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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리가 누워 있는 동안 클로드는 하루하루를 두려움 속에 살았다. 내가 죽는 것도 아닌데, 내가 다쳐서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닌데……. 그런데도 두려움이 느껴지는 것, 그것이 진짜 생지옥이었다.
두려움은 금세 광기가 되어 덮쳐들었다. 사람이 미치는 과정이 꼭 이럴 것 같았다. 주인을 잃고 미치광이 야수로 전락해 버린 폐성의 그 수많은 소환수들의 처지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둘 말고는 아무도 없었던 길거리에 시간이 지나자 몇 명쯤 지나가는 행인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부둥켜안고 있는 공주와 기사를 흘겨보는 눈초리가 썩 곱지만은 못했다. 태리가 부스스한 미소로 몸을 떼며 말했다.
“역시 다들 싫은가 봐. 우리가 함께 있는 건.”
“그런 거 신경 쓰지 마. 불필요한 일이니까. 정 거슬리면 내가 해치워 놓을게.”
“해치워?”
“응, 그러니까 당신은 이제 딱 허락만 해 주면 되거든.”
당장 그녀의 손에 반지를 껴 주고 싶은 욕구가 샘솟았지만 떨어지는 태리의 뒤통수를 감싸 다시 품으로 잡아끌며 클로드는 뿌듯한 어깨만을 말없이 펴 보였다.
청혼 반지에는 그와 어울리는 근사한 말들이 필요할 테니까. 저와 결혼해 주십시오. 그 말의 가장 듣기 좋은 어조도 연구해 봐야 하고, 말을 꺼내기에 적절한 시간대가 언제일지도 고려해야 했다. 낮일지 밤일지. 또 수줍음이 많은 태리를 배려해 사람들이 없는 단둘만의 장소도 찾아 놓고 싶었다. 클로드는 무엇 하나 허투루 하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다.
“조금만……”
“응?”
“조금만 기다려 줘.”
저렇게 들뜬 걸 보니 뭐 뾰족한 수라도 생겼나. 태리는 아리송해하며 단단한 팔이 이끄는 품 안으로 빨려들어 갔다.
클로드의 가슴팍에 파묻힌 반지 케이스가 제 존재감을 알리듯 그녀의 쇄골을 지그시 눌러 왔다.
* * *
그날은 꼭 그녀가 어디를 가는지 아는 것처럼, 별것 아닌 것들이 시시때때로 도드라지며 신경을 찔러 왔다.
외출 준비를 하는데 위층에서의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고, 서두르지 않고 걸었음에도 매번 카펫이 발끝에 걸려 넘어지도록 유도했다.
늘 가지런히 색깔별로 맞춰 늘어져 있던 옷장 속에는 전혀 다른 색의 블라우스가 보기 싫게 섞여 있었고, 새로 마련한 깃펜의 촉이 약한 충격에도 부러졌다.
그럼에도 그런 사소한 거슬림을 제외한다면 여느 일상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수상하게 꿈틀거리는 곳이 있다면 그것은 태리 자신의 마음속이 유일했다. 언제, 어느 쪽 수풀에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독사에게 뒤꿈치를 깨물릴 수도 있다는 심정으로 맨발을 내놓은 채 길을 나설 채비를 하고 있었으니.
빵 조금과 과일이 든 바구니, 그리고 약병을 챙겨 그녀가 호텔 현관을 나섰다.
문턱까지 왔다가 들어가지 못하고 발걸음을 되돌리길 수일 끝에 어렵사리 도달한 길이다. 구름 사이로 드러난 도서관의 지붕을 보며 태리는 오늘만큼은 기어코 저 안으로 들어갈 결심을 했다.
언덕과도 같은 계단을 차박차박 오르다가 중턱에서 다시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본다. 처음 왔을 때는 못 느꼈는데 모든 것을 알고 난 뒤에 다시 보니, 도서관이 묘하게도 대서고가 있는 높은 성탑을 닮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무엇을 본 떠 지었는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도서관은 창밖으로도 모든 불이 어두컴컴하게 꺼져 있었다. 몇 주를 연속으로 폐관한지라 자주 찾아오던 이용객도 이젠 거의 없다시피 했다. 하긴, 이런 걸 열어 둘 만한 몸 상태는 아니겠지 싶었지만 의외로 출입구는 잠겨 있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 그간 한 번도 제대로 둘러보지 않았던 1층의 서가를 눈으로 훑어 가며 지나간다. 이자리스의 역사, 이자리스의 건축, 문화, 마법서, 교육……. 그리고 멈춰 서서 눈을 감았다.
‘이 모든 것들이…….’
이 하나의 공간이 빌의 거대한 머릿속이었다. 이자리스에 대한 그의 모든 지식, 그의 모든 기억이 책의 형태로, 건물의 형태로 형상화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황제 이오리아가 유리온실 속에 심어 둔 오렌지 나무가 그러했듯이.
태리는 착잡한 마음을 가지고 도서관의 천장 바로 밑에 자리한 빌의 은신처를 찾아 올라갔다.
그러곤 예전에 빌이 마법식을 풀어 해제해 보라고 했었던 비밀 벽 앞에 선다. 당시에는 그렇게나 복잡하고 어렵게 느껴졌던 주문은 그사이에 그녀가 이만큼이나 성장했음을 알리듯 처음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빠르고 쉽게 풀렸다.
벽 사이의 컴컴한 길을 따라 마침내 비밀의 방 안으로 들어온 그녀는 문턱에서 잠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이 앞에 서고 나서야 비로소 며칠 동안 내내 느껴졌던 긴장감의 출처가 이곳으로부터 흘러나왔단 걸 깨닫는다. 또한 1층의 서가가 그러했듯이 이 방 역시도 빌의 기억저장고나 다름없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이 작은 방이 실리안에 대한 기억 전부였다.
예상대로 배와 가슴을 붕대로 칭칭 감은 빌은 구석에 앉아 마치 병적으로 집착하듯 책장 속에 꽂혀 있는 책들을 쉼 없이 읽어 내리고 있었다. 태리는 다친 소년의 모습을 한 신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 바구니를 내려놓고 주저앉았다.
“괜찮아?”
“괜찮아?”
서로 눈이 마주친 동시에 나온 말이었다. 태리를 보자마자 눈물을 펑펑 쏟은 아이는 자신이 그녀를 공격했었다는 사실에 혼자 오랫동안 괴로워했었던 것 같았다.
“널 다치게 해서 미안해…….”
“괜찮아. 이제 다 나았어. 아프지도 않고.”
태리는 약병과 함께 싸 온 빵을 꺼내 놓았다. 먹지 않아도 상관없는 위대한 존재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래도 뭘 좀 먹었는지, 굶지는 않았는지 걱정이 되어서.
“과일도 있고. 마들렌이랑 마카롱도 좀 있어. 네가 좋아할진 모르겠지만. 싫으면 그냥 둬도 돼.”
“아냐! 난 좋아! 정말…… 정말 좋아해. 고마워.”
편식하지 않는 아이처럼 빌은 태리가 꺼내 놓는 것들마다 환하게 반기며 거리낌 없이 받아먹었다. 뭐든 좋다고 하며, 뭐든 맛있다며. 참 착하고 고운 아이였다.
볼까지 부풀리며 복스럽게 먹는 소년의 등을 도닥도닥 두드리며 태리는 공평하지 않다는 신들의 사랑에 대해 헤아려 보았다.
여신 아가사가 미리엘만을 유독 아끼듯이 자신의 아버지도 이 신에게 지독하게 사랑받았다. 그 마음이 얼마나 깊고 넓었으면 이토록 잊히지도 못하고 떠나지도 못할 정도일까. 그런 생각을 하니 허겁지겁 빵을 먹는 이 대단한 존재가 더욱 안쓰럽게 느껴졌다.
“갑자기 성으로 가서 미안해. 네가 미리엘을 납치했다고 오해했거든.”
“……해치려고 했던 건 사실이야. 그러니까 나한테 화를 내도 정당해.”
미움받을 걸 걱정하면서도 화를 내면 달게 감수하겠다며 소년은 의기소침하게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나 태리는 그러지 않겠다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히려 그동안 미처 전하지 못했던 감사 인사를 했다.
“서고에 들어가 보고 나서야 알았어. 네가 그곳에서 오랫동안 홀로 애써 줬다는 거. 숲이 저만큼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네가 내내 막고 있어 줬던 거. 혼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외롭고 지쳤니. ……고마워.”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정반대로 고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빌은 실감이 나지 않는 것처럼 눈꺼풀을 끔뻑대다가 잠시 후 얼굴에 해가 뜨는 것처럼 환하게 입이 벌어졌다. 이보다 더한 칭찬을 들어 보지 못한 아이처럼 음성에조차 기쁜 감정이 듬뿍했다.
“나, 나 얼른 나아서 갈게!”
그 말에 태리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처럼 슬펐다.
대체 이 아이가 알면서도 하지 못하고 있는 해주의 방법이 무엇일까 궁금했다. 영웅의 칼에 스스로의 목덜미를 내줄지언정 결코 입 밖으로 내지 않는 그 방법이란 게 무엇인지.
그걸 알아내지 못한다면 난 정말로 널 죽여서 이 이야기를 끝내야만 하는데. 그 길 말고는 다른 길은 없었다.
한편으로는 도저히 이 아이를 죽일 자신이 없어서 그냥 이렇게 살면, 하는 생각도 했었다. 과거의 모습은 영영 되찾을 수 없겠지만 그냥 이대로 이자리스를 유지한다면. 내가 사는 동안 최선을 다해서 숲을 지키고, 방어하고, 희생하면서 그렇게 산다면…….
‘……아니야.’
죽여야 한다.
‘죽여야만 해.’
태리는 추풍에 흔들리는 낙엽처럼 쓰러지려는 결심을 다잡았다. 죽이지 않으면 빌은 영원히 이곳을 떠나지 못할 터였다. 드높고도 드높은 신이 평생을 이 땅에, 저 숲에, 그 작은 성에 붙잡혀 살 것이다. 그러기엔 이 작은 소년이 너무나도 가엽다고 생각했다.
‘내가. 내가 널 죽여야 해. 내가 널 죽이는 게 나아. 내가……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이곳에 온 뒤로 오랫동안 떠올리지 않았었던 낯선 질문이 그 순간에 새삼스레 다시 되새겨졌다. 전혀 다른 세계의 문턱을 밟기 직전 눈앞으로 나타났던 그 이질적인 메시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