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2화 (162/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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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을 회피하듯 그의 발치에만 못 박혀 있던 태리의 얼굴이 들어 올려질 때까지 또 긴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도 클로드는 그녀가 자신을 바라볼 때까지 끈질기게 참고 기다렸다. 

마주하고 나서도 둘 사이에서는 누구 하나 먼저 쉽게 소리 내는 사람이 없었다.

태리는 겨우 고개를 들어 바라보기만 했을 뿐 대화를 원치 않는 눈빛이었다.

난 지금 가장 꿈에 부푼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는데 당신은 왜 그렇게 절망이 터지기 일보 직전의 얼굴인지. 직감만으로 상상했던 두려움보다 더 큰 두려움이 혀를 바짝 마르게 했다.

주먹을 쥐고 있던 손이 스르르 펼쳐져 손바닥을 내보인다. 빛나는 반지 한 쌍이 서로 어깨를 기댄 채 놓여 있었다.

“앞으로 내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은 전부 세상 사람들의 귀로 들어가게 될 겁니다.”

공주의 부군. 소공작의 아내.

자신이 누구의 편에 서 있고 누구를 보호하고 있으며, 어느 쪽이 진심인지를 이것으로 세상에 공표하게 될 테니 틀림없다.

클로드는 반지를 잡고 그녀의 손등 아래에 한쪽 무릎을 접어 꿇었다.

“이 반지의 주인은 오직 사랑하는 나의 아내뿐입니다. 반지의 주인이 곧 나의 주인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게 하는 증표입니다. 평생 그 어떤 것보다도 당신의 마음을 소중히 여길게요. 내가 언제 어디에서든 당신에게 가야 할 길을 헤매지 않도록 부디 나와…… 결혼해 주십시오.”

온종일 종종거리며 연습한 말이 마침내 새벽의 고요한 숲길에서 흘러나왔다.

깊게 잠겨 든 목소리로 청혼한 남자는 단단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어디에 남은 인생을 쏟아야 할지를 정확하게 찾아낸 사람 같았다.

결혼해 달라는 정중한 청혼에 태리는 기쁨과 행복으로 뒤엉켜 아프게 뛰고 있는 심장을 부여잡는다.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나는데 왜 이렇게 속이 헐 것 같은지. 가슴이 먹먹해서 호흡이 벅찼다.

반지란 속박과 소유의 증거물. 그런데 그는 그녀에게 자신의 인생을 통째로 바쳤다.

그래서 이 말을 듣기 전에 떠나고 싶었었다. 이별을 향해 흐르는 시간에 서두른 한 걸음을 보태기가 싫어서. 그런데 그가 들려주는 말은 그것보다 더 멋지고 귀한 것이었다.

“예전에 내가 이게 사랑인지는 모르겠다고 했던 말…… 그때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사랑이 맞아. 사랑이 맞았어. 당신을 만나고 하루도 사랑하지 않은 날이 없어. 그러니까…… 나 한 번만 받아 줘.”

준비해 온 대로 훌륭히 다 해내 놓고 귀 끝이 붉어진 채로 매달리는 잘생긴 남자의 얼굴이 무척이나 순수하고 맑았다.

당장이라도 달려 안겨서 나도 사랑한다고 조를 수밖에 없는 얼굴이었으나 태리는 이를 악물어 그 욕심을 참아 낸다.

반지가 올려진 손바닥 위를 헤매며 허공을 배회하던 손길이 그것을 집는 대신 허무하게 떨어져, 꿇어앉은 그를 끌어 올렸다.

“오늘 꼭 해야 될 말이란 건 이제 다 한 건가요.”

“다 했습니다.”

“그럼 내가 답변을 할 차례네요.”

곧바로 대답을 준비했다며 끌어 올린 공주의 음성은 황량하고 쓸쓸하며 그림자가 짙다.

그래서 클로드는 다시금 등골로 스미는 불길함을 느꼈다. 지친 목소리가 흘러나온 그녀의 입가에는 어두운 숲길의 반딧불처럼 희미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동안 우리는 서로 아주 훌륭한 동업자였어요. 난 처음부터 당신이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란 걸 알았죠. 이 사람만이 나를 여기서 구원해 줄 수 있을 거라고……. 아마 그래서 그렇게 겁도 없이 당신에게 쉽게 말을 걸었었나 봐요.”

옛날이야기를 풀어놓으며 그녀가 기운 빠진 눈썹을 내렸다. 미래에 이런 사이가 될 줄 알았더라면 그때 그렇게 쉽게 말을 거는 게 아니었는데. 과거의 자신은 오판했다. 또한 너무나도 오만했고.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어떻게 그렇게 쉽게 생각했었는지 나 자신이 이해가 가질 않아요. 그때의 나는요, 우리가 적당히 필요한 만큼만, 딱 원하는 순간까지만 갔다가 금세 흩어질 수 있는 사이라고 여겼어요. 도중에 길이 달라지면 조용히 멀어질 수 있을 거라고.”

눈가로 서늘한 물방울이 튄 것처럼 그녀가 다시 시리게 미소 지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네요. 당신과는 하룻밤 멀어지는 것도 이렇게나 힘들어요. 실은 그래서 몰래 나왔어요. 깰 때까지 기다렸다가 얼굴을 보고 나면 영영 작별하기 힘들 것 같았거든요.”

이럴까 봐 얼굴도 안 보고, 인사도 없이 나온 건데.

하지만 그래도 먼저 헤어짐을 준비하고자 한다면 마지막까지, 끝까지 제대로 말하는 게 더 나았을 것 같았다. 자신이 더 미움받더라도 그것이 그에 대한 배려가 아닐까. 오늘 청혼을 해 온 남자에게 태리는 오늘 이별을 고할 결심을 했다.

“우리가 수도원에서 했던 약혼 기억하나요.”

클로드는 어두워진 낯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원할 때 헤어지기로 약속했던 것도 기억해요?”

이번에는 끄덕이지 못한다. 대신 상처받은 표정으로,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눈가를 붉게 물들였다.

덩달아서 쏟아지는 눈물을 참아 가며 태리는 한 자, 한 자 정성스럽게 쌓아 온 이별의 말들을 그 앞에 꺼내 놓았다.

“당신과의 약혼을 지금 이 자리에서 끝내길 원해요. 함께 하는 동안 난 아주 많이 행복했어요. 하지만 그 반지를 받을 만한 자격은 얻지 못했어요. 내가 당신과 함께 더 많은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여자가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아 버렸거든요. 그러니까 이만 여기서 헤어져요. 고맙고 미안해요.”

끝.

우리는 여기에서 이것으로 이만 끝.

사형 선고가 떨어진 것처럼 계약이 종료되었다.

그것을 실감하지 못하고 휘청거리던 클로드는 태리의 눈 속에 고인 연민을 발견하고 나서야 비로소 귀로 들린 음성이 현실임을 오롯이 자각해 버렸다.

그녀가 나를 연민한다는 것은. 그것은…….

버림받은 반지를 움켜쥔 채 눈물이 흐르는 눈가를 덮어 버리는 그를 두고 보지 못하고 태리가 두 팔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울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남자는 너무나도 서럽게 울고 있었다.

“아프지 말고 언제나 건강하게 잘 지내 줘요. 모든 일이 끝나고 나면 이자리스를 가져가요. 이자리스를…… 잘 부탁해요. 나는 죽음을 각오했어요. 죽음을 각오하고 떠나는 여자를 사랑하는 실수가 당신에게 생기지 않길 바라요.”

관계가 깨지는 것과는 상관없이 그에게 땅을 준다는 건 처음부터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태리는 제 목숨을 바쳐 지킨 땅을 클로드에게 맡기고 갈 수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든든하고 충실하고 아주 믿음직스러운 사람이니까.

끌어안은 목을 더 꽉 조여 안으며 태리는 그의 뺨에 얼굴을 붙였다. 그가 숨을 떨며 울고 있는 게 느껴졌다.

“당신을 이렇게 상처 입혀서 떠나보냈으니 난 아마 아주 큰 벌을 받을 거예요. 당신은 내가 세상에서 알고 있는 가장 완벽한 사랑이거든요.”

“제발 가지 마…….”

“잘 있어요.”

흐느끼는 뺨을 쓰다듬어 주던 체온이 결국엔 클로드를 떠났다.

이제 태리는 그를 온전히 놓는다. 그에게서 받아 간직하고 있던 모든 것들을. 무엇을 이리도 많이 받았는지. 하나씩 덜어 내는 데에도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까지 안고 있다가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야 그녀가 내려놓은 것은 다른 것도 아닌 반지에 담긴 이 한마디였다.

사랑하는 나의 아내.

그 하나를 놓는 것이 어찌나 힘들던지.

울음을 떨쳐 내지 못한 입술이 귀 끝을 스치고 떠나갔다.

“잘 있어요. 사랑하는 나의 클로드.”

새벽 잎에 고인 이슬이 눈물처럼 나무옹이로 뚝뚝 떨어지고, 애상이 깃든 새들의 날갯짓이 쓸쓸한 바람을 몰고 오는 숲속에서 연인의 계약은 그렇게 황량히 종지부를 찍었다.

* * *

“근데 단장님이랑 공주님이랑 깨졌다는 거 진짜인 것 같……”

“쉿! 쉿!”

연무장에 모여서 떠들던 성기사들이 부단장 제드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후다닥 흩어지며 목검을 집어 들었다.

기사들이 하는 말을 못 들은 척 제드는 태연하게 지나갔지만 기둥을 돌자마자 눈썹이 쭈글쭈글하게 중심으로 모아졌다.

“야단났군, 정말. 이러다간 대장이 어떤 상태인지도 금세 다 퍼져 버리고 말 거야.”

그가 지끈거리는 골머리를 감싸 쥐며 클로드에게 전해 줄 서류 더미를 옆구리에 끼고 위로 올라갔다. 총독이 있는 방까지 얼마 되지도 않는 거리인데 늑장을 부리느라 거북이처럼 기는 속도였다.

아으, 정말 들어가기 싫다.

죽상을 하고 있는 그 얼굴을 또 어떻게 봐야 할지!

제드는 요즘 하루 일과 중 그의 대장을 만나러 가는 시간이 제일 고역이었다. 뭔 갱년기의 남성도 아니고 자신에게 퍼붓는 그 온갖 짜증과 화풀이란……. 가시방석도 그런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그가 위로 올라오자 다시 옹기종기 모여서 공주와 기사의 불화설에 대해 바쁘게 떠드는 기사들의 목소리가 공기를 타고 올라왔다.

“저것들은 조용히 좀 떠들 것이지.”

입이라도 다물게 시키고 왔어야 했나. 하지만 여기서 입막음시켜 봤자 또 다른 데 가서 금방 떠들고 다닐 게 뻔하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그냥 이 안에서 실컷 얘기하고 마는 게 더 나았다.

‘그렇게나 눈꼴 시릴 정도로 깨 볶더니 갑자기 하루아침에 이렇게 틀어져 버리는 게 말이 되냐고.’

나 모르는 새에 하늘에서 무슨 날벼락이라도 떨어졌었나. 그가 눈치 없이 화창한 하늘을 향해 눈총을 주었다.

그래, 공주과 기사는 이별했다.

그간 둘 사이에는 수많은 불화설이 나돌았으나 한 번도 그것이 진실이었던 적이 없었는데, 이번만큼은 그것이 진실로 판명 났다. 둘은 완전히 이별했고 모든 연락은 두절됐다. 오로지 당사자들만의 의지에 의해서.

누군가 처음 그 둘의 이별에 대해 이야기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 누군가가 말하지 않았더라도 냉담해진 연인의 관계에 사람들은 결국 알아채고 말았을 터였다.

총독은 수일 째 자기 방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고 있었고, 숲으로 들어갔다던 공주도 마찬가지로 며칠 연속으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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