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6화 (156/186)


 

156

‘혹시 빌이 다쳐서?’ 

태리는 자신의 부상과 동시에 빌의 부상을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쓰러지기 직전에 빌이 큰 상처를 입는 것을 보았다. 제 몸을 미끼로 태우긴 했지만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일행은 드래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는 데 성공했다.

‘부상을 입었으니까 빌도 상처를 회복해야 될 거야.’

치유를 위해 드래곤 특성상 어딘가 칩거할 가능성이 높고 그렇게 되면 기존에 돌보고 있던 것들을 제대로 봐 주지 못할 확률이 크다. 갑작스럽게 몬스터가 범람하게 된 건 그로 인한 변화라고 봐야 할 것 같았다.

“넌 신경 쓰지 말고 푹 쉬기나 해. 네 건강 회복이 최우선이야. 그리고 상황이 심각한 거에 비해서 이자리스는 거의 혼란스럽지 않아. 더 이상 사태가 악화되지 않도록 총독이 계엄령이란 걸 내렸거든.”

“클로드가?”

“그래, 그 클로드가 숲 내에서는 조건 없는 전투를 허용했어. 자기 기사들에겐 초토화 명령을 내린 상태고. 본인도 매일 가서 싸우고 있다고. 그런 거 아니었으면 너 이러고 있는데 떨어지겠어.”

“그랬구나…….”

고맙고 부끄러운 마음에 태리는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공주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동안 또 많은 사람들이 제 몫을 대신 나눠 지고 있는 것 같았다.

“총독이 이끄는 기사단은 뭐…… 완전히 척살대 수준이야. 웬만한 전투광이라도 그 정도까지 하기는 힘들 거다. 근데 내가 보기엔 네가 이렇게 돼서 그냥 미친 것 같았어.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못 견디겠나 보지.”

참 딱하다는 의도로 꺼낸 얘기였는데 브리짓은 제가 한 이야기에 눈물이 핑 도는 친구의 얼굴을 보았다. 이제 막 병석에서 일어난 주제에 그 미운 놈 생각만 하는 게 뻔히 보여서 한숨이 푹 나왔다.

“넌 그 총독이 그렇게 좋아?”

울먹이는 눈으로, 그에게 너무나 미안하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태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휴, 브리짓이 다시 한숨을 쉬며 구슬처럼 매달려 있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네가 그놈을 좋아하게 되기 전에 내가 빨리 처리했어야 했는데. 이게 다 내 탓이다, 내 탓.”

클로드의 독살에 진작에 성공했더라면 이런 불상사는 없었으리라. 브리짓은 아쉽다고 했지만 그녀의 표정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지난 나흘간 지옥을 헤맸던 건 누구도 다르지 않았으니까.

사경을 헤매는 친구를 보며 제발 죽지 말라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부상이 치료되었음에도 쉽사리 침대를 떨치지 못하고 누워 있어야 될 만큼 공주의 체력은 고갈 나 있었다.

이 정도로 힘들어서 지쳐 쓰러질 때까지도 까맣게 몰랐었다니. 그 사실이 브리짓을 지독한 죄책감에 들게 했다.

마법사로서, 이자리스의 후예로서 공주를 끔찍이 아끼고 추종하는 제 모습에 행복감을 느낄 때가 참 많았다. 공주가 생겨서 정말로 좋았다. 공주는 존재 자체로 자신의 자랑거리였고 그 자랑거리에 부러진 자존심을 붙여 세웠다.

그런데 아파서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쏟아지는 부끄러움이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공주는 혼자서 내내 몸을 혹사해 왔는데, 그저 자신은 좋다고 행복하다고 기뻐해 왔던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사람을 괴롭게 했는지 몰랐다.

자신은 한참이나 잘못된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다시 그런 생각이 스며들자 눈물이 스르르 고였다. 내가 너무 부끄러워. 너에게 너무 못난 짓을 강요한 것 같아. 이렇게까지 스스로가 부족하게 느껴졌던 적은 처음이야.

브리짓이 코끝을 빨갛게 물들인 채로 울먹이며 말했다.

“난 거짓말 같은 건 못해. 총독이 싫어. 아무리 잘해 줘도 진짜 싫다고. 그런데 네가 좋다고 하면 나도 이제 예쁘게 보려고 노력할 거야. 누가 너희 둘을 반대하면 이제 내가 같이 맞서서 싸워 줄게.”

아팠다가 일어나니 갑자기 철이 들었나. 태리는 애써 웃으면서 친구의 볼을 톡톡 쓰다듬어 주다가 가슴이 먹먹해져서 그만두었다.

또 불쑥 마음이 느껴졌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그리고 그것을 온전히 느낄수록 깊은 곳으로 미뤄 놨던 슬픔들이 되살아난다.

자신은 이런 사람들을 지키지 못했던 거였다. 너무 어려서 지켜 주지 못했다. 힘이 없고 작고 어려서 도망갈 줄만 알았다. 사랑을 받는데도 가슴이 아픈 건 그 대가를 이제야 치르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이번에는 그러지 않아야지. 내가 반드시 지켜 줘야지. 병색이 묻은 손끝으로 우는 어깨를 안아 주었다. 심장에 박힌 얼음 가시가 다 녹았는데도 계속 가슴이 따끔거렸다.

* * *

아직은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브리짓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태리는 기어코 무거운 몸을 이끌고 미리엘을 찾아갔다.

그녀가 쓰러져 있을 동안 나란히 침대 신세를 면치 못했다는 그는 다행히 그녀가 찾아갔을 즈음에는 손님을 맞이할 수 있는 상태까지로는 회복되어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공주님.”

의도치 않게 이제 그와는 사지에서 죽다 살아 나온 전우가 되었다. 태리는 병문안 선물로 가져온 과일 바구니를 안겨 주며 조용히 웃었다.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저 또한 공주님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과일 바구니를 든 성직자는 온화한 기색으로 화답한다. 인위적인 웃음기가 빠진 얼굴은 진중했고 또 클로드와 참 많이 닮아 있었다. 보고 싶은 사람을 그의 얼굴에서 보게 되어 태리의 미소가 좀 더 짙어졌다.

“도움이 되어 드리고자 온 길인데 폐만 끼쳤군요. 제 실종으로 인해 그동안 공주님과 마법사들이 고초를 겪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저를 구하신 게 공주님인 것을 증언했으니 오해는 곧 사그라들 겁니다.”

어쩐지 신시가지의 공관까지 오는데도 별다른 소란이 없다고 여겼더니 미리엘의 재빠른 대처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신경 써 주셔서 고마워요.”

“사실인걸요.”

“혹시…… 숲속에서 사라졌던 날. 뭔가 생각나는 게 있나요?”

흐음. 미리엘은 깊은 침음을 흘리며 눈을 감고 머릿속을 뒤졌다. 순서가 뒤엉킨 카드처럼 머리가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어서 빠른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띄엄띄엄 뭔가가 떠오를 때도 있고, 떠오르지 않을 때도 있어서 최대한 확실한 것들만을 추려 설명했다.

“이자리스에 도착하던 날 비 오는 숲길에서 큰불을 만났습니다. 장대비가 쏟아지는데도 꺼지지 않고 마차로 옮겨 붙는 이상한 불이었죠.”

그리하여 본능적으로 그 불을 일으킨 자가 따로 있을 것이라고 보았었다. 대체 누구의 짓인지.

만약 우연히 잿더미 속에서 홀로 서 있는 소년을 먼저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미리엘도 그의 호위 기사들이 그러했듯 마법사의 짓이라고 여겼을 터였다.

연기 속을 정신없이 쏘다니는 기사들 사이를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뚫고 온 소년은 무기 없는 맨손으로 그의 이마에 손을 댔다.

“제게 뭘 하려고 했던 건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손이 제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는 것은 감으로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만진 직후에 무척이나 고통스러웠거든요. 마치 뇌가 팽창해서 두개골 바깥으로 터져 나가는 것 같았죠.”

소년은 냇가에서 잡아다 놓은 개구리의 행동을 관찰하는 꼬맹이처럼 미리엘에게 손을 대곤 이것저것을 살피다가, 금세 실망스러운 표정이 되어 그를 숲의 어느 한적한 곳에다가 내버려 둔 채 떠나 버렸다.

희미한 의식을 부여잡고 있던 미리엘은 그의 뒤를 쫓아갔고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소년의 정체를 알아내려고 했던 것이었다.

“성 주변에서 하루 이틀을 허비하긴 했습니다. 마귀의 소굴이나 다름없더군요. 그러다가 소년이 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목격하고 똑같은 길을 이용해서 따라갔죠.”

“그럼 그 ‘눈’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셨군요.”

“예, 보자마자 기절하는 줄 알았습니다만 그 소년과 한판 붙고 나서는 정말 기절을 해서 해롱거렸죠. 그리고 명확히 깨달았습니다. 왜 공주님의 부친께서 도움을 요청했는지. 아, 저 소년이 그분이 말했었던 빌이구나, 하고요.”

소년이 행사하는 힘에 얻어맞아 완전히 나동그라지고 나서야 미리엘은 그 부탁이 가지는 의미를 온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예상대로 죽은 왕은 신관을 통해 빌의 정체를 확인하려고 했던 게 맞았다.

“소년이 사용하는 힘은 마법이 아닙니다. 마법 같았지만 마법의 파장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제게 친숙한 것이었죠. 저와 꽤나 비슷한 종류의 자였습니다.”

“신성력을 쓰는 자군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때 절 말렸던 건가요? 그때 저한테 그랬었잖아요. 절대 싸워선 안 된다고. 우린 절대 저자를 이길 수 없다고.”

“그건.”

큰일을 치른 사람치곤 제법 차분하게 말하던 미리엘은 그 부분에서 단숨에 얼굴이 흐려졌다. 몇 번이나 주저하고 망설인 끝에 그가 어렵게 다시 입을 열었다.

“한 번 설명 드렸지만 신의 두 눈은 모양이 각각 다릅니다. 정삼각형의 섭리의 눈과 역삼각형의 계몽의 눈이 있죠. 둘 다 신의 것이고 신이라면 두 개가 모두 필요합니다. 그런데 서고 안에는 계몽의 눈만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는 건 그 자리에 반쪽짜리 신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배경 없이 추측만 하는 그의 해석이 정답에 가까워서 태리는 마른 손을 꾹 말아 쥐었다. 대서고에 있던 눈동자, 그것은 제 아버지의 눈이었다. 신의 경지에 가까이 갔다가 저주를 받고 죽어 버린 광란의 마법사가 남긴 유일한 흔적이었다.

“저는 끝까지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닐 것이라고, 잘못 보았다고 생각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공주님께서 오셔서 그것이 진실임을 확인시키셨죠.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맞아요.”

“그래서 싸워서 이길 수 없다고 한 겁니다. 공주님, 그 소년은 그 눈을 통제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어느 정도 잠재울 수 있는 것 같았죠. 그러고도 저를 아주 손쉽게 제압했습니다.”

미리엘이 말하면서 하얀 성복의 상의를 풀더니, 등을 돌려 어깻죽지 부근을 보여 주었다. 몽고반점처럼 아주 크고 붉은 흉터가 있었는데, 그가 태어났을 때 여신 아가사가 자신의 사도로 점지하며 남긴 손자국, 즉 성흔이라고 했다.

“저는 이제껏 저보다 강한 신성력을 구현해 내는 자를 만나 본 적이 없습니다. 태어난 순간부터 세상에 다시는 없을 신의 사도로 칭송받았고, 여신께서 직접 제 몸에 성흔까지 남기신 선택받은 자입니다.”

“…….”

“그런데 그자는 저와 같은 힘을 쓰면서도 저보다 훨씬 강했습니다. 그걸로도 모자라 신의 내린 저주를 통제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게 뭘 뜻하는지 모르시겠습니까. 신이 직접 고른 사도보다도 강하고 반쪽짜리 신보다도 더 위에 있는 존재라는 것이죠. 그 빌은.”

그리고 그런 존재는 하나뿐이지 않습니까.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결론을 내야 하는 것처럼 미리엘이 눈을 질끈 감고 뱉었다.

“오직 신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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