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0화 (160/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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꺄아악! 먼저 비명을 터트린 건 태리였다. 그다음에는 으아악! 하는 목소리가 덩달아 쫓아 나왔다. 

둘 다 기절할 것처럼 놀라서 서로를 향해 한참이나 그렇게 고함을 지르고 나서야 태리와 클로드는 같이 들썩이는 호흡을 몰아쉬었다.

오두막 주변에서 서성거리던 건 클로드였다.

대체 뭘 하느라 당황해서 열린 문에 이마를 맞아 엎어지고, 제 도끼 하나도 제대로 피하질 못해서 정수리가 쪼개질 뻔한 건지. 아니, 그보다 왔으면 왜 바로 두드리지 않고 앞에서 서성거린 건데?

미쳤어, 이 사람. 정말 미쳤나 봐!

도대체 어디에 정신을 팔고 다니는 거람. 어처구니가 없어서 크게 혼이라도 내고 싶었지만 클로드는 아직도 뭔가에 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닌 것 같았다.

얼마나 놀란 건지 그는 여전히 가슴을 크게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보다 못한 태리가 안으로 들어가서 찬물을 잔에 따라 가지고 나왔다.

마실 건지 물어보지도 않았다. 입에다가 대고 그냥 먹였다. 숨을 후욱후욱 쉬면서도 그는 그녀가 준 대로 얌전히 받아 마셨다.

보기보다 갈증이 많이 났던 건지 꿀꺽꿀꺽 목을 울리며 들어가는 소리가 매우 급했다.

또 줄까요? 하고 물으니 이번에는 제법 알아듣고 끄덕거리길래 그 뒤로는 물통 채로 들고 와선 두 잔을 더 먹였다.

이 늦은 시간까지 물도 하나 못 얻어 마시고 어디에서 뭘 하다 온 건지. 행색을 보아 하니 평소처럼 사냥터를 구른 것 같지도 않은데.

태리는 우선 한층 진정된 그를 데리고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방금 전 자신이 앉아 있던 소파에 그를 앉혀 두고 담요를 덮어 준 뒤 등을 쓸어 준다. 토닥토닥, 마치 자장가 같은 그녀의 규칙적인 두드림에 그도 서서히 안정을 되찾아갔다.

‘안 보려고 그렇게나 피해 다녔는데.’

이렇게나 순진한 얼굴로 느닷없이 찾아와선 자신이 애써 세워 놓은 방어막을 한 번에 뚫고 들어왔다. 태리는 한숨을 푹 쉬었다.

끊어 내야 하는데. 이래서야 매몰차게 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오랜만에 보니 설레고 들뜨는 것도 사실이다. 그녀가 두드리는 강도를 조절하며 얼떨떨해하는 클로드를 향해 캐물었다.

“여기까진 어쩐 일이에요?”

“그게…….”

“무슨 일 있었어요?”

“그런 게 아니고…….”

“아깐 나 보고 왜 그렇게 놀란 거예요?”

“별로 놀라지 않았…….”

“혹시 무슨 짓 꾸미고 있었나?”

“앗, 아, 아니!”

뭘 물어봐도 미지근한 반응이더니 마지막 질문에는 엉덩이에 벌침이 쏘인 사람처럼 고개를 퍼뜩 들고 강하게 부정한다.

맞네, 맞아. 꾸몄네. 태리가 그럴 줄 알았다며 몰아가는데도 클로드는 한사코 아니라고 주장했다. 누가 봐도 거짓말인 게 뻔히 보이는데도 죽어도 아니라고 잡아뗐다.

왜냐하면 그로서는 도저히 내가 저 밖에서 반지를 들고 청혼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당신이 갑자기 나와서 기절하는 줄 알았다고는 절대로 말할 수 없었으니까.

나랑 결혼해 줄래요, 그 한마디를 연습하다가 오늘 하루를 다 보냈다고는 절대로 창피해서 얘기할 수가 없었으니까.

그가 불편한 표정으로 자신의 가슴께를 만지작거렸다. 목걸이로 만들어 걸어 둔 반지 한 쌍이 셔츠 밑에서 간질거렸다.

아, 이걸 꼭 줘야 하는데. 그런데 아직 연습이 완벽히 되지 못했다. 하지만 꼭 해야 된다. 언제까지고 미룰 수 없다.

지금 이 상태로 해도 될까. 어른스럽게, 진지하게, 믿음직스럽게 보였으면 좋겠는데 그녀가 그렇게 생각해 줄까. 손바닥에 고인 땀을 꾹 움켜잡으며 클로드는 용기를 내어 태리를 불러 세웠다.

횡설수설한 말씨에 비해 목소리에는 빳빳한 각이 잡혀 있었다.

“뭘 꾸미는 게 아니고…… 할 말이 있어서 왔습니다.”

할 말? 태리는 갸우뚱하며 호기심을 보였다. 물 잔을 내려놓고 대번에 그 앞으로 걸어오기 시작한다.

아니, 왜 갑자기 다가오는…… 조금 떨어져 있을 때가 더 말하기 쉬웠는데. 클로드는 허리에 힘이 한 번에 확 들어가서 자세를 곧추세웠다. 긴장이 최고조에 달하고 입 안이 바짝바짝 말라서 또 갈증이 일었다.

별 조각을 나누어 담은 듯한 눈동자가 궁금증을 담고 그의 앞에서 깜빡거렸다.

“할 말이 뭔데요?”

“그러니까 그게 뭐였냐면.”

그래, 어서 해 보라는 눈짓에 왜 이다지도 진땀이 나는지. 겨……까지 희미한 소리를 내서 겨우 말하자 그녀가 알아듣지 못하겠다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뭐라고요?”

“겨, 겨, 겨, 겨어…….”

나랑 결혼해 달라는 말을 수천 번도 더 넘게 연습해 왔는데 정작 말을 꺼내려니 떨려서 제대로 된 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젠장, 이래서 조금 더 연습이 필요했는데. 후회가 밀려들었지만 시간은 그 순간에도 흐르고 있었다.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던 태리의 얼굴이 차츰 언짢은 방향으로 틀어지려 하는 낌새에 클로드는 마음이 급해졌다.

아아, 안 된다. 실망하게 만드는 것, 그것만은 절대로 안 된다.

한참이나 끙끙거리던 클로드는 김빠진 주전자처럼 식어 버린 태리의 눈빛에 무작정 떠오른 대로 얼른 뱉어 버렸다.

“겨, 겨, 겨울에 나, 나랑 같이 살래요?!”

그것은 연습했던 말도 아니었고, 원하는 방식도 아니었다. 믿음직스럽게 그리고 다정하게와도 전혀 맞지 않았다.

내뱉은 순간 실수했다는 걸 깨닫곤 일어나려다가 팔걸이에 올려져 있던 일기장을 떨어트려서 그만 하드커버의 모서리에 발등까지 찍히고 말았다.

“괜찮아요?!”

문제없다고 손을 휘젓지만 조금도 괜찮지 않다.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의 세기였는데 그렇다고 소리를 지르면 여기서 더 상황이 엉망이 될 거라는 걸 알고 있기에 고통을 삼켜 낸다.

하지만 소리는 사라지고 표정만 남아서 오히려 그 고통의 생생함이 더욱 얼굴로 잘 드러났다.

같이 살자는 말에 멈칫했던 태리는 고통이 박제된 듯한 클로드의 경직된 표정 앞에 결국 큰 웃음보를 터트리고 말았다.

정말 이 남자는 멍청하고 순진한 강아지 같았다.

바보가, 난 이곳에서 살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멍이 들었는지 한번 보자는데도 극구 거부하며 발을 숨기는 통에 그녀는 치료 대신 클로드의 발등을 대차게 찍은 일기장을 주워 들어 흔들어 보였다.

“그 책은 대체 뭡니까.”

“일기장이에요. 우리 아버지 거. 좀 보여 줄까요?”

아버님의 일기장……. 자연스럽게 머릿속으로 ‘아버님’이라고 지칭하며 클로드는 아직도 쓰라린 발등의 의미를 제멋대로 해석했다.

그러니까 누가 내 딸한테 청혼을 그따위로 하냐고 혼난 거였군.

1인용 소파에 둘이 앉기는 비좁아 태리는 클로드의 무릎에 걸터앉아 두꺼운 가죽 장정본을 펼쳐 주었다.

약간 신기하다는 정도로 읽던 클로드는 어린 공주가 등장하는 시점부터는 눈을 아주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글에 집중했다.

연인의 어린 시절을 공유하게 된 게 기쁜지, 질문도 여러 번이나 했다. 공주의 방이 그려진 삽화를 보고는 자연스럽게 손으로 만지려고 해서 태리가 얼른 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이 그림은 만지면 안 돼요.”

“아, 혹시 또 그 이상한 공간 마법입니까?”

“여긴 성이 아니라서 효과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난 한 번 당해 봤거든요.”

“그럼 정말 공주님의 방으로 가집니까?”

“그럼요. 그래서 벌써 다녀왔죠. 아주 짧고…… 좀 슬픈 여행이었어요.”

그곳에서 그녀는 잊고 있었던 자신의 운명과 재회했다. 아주 오래전에 살기 위해 스스로의 존재를 지웠던 한 어린 소녀를 통해서.

쓸쓸히 비가 내리는 듯한 그녀의 분위기를 알아챈 클로드가 일기장을 덮고 조용히 안아 주었고, 태리는 그로 인해 다시 자그마한 웃음을 되찾았다.

“이 일기장 속에 말예요, 내 얘기보다 빌의 얘기가 훨씬 더 많이 등장하는 거 알아요? 둘이 진짜 친했었나 봐요. 빌은 정말 우리 아버지의 소중한 친구였더라고요.”

태리는 클로드에게 빌에 대한 이야기를 속삭였다. 클로드도 형을 통해 대략적인 것들을 이미 전해 들었기에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를 금세 알아들었다.

그 영문 모를 소년이 사실은 빌도 아니고, 드래곤도 아닌, 진리의 바벨이라는 것까지도.

하지만 처음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혼돈에 빠졌던 태리와 달리 그는 전부를 알고 나서도 크게 흔들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소년의 정체가 뭐든 간에 처음 세웠던 목표에서부터 달라지는 건 조금도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소년은 여전히 그가 맞서서 쓰러트려야 할 상대이고, 그런 걸 생각하면 그에게 소년은 빌도, 바벨도 아닌 그냥 숱한 몬스터 중의 하나였다.

감당하기 힘들 만큼 강한 것뿐.

“아버진 빌이 누군지 어렴풋이 느꼈던 것 같아요.”

“아마도. 그래서 제 고모님께 도와 달라는 부탁을 했었겠죠.”

“하지만 아버진 결국 그렇게 됐어요. 이자리스와 함께 망가졌어요. 빌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음에도 그렇게 된 거죠. 그런 아이가 이젠 내 몫으로 남았고요.”

“무섭습니까.”

“아니요, 난 그냥 슬퍼요.”

모든 게 끝나면 당신을 잃게 될 테니까.

말없이 기울어진 미소만 덧붙이는 공주의 뺨을 클로드는 애정 어린 손길로 쓰다듬었다. 그녀의 눈가에 날개처럼 내려앉은 두터운 피로가 안쓰러워 그만 자라고 등을 토닥이다가 잊고 있던 선물이 생각나서 급하게 소매 속을 뒤졌다.

“이건 어디서 났어요?”

그가 꺼낸 건 재채기 풀이었다.

이름 그대로 코에 대면 재채기를 하게 만드는 들풀이라, 이 풀을 꺾어 얼굴 가까이에 두고 자면 재채기와 함께 걱정거리가 빠져나와 깊은 숙면을 이루도록 도와준다는 이자리스에서만 내려오는 오래된 미신을 가진 들꽃이었다.

“브리짓한테서 받아 왔나 보네, 그렇죠?”

받아 온 게 아니라 사정하고 구걸해서 얻어 온 것이지만 클로드는 그런 설명이라곤 일절 없이 태리의 손에 꽃을 쥐여 주었다.

“일단 좀 자요. 그렇게 빼꼼한 눈을 하고 버티는 게 난 더 걱정되니까. 그 찻집에서 가져온 거 맞습니다. 머리맡에 두고 자면 걱정을 덜어 준다고 했습니다. 인성은 좋지 않더라도 실력만큼은 확실한 의사 아닙니까.”

“그거 미신.”

“…….”

“완전 미신인데.”

효과 없는 뻥튀기라고 알려 주니 브리짓을 향해 고요히 이를 가는 클로드의 얼굴이 보였다. 그냥 받아 왔겠거니 했더니만 아무래도 엄청 비싼 값을 치르고 사 온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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