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9화 (159/186)


 

159

* * *

오랜만에 들른 자신의 호텔 방에서 태리는 묵직한 짐 가방을 내려놓았다. 지저분해진 옷들을 새것으로 바꾸고 필요한 물건들을 다시 채워 가기 위해서다.

빌을 만나고 온 이후부터 그녀는 대부분의 시간을 숲속의 마수 사냥에 소비하며 호텔에 거의 머무르지 않았다. 그것도 처음에는 이삼일에 걸쳐서 오다가 요즘은 아예 숲 안에 임시로 세운 간이 오두막에서 생활하다시피 하는 수준이 되었다.

어떻게 그런 곳에서 잠이 오냐며 다들 공주가 실성했다고 했지만 그녀는 그런 것쯤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자신은 영웅이 되어 이 게임을 끝내기 위해 온 사람이었으니까. 그 과업을 완수하고 나면 사라질 것이다. 처음부터 그렇게 사형 선고가 내려진 시한부 공주님이었다.

그러니 자다가 죽을 걱정쯤은 전혀 하지 않아도 되었다.

다만 신을 죽이러 가기까지에는 독한 마음이 필요해서 정이 깊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억지로 회피하고 있었다.

슬픔은 나만 가지면 되지. 그걸 주변 사람들에게 전염시키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모두는 바빴고, 그중에서도 클로드는 정말로 바빴다.

이때만큼 이렇게 이자리스가 위태로운 게 참 다행이라고 여긴 적이 없었을 정도로.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길을 엇갈리게 해 만나지 않아도 그는 섭섭해할 뿐 특별한 의심은 하지 않았다.

그와의 만남이 뜸해지자 둘이 헤어진 게 틀림없다고 말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는 것도 알았지만 그조차도 짐짓 모른 척했다.

물병과 수건, 갈아입을 옷, 약간의 먹을 것들을 쑤셔 넣어 얼른 호텔을 빠져나가려고 했는데,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건지 안시가 이미 방문 앞에 서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주님.”

공주를 모시는 여인은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여 정숙하게 인사한다. 가지런한 말씨에는 정이 듬뿍 묻어 있었다. 정을 떼려고 자주 보지 않으려 했는데 어째선지 못 본 새에 정이 더 깊어진 것 같았다.

“응……. 잘 지냈지?”

“저야 호텔에 편히 있지 않습니까. 고생하고 계신 건 공주님이시지요. 또 바로 숲으로 가시렵니까.”

“그럼. 기사들도 모두 애쓰고 있잖아. 내가 그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해야지.”

“하지만…….”

할 말이 많은데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모르는 사람처럼 안시는 모아 놓은 두 손을 꽉 여며 잡으며 목소리를 흐렸다. 삭이고 삭인 끝에야 다시 조심스럽게 가슴속의 염려를 털어놓았다.

“그래도 짐이 지나치게 무거우신 것 같습니다.”

짐.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건지 알아들었으면서도 태리는 이 가방을 말하는 거냐면서 말을 돌렸다. 부피가 커서 그렇지 무거운 건 하나도 없다고 밝은 척 연기했다.

“옷 때문에 그래. 장기간의 여정이 될지도 모르잖아.”

하지만 아무리 밝은 쪽으로 화제를 돌려도 안시의 어두운 낯빛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녀는 눈에 띄게 불안해하고 있었다.

별다를 게 없는데, 자주 못 뵐 뿐 평소와 똑같은 마중인데 왜인지 호텔 문을 나서는 공주님의 모습이 언제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서였다.

숲으로 들어가는 공주님을 그동안 수없이 봐 왔지만 이런 불안감이 드는 것은 그녀도 처음이었다. 그럴 리 없다고 믿으면서도 자꾸만 공주님이 돌아오지 않을 외길을 건너려는 것만 같다는 예감을 지우지 못했다.

“난 그럼 이만 가 볼게. 내 걱정은 말고―”

“공주님.”

“응?”

“저는 그동안 이곳에서 손님들을 받으면서 숲으로 들어가는 많은 모험가들을 만났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모험을 그저 무모한 것에 인생을 소비하는 일이라 폄하하겠지만 사실 모험가들은 그렇지 않았지요. 모험을 떠나는 이들은 늘 신중했습니다.”

“…….”

“숱한 지식을 섭렵하고, 함께 갈 동료를 모으고, 배낭 속에는 든든한 짐과 훌륭한 장비를 챙겨 물 샐 틈 없는 준비를 했지요. 돌아오기 위해서요. 그들은 돌아오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떠나는 것이 모험이니까요.”

“…….”

“공주님께서도 그런 모험을 떠나시는 것이…… 맞지요?”

거짓으로 꾸며 낸 평화 속에 진실된 고요가 찾아들었다. 정적 속에서 안시는 그러하다는 공주의 긍정적인 대답을 기다렸다. 그것으로 불안감을 잠재우려 한다.

하지만 태리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숨기려고 발버둥을 치고 애를 써도 이렇게 속을 다 아는 사람들 앞에 서면 그 나약한 마음이 까발려지는 것 같아서 그저 슬프고 부끄럽기만 했다.

“그만…… 가 볼게.”

이야기가 길어지면 눈물이 날까 봐 원하는 대답 대신 멋대로 대화를 매듭짓고 돌아섰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더 보려고 하는 것처럼 안시는 포기하지 않고 종종걸음으로 따라왔다.

“제가 함께 갈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아니. 안시는 이곳에 남아서 이곳을 지켜. 우리에게는 모두 각자의 자리가 있을 거야. 난 그게 이자리스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해.”

분명한 공주의 명령에 서성거리던 발걸음이 바닥에 딱 들러붙는다. 공주님을 모시고 싶은데 모시지 말라는 게 그분의 의지라면 충직한 지배인은 차마 그 뜻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다음에 또 봐.”

그나마 후일을 기약해 주는 것이 이 순간에 얻은 가장 큰 위안이고 가장 큰 위로였다. 자신을 이 자리에 세워 두고 훌쩍 멀어져 가는 태리의 어깨 너머로 안시가 힘주어 말했다.

“힘든 일은 약혼자와 상의하세요. 그분 많이 좋아하시는 거 알아요. 많이 의지하는 것도 알고요. 제게 못 하시겠다면 그에게라도 하셔요! 꼭 하셔야 돼요, 아시겠죠?”

태리가 너무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 가서 마지막에 가서는 거의 외치다시피 한 당부였다.

들으셨겠지. 꼭 들으셨어야 할 텐데.

간절히 기원하듯 안시가 다시 한번 두 손을 꼭 맞잡았다.

* * *

컴컴한 한밤중이 돼서야 오두막의 문이 열렸다.

들어오기 전 입구에 서서 몬스터의 피를 뒤집어쓴 코트와 부츠, 모자를 벗은 태리는 종이로 접은 새를 오두막 처마 위에 올려 두고 문을 닫았다.

근처에 뭔가가 접근하는 것을 알리는 신호용 알람이었다.

온종일 사냥에 전력을 다한 몸이 피로를 내지르고 있었다. 이대로 아무 곳에서 쓰러져서 잠들고 싶었지만 오염된 피가 묻었기 때문에 씻지 않으면 안 된다.

미리 물을 채워 놓은 나무통 안에 들어가서 그녀는 꾸역꾸역 지친 몸을 움직여 씻고 나왔다.

씻은 후에는 더더욱 손 하나도 까닥이지 못할 만큼 나른해졌지만 기어코 근육통을 호소하는 몸을 이끌고 가 소파에 앉는다. 그러곤 작은 호롱불을 켜 오늘 밤도 어김없이 두꺼운 일기장을 꺼내 펼쳤다.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조금씩 읽어 나가고 있는 아버지의 유품이었다.

아버지가 죽기 직전까지도 지니고 있었던 물건이라는 생각에 애틋해서 한 장, 두 장씩 읽어 나가던 것인데 어느새 막바지에 이르러 몇 장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그동안 이것으로 향수와 그리움을 달랠 수 있었는데…….

얼마 남지 않은 페이지 수가 아쉬웠다. 열 장 남짓이나 될까. 아껴 둔 사탕을 조금씩 깨물어 먹듯 태리는 일기장을 무릎 위에 올려 두고 느릿하게 남은 글자들을 읽어 나갔다.

반쪽짜리 신이었다는 말대로 일기는 끝으로 갈수록 그녀의 아버지가 마법사에서 더 높은 존재로 변모하는 듯한 느낌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필체는 물론, 구사하는 문장과 어휘가 달라졌고 느낌도 초반과는 완전히 변했다. 전혀 다른 두 사람이 썼다고 해도 일리 있게 받아들여질 정도로 변화가 두드러진다.

최근 여러 교단의 성경을 구해다가 읽기 시작했다는 마지막 한 줄을 보고 다음 장으로 팔랑이며 넘겼을 때였다.

종이 사이에 끼워져 있었던 건지 반으로 접힌 쪽지가 아래로 떨어졌다.

뭐지? 읽고 있던 일기장을 덮어서 팔걸이에 올려 두고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쪽지를 주웠다.

어딘가에서 급하게 베껴 써서 끼워 넣은 건지 쪽지 속의 필체는 일기장 속의 정갈함과는 다르게 휘갈긴 듯 날아가는 느낌이 강했다.

뭐라고 쓴 건지. 좁힌 눈가로 집중해 가며 태리가 한 자, 한 자를 읽었다.

“망각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자신의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라.”

어투로 보건대 어느 성경의 구절을 따다 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망각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대체 어디서 따온 문구일까? 이걸 왜 적어서 여기에 끼워 넣었을까? 아버지가 한 게 맞을까?

쪽지를 들고 이런저런 혼잣말을 중얼거려 보았지만 짐작이 가는 바가 전혀 없었다.

“물어볼 만한 사람이 있긴 한데.”

이런 부분에서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미리엘이었다. 다행히 만날 수 있는 상황이고. 다음 번 숲을 나갈 때 잊지 않고 챙겨 갈 수 있도록 그녀가 쪽지를 따로 빼내어 갈아입을 옷의 주머니 속에 넣은 순간이었다.

불현듯 창밖으로 푸드득거리며 날아가는 하얀 새의 날개가 보인다. 태리는 곧바로 흠칫하고 경계를 세우며 벗어 둔 무기를 챙겨 입구 옆에 등을 대고 붙어 섰다.

밖을 감시하던 종이 새가 떨어졌다. 무언가가 이 근처에 접근했다는 신호이다.

이 근방의 것이라면 남김없이 깡그리 처리했는데. 대체 이놈의 몬스터들은 얼마나 더 나와야 사라질 건지. 총을 미리 장전하고 바짝 긴장한 채 침입을 기다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상태로 몇 분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혹시 그냥 근처를 배회하다가 지나간 건가 싶었지만 문틈 사이로 귀를 대 보면 사람 말소리 같은 수상한 중얼거림이 쉴 새 없이 들려왔다.

중얼중얼. 중얼중얼.

똑같은 말만 계속해서 되풀이하고 있는 듯한데 혹여 무슨 사악한 주문이라도 외우는 건 아닌가, 하는 가정마저 들었다.

‘안 되겠어. 먼저 제압해야겠다.’

살며시 빗장을 뽑아 푼 뒤, 단숨에 문을 발로 쾅 차고 뛰어나왔다. 물컹한 뭔가가 문에 밀려 넘어지는 것을 감지한 것과 동시에 그녀가 도끼를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그리고 인정사정없이 내리찍었는데, 도중에 너무나 익숙하고 잘 아는 얼굴을 발견해서 급하게 날의 방향을 바꿨다.

퍼억!

놀란 토끼 눈을 하고 넘어진 남자의 귀 옆으로 아슬아슬하게 꺾인 도끼날이 흙 속에 박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