이고.

하루하루 여기서 얼마나 더 나빠질 수 있는지 실험해 보는 중인 건가.

잠을 안 잔 건지 두 눈이 터질 것처럼 충혈된 채로 꾸역꾸역 서류를 붙잡고 있는 클로드의 광인 같은 꼴이 드러났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실연당한 남자치고 저 정도면 멀쩡하게 앉아서 일도 하는데 나름 괜찮은 상태가 아니냐고 할 터였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클로드는 결코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반쯤은 미치광이 상태로 나머지 반쯤은 미치지 않기 위해서 저러고 있는 것뿐이다.

‘이러다가 송장 하나 치우겠네.’

차라리 힘들다고 파업이라도 하든가. 실연당해서 아무것도 못 하겠다고 식음을 전폐하고 몸져눕기라도 하든가.

이러다가 아무 때에 픽 쓰러져서 그대로 죽어도 상관없다는 태도로 몸을 혹사해 가며 일하는데, 저게 대체 어딜 봐서 정상이라는 소린지.

생기 없는 두 눈에 독기만 가득하게 차오른 걸 보고 제드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세상 사람들은 저 잘난 기사가 이 작은 방 안에 틀어박혀서 저 모양 저 꼴로 실연의 상처를 겪고 있는 줄은 아무도 모른다. 정말 꿈에도 모를 터였다.

퀭한 눈빛이 거미처럼 기어서 올라왔다. 제드를 발견하자 동공 한가운데가 무시무시하게 번뜩였다. 퀭한데 거기다가 번뜩이기까지 하니 얼마나 소름이 돋는지 제드가 질겁해서 히익 하고 물러서는데도 클로드는 변함없이 그 말부터 시작했다.

“내놔.”

“하아, 정말. 대장!”

“내놓으라고.”

“이제 이런 거는 그만둡시다. 이제 와서 이게 다 무슨 소용이에요!”

가서 좀 쉬든가 좀 눕든가 아님 뭘 먹든가!

그러나 곧 사람 하나를 손쉽게 썰어 낼 것 같은 분위기에 제드는 쓸모없는 설득을 관두고 잽싸게 꼬리를 내린다. 그가 알았다면서, 주겠다면서 옆구리에 끼고 왔던 서류를 올려놓은 다음, 남들 눈에 보이지 않도록 가슴팍에 숨겨 넣어 온 편지 묶음을 차례차례 꺼내 놓았다.

클로드는 서류는 뒷전이고 묶여 있는 편지들을 낚아채 그것부터 맹렬하게 훑어봤다.

수신자 자리에는 모조리 공주의 존함이 적혀 있었다.

그러니까 즉 저것들은 제드가 호텔 221호 함의 우편을 빼돌린 결과물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한창 미리엘이 실종되고 그 배후로 태리가 지목받아 위협받고 있었을 시절에, 하도 그녀 앞으로 협박 편지나 도전장을 보내는 놈들이 많아서 클로드의 명으로 제드가 그것들을 빼돌린 뒤 내용을 확인하고 다시 안전한 것들만 골라서 돌려다 놓곤 했던 적이 있었다.

더는 그녀가 위험해질 일도, 아니, 있다 해도 헤어진 사이이니 신경 쓸 이유도 없는데 클로드는 매일 아침마다 제드를 보면 득달같이 그 업무부터 챙기려 들었다.

“협박 편지 같은 거 없어요.”

“…….”

“꼼꼼히 봐도 이젠 없다고요!”

지금까지 그딴 걸 보낸 놈들은 모두 쥐도 새도 모르게 공관으로 끌려와 클로드의 손에 의해 칼같이 처단당했다. 편지라면 아주 학을 뗄 정도로 지독하게 혼쭐이 났으니, 더는 그런 짓을 할 만한 간덩이가 남아 있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니 제발 이 짓 좀 그만두라고 말렸더니, 클로드가 버럭 성을 내며 그런 제드를 밀쳤다.

“없긴 왜 없어.”

벌써 여러 개를 꺼내 읽은 그가 편지지를 잡고 있던 두 손을 부들부들 떨더니, 급발진하는 경주마처럼 종이를 와자작 구겨서 짝짝 소리가 날 정도로 갈기갈기 찢어 던져 버렸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남의 앞으로 온 걸!”

저런 볼썽사나운 인간 같으니라고! 난리를 피우는 대장을 대신해 제드가 황급히 바닥으로 떨어진 가련한 종잇조각들을 수거했다.

그러다가 무심코 보이는 온전한 문장 한 줄을 읽곤 얼굴이 돌처럼 굳었다.

“이전부터 아름다우신 공주님의 용모에 깊은 탄복을…… 헉! 이거 설마!”

“그래…….”

클로드가 낮고 살벌한 웃음을 깔며 몇 개의 편지들을 통째로 잡아서 구겨 버렸다. 주먹 안에서 쥐어짜듯이 잡고 꽉 힘을 주는데 그에 맞춰 책상이 경련 난 것처럼 위태롭게 떨렸다.

이자리스에는 공주를 싫어하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다. 거꾸로 그녀를 좋아하는, 아주 좋아하는 사람들도 무척이나 많다.

비단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그녀의 눈부신 외모와 아름다운 성품을 찬양하는 이들이라면 차고 넘칠 정도로 쌓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공주가 약혼자였던 기사와 헤어졌다. 이제 그녀의 옆은 공식적으로 빈자리가 되었으니 그간 클로드에게 쫄아서 공주에게 마음이 있어도 표현하지 못하던 자들이 득세하는 날이 온 것이다.

“다 죽여 버리겠어…….”

하지만 그 틈새를 구질구질한 전 애인은 전혀 허용할 의사가 없었다. 핏발 선 눈동자가 괴물처럼 부릅떠졌다.

“가서 이거 보낸 놈들 전부 다 찾아와.”

“왜요. 어, 어, 어쩌시려고!”

“나쁜 놈들일 것 같으니까 잡아다가 족치려고.”

“미쳤……! 대장, 이러다가 진짜 살인자가 되고 싶으신 겁니까? 정신 차리십시오.”

“난 아주 멀쩡하고 맨정신이다.”

“웃기지 마요! 대장은 이제 공주님 건드리지도 못하는데 그 와중에 들이대는 놈들이 있으니까 열받는 거 아, 제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총독이 죄 없는 민간인을 잡아다가…… 으악!”

“내 상황 일일이 설명하지 마! 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자세하게 풀어서 얘기하지 말라고!”

다른 사내들이 보낸 무수한 연애편지들이 성난 클로드의 손에 의해 내던져져 우수수 바닥으로 떨어졌다.

난 이제 손도 못 대는데. 하루에도 수십 번씩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필사적으로 참고 있는데 어느 망할 자식들이 감히…….

제 화를 자기가 이기지 못하고 그가 책상을 주먹을 쾅 내리쳤다.

흩날리는 편지 봉투 속에서 허우적대던 제드는 아구구 앓는 소리를 내며 클로드가 사방팔방으로 던져 버린 그것들을 일일이 주워서 수거했다. 팔자도 사납지. 이런 폭풍 같은 이별 전쟁에 끼어 휘말리다니.

‘신이시여, 정녕 우리 대장을 어찌하면 좋습니까. 성하께서도 아무래도 손을 놓으신 것 같나이다!’

난장판이 된 이 상황을 그나마 조금이라도 뒤치다꺼리해 줄 수 있는 인물은 클로드의 형인 미리엘뿐이다. 하지만 저 미치광이 인간을 어떻게 좀 도맡아 달라는 제드의 호소를 듣고도 미리엘은 그냥 저대로 놔두는 게 제일 상책일 거라고 책임을 회피했다.

당연히 제드는 동의하지 못했다.

그냥 두라니. 저걸 어떻게 그냥 두라고. 저 꼴을 좀 봐라. 저 인간 꼬락서니를 좀 보란 말이다!

“다 주웠으면 이리로 가져와. 여기다가 놔.”

“아니, 자기가 던져 놓고……!”

바닥을 기어 다니며 편지를 줍던 제드는 길길이 날뛰는 클로드의 명령에 참다못해 소리쳤다.

“헤어졌으면서 뭐 하러 이런 걸 모읍니까?! 헤어졌으면 버려요!”

“내가 아무 짓도 안 하고 놔두는 건 다 이유가 있어서야. 여러 말 하게 만들지 말고 가져 와, 당장.”

“이유는 무슨 놈의 이유. 미련 있어서 그런 거겠지. 헤어지고 하루도 못 버텼으면서…….”

“무슨 하루야! 일주일이나 버텼어!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고 일주일이나 잘 버텼다고!”

“그런 걸 보고 죽지 못해 산다고 표현하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궁상떨 거면 차라리 그냥 가서 빌어요! 죽어도 못 헤어지겠다고 바짓가랑이 붙잡고 매달리면 공주님 마음씨에 절대 외면하지 못할 거라는 거 모릅니까?!”

갖은 성질과 패악을 부리며 질투심을 맹렬하게 뿜어내던 클로드는 제드의 핀잔에 가슴에 총이라도 맞은 것처럼 멈칫했다.

그러더니 곧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처럼 처량하고 상처받은 눈동자를 떨어트렸다.

천하의 그 클로드 데본셔가. 인생에서 무엇 하나 두려울 것도 아쉬울 것도 없어서 황제조차 가소롭게 보는 그 겁대가리 없는 남자가.

“……알았다고 했어.”

“예?”

“알았다고 했다고, 내가. 그렇게 해 주기로 약속했으니까.”

절구공이로 목구멍을 꾹꾹 눌러 짓밟듯이 그가 꽉 막힌 음성으로 말했다.

“필요 없어, 나도. 그렇게 못된 여자. 이제 나도…… 필요 없다고.”

내가 왜 붙잡아. 내가 왜. 내가 뭐 하러 그런 미운 여자를 붙잡아.

“진짜 필요 없어……. 안…… 안 봐도 돼.”

피폐해진 주인을 따라서 엉망으로 흐트러진 책상 끝만을 목적 없이 만지작거린다. 제드는 안타까운 심경으로 그 하릴없는 손동작을 좇았다. 울음을 참는 것처럼 손끝을 미세하게 떠는 게 가여웠다. 그런 여자는 필요 없다고, 다신 안 봐도 된다고 하는데 그렇게라도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참고 있다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왜 그런 멍청한 약속을 해 줬습니까. 어차피 그리워할 거면서.”

“그립지 않아.”

“그 도움도 안 되는 거짓말 좀 작작해요. 공주님 보고 싶잖아요.”

“보고 싶지…… 않아. 그냥…… 그 사람이 없어서 죽고 싶을 뿐이지.”

안 봐도 된다고 하지만, 못 보면 죽을 것 같다는 소리에 제드는 더욱 미치고 환장하겠다는 듯이 가슴을 퍽퍽 쳤다. 아이고, 답답해. 옆에서 지켜보다가 속병이 나기 전에 저 화상을 어떻게든 처리해 줘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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