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1화 (161/186)


 

161

놔두면 이렇게 사기도 잘 당하는 것 같은데, 정말 이 순수한 사람을 어쩌면 좋지. 

당신을 두고 내가 어떻게 떠나야 할까.

태리는 버석하게 웃는 미소로 꽃을 받아 귓가에 꽂은 뒤 클로드의 넓은 가슴을 베개로 삼아 그쪽 뺨을 포근하게 기댔다.

고민거리는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지만 안정적인 남자의 체온에 녹아 스르르 눈이 감겼다.

제 무릎에 올라앉아 곤히 잠든 태리를 클로드는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보는 것뿐인데도 심장이 수런거렸다. 졸아드는 것 같기도 하고 한 곳이 꼬집힌 것처럼 찌르르한 감각도 있다.

고른 숨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그녀를 두 팔로 튼튼하게 받쳐 안아 더 가까이로 붙이자, 그녀가 가진 부드러운 몸의 윤곽이 더욱 섬세하게 와 닿았다.

턱 밑을 간질이는 머리카락도, 그 밑으로 엿보이는 하얀 목덜미와 허벅지를 스치는 부드러운 살결도 모두 다 지나치게 자극적이다. 팔뚝에 불끈거리는 힘이 들어갔다.

이래서야 내가 잘 수가 없겠는데.

처음에는 장난 같은 충동이었지만 지금은 훨씬 더 격렬한 쪽으로 목울대가 꿈틀거렸다. 고개를 들어 까만 천장을 바라보고 있어도 뜨겁고 단단한 몸 위에 안긴 그녀의 부드러운 살결만이 느껴졌다.

잠든 공주의 뺨을 만져 보고, 얇은 허리를 쓸어 보고, 급기야 입술을 매만지길 수십 번.

조금만 더, 라는 열망을 버리지 못하고 그는 결국 고개를 숙여 도톰한 입술을 약하게 깨물어 빨았다.

잠든 그녀에게 자신이 얼마나 정신 나간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입술 위에서 뛰는 두근대는 맥박을 따라 턱을 벌리고 혀를 밀어 넣는다. 조심스럽게 움직여 가며 건드리고 헤집으려 하다 보니 흥분이 더욱 은근하게 달아올라서 좀처럼 그만두지를 못했다.

그만해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가 엎어졌다가 다시 치솟고 무너지길 여러 번이나 되풀이된 끝에 그가 질척이며 빠져나왔다.

깰까 염려했던 것과는 달리 다행히 태리는 깊은 잠 속에 빠져 있었다.

많이 피곤했나. 눈을 떠서 자신을 바라봐 주었으면 어땠을까 싶으면서도 한편으로 그녀가 안심하고 잘 자 줘서 기쁘기도 한 마음이 공존했다.

그래. 잘 자야지. 잘 쉬어야 하고. 다신 아프지 말고……. 머리를 숙인 그가 다시 한번 입을 붙이고 간지러운 입맞춤을 이어 갔다. 촉촉하게 젖어 든 감촉을 음미하며 그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 * *

새벽녘의 검푸른 하늘이 발밑으로 스며들었다.

소파 위에서 어울려 있는 채로 먼저 눈을 뜬 태리는 클로드의 품 안에서 찌뿌둥한 허리를 틀었다.

못 잘 줄 알았는데 어느새 잠들어 버린 걸 보면 어젯밤의 그 꽃이 정말로 효과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태리는 부스스한 머리칼에서 밤새 물기가 말라 버린 풀을 떼어 내곤 가는 숨을 내쉬고 있는 클로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이 든 그는 평화로운 얼굴이었다.

잠든 동안 혹시나 그녀가 소파에서 떨어질까 봐 깍지 끼운 두 손으로 다리를 받쳐 주고 있는 게 보였다.

하여간에 쓸데없이 성실하다니까. 태리는 다시 그의 가슴에 제 몸을 붙이고 품 안으로 얼굴을 박았다.

파고들 것처럼 코끝으로 비비듯이 장난치자, 그에게서 으음, 하는 나른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설마 일어난 건가 싶어서 쳐다봤는데 그건 아니고 그저 잠결에 흘러나온 소리인 것 같았다.

‘그런데 여기쯤에 뭔가 딱딱한 게 있었는데.’

얼굴을 묻었을 때 이마 부근에서 딱딱한 감촉을 느꼈다. 뼈는 아니고 근육도 아니다. 태리는 잠든 클로드의 셔츠 깃을 위에서 들춰 보았다가 이전에는 없었던 체인으로 된 목걸이를 발견하곤 밖으로 끄집어냈다.

처음에는 동그란 펜던트가 매달려 있는 것 같았는데 손바닥 위에 두고 꺼내 보니 크기가 다른 반지 한 쌍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거였구나. 나한테 이걸 주려고…… 이 말을 하려고 했던 거였어.’

누구처럼 순진한 바보가 아닌데. 어젯밤에 더듬대던 말과 같이 살자는 얼렁뚱땅한 제안에 눈치를 채긴 했었다.

그가 제게 정말로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다는 게 무슨 뜻이었는지.

떨리는 손으로 작은 반지를 골라 네 번째 손가락에 집어넣어 보았다. 반짝거리는 게 예뻐서 한참을 빼지 않고 있었는데 클로드가 몸을 뒤척이면서 움직여 버리는 바람에 얼른 그것을 빼내어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고마워요…….’

다정하기 때문에 더욱 슬퍼지는 순간들이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것들과 아무리 애써도 받을 수 없는 마음들이 그러하다.

하필이면 이토록 다정해서 눈물짓게 하는 사람.

태리는 눈을 감고 클로드의 입가에 가벼운 입맞춤을 남겼다. 그의 못다 이룬 청혼에 ‘좋아요’라는 말을 남기지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대로 엔딩을 맞아 자신이 사라지게 된다면 이 사람은 그 모습을 가장 보여 주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마지막 운명이 찾아왔을 때 제 곁에 그가 있지 않았으면 했다.

벽돌 같은 일기장을 발판처럼 밟고 조심스럽게 단단한 팔 속에서 빠져나온다. 그런 뒤에는 언제든지 나갈 수 있도록 싸 놓은 배낭을 어깨에 짊어졌다.

오늘만큼은 도망치지 않고 함께 있고 싶었는데…….

하지만 그가 자신에게 하려던 말을 지금 확인했으므로 그녀는 떠나야 한다. 눈을 뜬 남자는 언제고 못다 한 청혼을 마저 완성하려 할 터였다. 그 말을 듣기 전에 사라지고 싶었다.

‘나는 공주로서의 길을 선택했어요.’

그 길을 혼자 가기로 결심했어요. 그건 아주 고독하고 슬픈 일이 되겠지만 절대로 당신에게 그 슬픔을 나눠 주고 싶진 않았다.

나가기 전 태리는 메마른 재채기 풀을 자신의 빈자리를 대신하도록 그의 무릎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기도했다.

‘이 밤에는 그에게서 걱정과 고민을 모두 가져가고……’

내일 밤에는 사랑마저 덜어 가라고.

감히 마법조차도 될 수 없는, 미신에 지나지 않은 작은 풀 한 포기지만 기대어 부탁할 수 있는 것도 이것뿐이었다.

미적거리며 무릎 앞을 서성거리던 발걸음이 새벽의 찬기와 함께 홀연히 사라졌다.

* * *

허전한 빈자리에 클로드는 얼마 가지 않아서 눈을 떴다. 늦게까지 잠들지 못하고 설치다가 겨우 어렵사리 들었던 터라 몸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허전함을 느끼자마자 그는 곧바로 벌떡 일어난다.

바닥으로 떨어진 들풀을 밟고 지나가며 그는 크지 않은 오두막을 황급히 뒤졌다.

그러나 태리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어디에도 없었고 잠자는 그를 홀로 두고 나가 버렸다는 증거로 배낭이 사라졌다는 것만을 똑똑히 확인했을 뿐이었다.

이 이른 아침에. 이제 막 동이 튼 새벽에.

눈을 뜨자마자 보게 될 사람이 그녀일 거란 생각에 기뻤는데 말도 없이 사라져 버리다니.

클로드는 급하게 겉옷을 챙겨 두르며 뛰어나갔다.

뛸 때마다 같이 목에서 흔들리는 반지를 움켜잡았다. 그녀가 반지를 끼는 장면을 꿈속에서 몽롱한 채로 보았던 것 같기도 했다.

하아, 어제 제대로 했어야 했는데. 이걸 꼭 전해 줬어야 했는데. 반지는 여전히 그의 목에 걸려 있었다.

새벽의 습윤한 공기 사이로 클로드는 미친 듯이 태리를 찾아 뛰었다. 젖은 낙엽 위로 부츠가 밟고 지나간 자국이 아직 선명하게 남아 있는데도 좀처럼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다.

초조해진 마음에 클로드는 더욱 쉬지 않고 다리를 부추겨 빠른 속도를 냈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더 지난 후에야 겨우 안개 사이로 익숙한 등을 찾아낼 수 있었다.

큰 가방을 짊어지고 비탈길을 오르고 있는 작은 등이다.

그녀가 한 발, 한 발 내딛는 오르막을 클로드는 네발짐승처럼 단숨에 뛰어올라 따라잡았다.

“말도 없이 나가면 어떡합니까.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뒤를 따라가며 말했는데, 태리는 어째선지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렇다고 멈춰 선 것도 아니었고 그가 계속해서 쫓아오는데도 그저 앞으로 걷기만 했다.

“어딜 갑니까, 이 이른 새벽부터.”

“……왜 따라왔어요. 가서 더 자요.”

“어딜 가냐고 물었잖아!”

“볼일이 있어서.”

“무슨 볼일.”

“그냥 내 일이에요.”

그냥 내 일이라니. 그런 게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 대답이 어디 있어……. 하지만 답하는 태리의 어조는 평온했다. 황당한 클로드와는 달리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그가 부르는데도 아무런 대꾸도 돌아오지 않기 시작했다. 아니 부를수록 오히려 더 걸음이 빨라지기까지 했다.

작은 체구에 무거운 가방을 메고 서둘러 비탈길을 오르려 하니 세찬 숨소리가 잦아졌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무리해서 달아나려는 거지.

클로드는 줄곧 무시하려고 애쓰던 불안감이 다시 스멀스멀 고개를 치켜드는 것을 어찌하지 못했다. 또 한 번 그 장면이 떠올랐다.

꿈이라고 생각했던 것. 그녀가 반지를 끼던 모습. 끼었다가 도로 빼내던 감촉.

목에서 달랑거리는 반지의 존재감이 유난히 크게 느껴진다.

멈추지 않고 꾸준히 위로 올라가는 태리의 모습에 그는 오기가 서린 표정이 되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보낼 수도 없고 보내선 안 될 것 같기도 했다.

“할 말이 있다고 했잖습니까.”

“이미 한 거 아닌가요.”

“못 했습니다.”

“그럼 나중에 해요.”

“아니요, 지금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가려거든 마저 듣고 가요.”

“……바빠서. 나중에요.”

“아니, 지금 듣고 가.”

그는 달리 여기까지 온 게 아니었다. 보고 싶은 마음과 더불어 자꾸만 둘이 헤어졌다느니 뭐니 하는 불길한 소문들에 마음이 쓰여서 달려온 길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이러면 더욱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다.

그러나 듣고 가라고 강한 목소리로 권유했음에도 태리의 걸음은 여전히 그에게서 달아나는 쪽에 있었다.

클로드는 목에 걸려 있던 반지를 아예 빼내어 주먹 안에 쥐어 잡곤 도망치는 그녀의 앞을 가로막아 강제로 멈춰 세웠다.

“할 말이 있습니다. 꼭 오늘 해야 됩니다.”

“…….”

“그러니까 내 얼굴 좀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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