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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은 신 그 자체.
순식간에 가슴이 싸해지는 감각에 태리는 손발이 차게 얼어붙었다. 분명히 치료는 다 했다고 들었는데 얼음가시가 아직도 몸 어딘가에 남아 있는 건지 어느새 입술까지 얼어서 덜덜덜 떨고 있었다.
하지만 미리엘은 비밀의 누설을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도 그 거대한 진실을 혼자 가슴속에 숨겨 넣는 것이 버거웠던 모양이었다.
“공주님, 빌은 본명이 아닙니까?”
“아버지가 지어 준 거라고 들었어요.”
“그렇다면 그건……”
바벨의 줄임말일까요?
미리엘은 다시 한번 눈으로 물었고 이번에는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손수건으로 식은땀을 닦고 달달 떨리는 두 손을 꼭 움켜잡는 행동으로 둘 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얻었다.
진리의 바벨. 선왕 실리안을 광란의 마법사로 만들고 이자리스에 저주를 내린 그 신.
아니라고 우기고 싶었지만 빌. 그 이름에서 연상되는 건 그것 하나뿐이었다.
지금 마음속에 떠오른 게 사실이라면 이건 아주 무서운 이야기가 될 거라고 미리엘은 생각했다. 절대 이기지 못할 상대를 대상으로 싸워서 이기려고 하고 있으니까.
누가 신에게 대항할 것인가. 누가 감히 신과 싸울 수 있단 말인가. 대체 어느 용사가 그 길을 자청해 영웅이 되고자 한단 말인가.
그가 파랗게 변한 공주의 입술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자신의 추측을 더했다.
“편지의 내용은 빌을 확인해 달라는 게 아니었습니다. 빌, 그 이름이 맞는지를 확인해 달라고 했었죠. 그리고 확인해 달라는 게 이런 것이었다면 우리는 분명히 확인했습니다. 그 이름이 맞다는 것을요. 공주님의 부친께서도 소년의 진짜 정체에 대해 어느 순간부터 깨달으셨던 겁니다.”
빌이 바벨이라는 걸 죽기 직전의 왕은 알고 있었다는 소리였다. 자신의 작은 친구가 드래곤이 아닌 드래곤의 모습을 한 신이라는 것을.
태리는 충격으로 휘청거리는 몸을 가누지 못해 침대의 매트를 두 손으로 짚었다.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어. 하지만 아무리 믿지 않으려고 해도 이제껏 길을 몰라 헤맸던 모든 난제들이 빌이 바벨이었다는 그 한 줄로 모두 설명이 되기 시작했다.
어째서 그가 마지막 보스였는지. 왜 그의 죽음으로 게임이 끝날 수 있는지. 왜 그렇게나 이기기가 어려웠던 건지. 더불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빌의 ‘안다’는 의미조차도.
― 나도 내가 정말 잘못하고 있다는 거 알아. 나만 포기하면 된다는 것도 알아. 그렇지만…… 싫어. 못 해. 그러면 널 영영 잊어버리게 된단 말이야……. 나도 알아……. 나도, 나도 다 안단 말이야. 나도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