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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리의 온몸에 날카로운 것이 박히는 소름 돋는 감각이 퍼졌다.
책상을 향해 달려가던 다리가 한기에 얼어붙고 몸 안에서부터 강렬한 냉기가 퍼지며 입술까지 파랗게 변한다. 등 뒤에서 가슴 앞까지 관통하여 박힌 얼음 가시는 물리적인 형체가 아니었음에도 태리의 가슴에서 피가 왈칵 쏟아졌다.
동상이 걸린 듯한 손으로 출혈을 틀어막으려 하지만 손이 닿기도 전에 다리가 허물어졌다.
“아아, 아아……!”
제일 먼저 소년의 끔찍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 아니야! 이게 아니야!”
무심결에 강한 힘을 사용해 태리를 공격한 빌은 자신이 그녀를 상처 입혔다는 사실에 실성한 짐승처럼 고통스럽게 울부짖기 시작했다.
드래곤이 폭주하면서 사방에서 바닥을 덮고 있던 가지런한 타일들이 한 번에 터져 나갔다. 먼지와 피로 인해 공기가 뿌옇게 물들고 더러워졌다.
그리고 울부짖는 울음 사이로 클로드도 보고야 만다.
조금씩, 점점 더 많이 고여 가기 시작하는 피 웅덩이 속에 떨어져 있는 그가 사랑하는 실루엣을. 불에 타 해진 부츠 한 짝이 그녀의 발에서 흘러나와 힘없이 나동그라졌다.
도저히 그가 견뎌 낼 수 있는 장면이 아니었다. 이성이 나가 버린 드래곤처럼 그의 머릿속에서도 뇌가 하얗게 타서 녹아내린다.
아니야. 거짓말이지……?
아니라는 한 가지 부정만이 남은 사고 회로가 잦게 깜짝이는 등불처럼 뚝뚝 끊겨서 이어졌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아차리지도 못한 상태로, 클로드는 검을 들어 단숨에 소년의 배로 깊숙이 찔러 넣었다. 이전에 아슬아슬하게 베어 낸 것과는 차원이 다른 치명상이었다. 하지만 내장이 꿰뚫린 채로도 드래곤은 여전히 폭주를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죽어. 죽으라고.
뇌가 소용돌이친다. 아니라는 절대적인 한 가지의 부정과 죽여 버리겠다는 또 다른 악에 받친 일념으로 매몰되려는 순간이었다.
“안 된다! 클로드, 정신 차려야 해!”
성치 않은 몸으로 걸어온 미리엘이 갖은 힘을 쥐어짜 내어 동생을 붙잡기 시작했다. 클로드는 지금 제 목숨을 끊어 내서라도 이 자리에서 드래곤과 결단을 내려고 하고 있었다.
“너마저 이러면 공주님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정신 차려라! 공주님을 데려와, 어서!”
함께 정신이 나갔었던 이즈는 그 소리를 듣고 재빨리 굴러 쓰러져 있는 태리를 등에 걸치고 뛰었다. 휘청거리는 동생의 팔을 잡고 바깥으로 끌고 나가며 미리엘은 눈이 뒤집혀 폭주 상태에 빠진 소년을 보았다. 대서고의 구조물들이 그가 분출시키는 능력에 반파되듯 일부가 무너졌다.
“신이시여, 부디 저희를 구원하소서. 절망을 헤치고 나아갈 길을 보여 주소서…….”
생명력을 끌어모아 미리엘은 생애 가장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신관은 기적을 행하는 자다. 그의 절실하고도 간절한 힘은 역경 속에서도 희미한 기적을 일으켰다.
기절한 공주를 업고 그들이 대서고의 서리나무 문을 빠져나간 것과 동시에 빛에 감싸인 흰 창이 떨어지며, 사납게 날뛰는 빌을 창살로 이루어진 뇌옥에 가두었다. 저대로 놔두면 몸이 고통스럽겠지만 정신이 망가지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휘청거리는 다리를 부여잡으며 모두가 죽을힘을 다해 성 바깥으로 내달렸다.
* * *
사경을 헤맨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 수 있었다. 열이 올랐다가 떨어지며 식은땀과 추위가 동시에 느껴져 그저 앓는 소리밖에는 흘려 낼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의식도 없었고 눈도 뜰 수가 없어서 그저 되풀이하는 생각이란 자신이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 돌이켜 보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아프고 고생하는가 보다 했다.
그래, 아파야지. 나는 벌을 받아야지.
혼자 도망쳐서 살아남았잖은가.
그 많은 사람들의 희생 위로 살아남아서…… 그리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살았다. 어떻게 그들의 목소리와, 얼굴과, 온기를 잊을 수가 있어? 그 염치없음에 앓아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와중에도 스스로가 미워 제 피부를 할퀴고 싶었다.
그런데 되도 않는 자해를 하려 할 때마다 항상 누군가가 막아 주었다. 버둥거리는 손을 내리고, 힘겨워하는 입 속으로 쓴 약을 밀어 넣고, 부지런히 얼굴의 식은땀을 닦아 주었다.
뼈마디가 굵은 커다란 손, 그보다는 작은 아이의 손, 고생한 세월이 느껴지는 주름진 손과 서늘하거나 가녀리고 섬세한 손들. 그런 것들이 올올이 다 느껴졌다.
그래서 내가 지금 혼자가 아니란 것을 알았다. 내 주위에 이만큼이나 여러 사람이 왔다 갔다는 걸 알았다. 돌아오라고, 얼른 일어나라고. 너를 기다리고 있다고.
눈물이 마른 눈꺼풀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나를 아직도 기다리는구나. 그래서 앓는 소리를 그만두고 조금 편안한 숨을 쉬어 보려고 밤새 노력했다. 사람들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나 때문에 마음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더는 부족하고 폐만 끼치는 염치없는 공주가 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무엇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무리해서 숨을 토해 내려 할 때마다 더 극심한 신열이 올랐다. 주변은 더 소란스러워졌고 울음으로 가득 찼다.
미안해…….
아픈 것도 죄가 될 것 같았다. 얼른 일어나서 일하고 싶었다. 지난 세월 동안 숱하게 내버려 온 공주의 소임을 서둘러 모두에게 갚고 싶었다.
그런데 매일 밤마다 누군가가 찾아와서 천천히, 천천히라 속삭이며 익숙한 손으로 이마를 매만졌다. 조금도 쉬지 않고 물수건을 갈고 재촉하지 않는 다정한 기다림에 대해 알려 주며.
‘천천히…….’
마른 입 모양으로 그것을 서투르게 따라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열에 익어서 색색거리던 숨이 잔잔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의식이 완전히 놓아지고 앓는 내내 손아귀에 잡고 있던 아픈 생각들마저 사라졌다. 틀림없이 잠에 빠지고 있었다. 고통스럽지도 힘겹지도 않은 편안한 잠이었다. 마침내.
* * *
까슬까슬한 감각을 느끼며 태리는 어렴풋이 눈을 떴다. 뜨고도 눈알이 뻑뻑해서 다시 감았다가 도로 뜨길 몇 번이나 반복한다.
아아, 소리를 끄집어내려는 몇 번의 시도 끝에 잠겨 있던 목에서도 차차 또렷한 음성이 나왔다. 혼자 한참이나 낑낑대며 제 몸과 사투를 벌인 끝에 침대에서 일어나 앉는 데에도 성공했다. 호텔에 있는 자신의 방이었다.
‘빌에게 공격을 받고…….’
쓰러진 다음 기절했었던 건가. 주변을 둘러보니 침대는 병상이나 다름없어진 상태였다. 약병과 수건이 어지럽게 쌓여 있고, 가져다 놓은 간이 의자도 여러 개나 된다.
여기쯤 아팠던 것 같긴 한데. 생각보다 심한 부상이었던 걸까? 가슴 부근을 괜스레 문지르고 있는데 바깥이 소란스러워지는 게 느껴졌다. 여러 사람의 수다 속에서 ‘공주님 방 앞에서 시끄럽게 하지들 마!’ 하는 익숙한 목소리를 분별해 내곤 태리가 피식 웃었다.
잠시 후 간호에 필요한 물건을 한가득 짊어진 브리짓이 시끄러워 죽겠다며 구시렁거리면서 침실로 나타났다. 태리가 일어나 앉아 있는 걸 보곤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날개를 푸드득거리는 것처럼 뛰어와선 자기가 더 시끄럽게 굴었다.
“정신이 들어? 이거 손가락 몇 개야.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어? 아니, 고개로 끄덕이지 말고 소리 내서 이름을 말해 보라고. 그래, 여기가 어딘지 설명해 봐.”
“다 알아. 귀찮게 안 이래도…….”
“아잇, 뭐가 귀찮아, 귀찮긴! 제대로 말짱해졌는지 확인하려는 거잖아!”
“난 정상이야. 오래 누워 있었던 것 같지도 않은데.”
“꼬박 나흘을 쓰러져 있었거든?!”
“아…… 그래?”
“그리고 다쳐서 실려 왔잖아! 호텔이 발칵 뒤집혔던 거 알기나 해?”
“별로 많이 아팠던 것 같지도 않은데.”
별로 아팠던 것 같지도 않다고? 브리짓은 기가 막혀서 할 말을 잃었다.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된 건지 태리를 업고 온 사내놈들이 입을 꾹 다물고 말하지 않았지만, 죽을 것처럼 초췌한 그들의 안색에서 심상치 않은 일들이 벌어졌다는 것을 다들 대번에 알아차렸다.
침대에 눕히자마자 상태를 보았던 브리짓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던 그녀의 몸을 똑똑히 기억한다. 겉으로는 아무런 티도 나지 않았지만 그녀의 가슴 속에는 아주 깊고 심각한 수준의 내상이 있었다.
“걱정 마. 나 안 죽어.”
“네 꼴이나 좀 보고 말해.”
“나 간호하느라 힘들었겠네.”
툴툴거리는 거 보니 환자 돌보기가 어지간히 힘들었던 모양이다. 다 나았으니 이제 괜찮다고 다독이자 브리짓은 괜히 손수건만 접었다가 펴며 우물쭈물하는 어투로 말했다.
“내가 힘들긴 뭐가 힘들어. 난 낮에만 잠깐 보고 저녁부터 아침까지는 그놈이 내내 와서 지키는데. 엘프 녀석도 수시로 들락날락하고.”
그놈.
사실 태리가 누워 있었던 동안 아팠던 건 그녀만은 아니었다. 그녀를 업고 왔던 클로드도 몸살이 난 것처럼 하루를 꼬박 앓았다. 그런데도 그는 불덩이처럼 뜨거운 몸으로도 쉬려 하질 않았다. 지독하게 아플 텐데도 공주가 누워 있는 침대를 지키며 물수건을 갈아 주고 약을 떠먹였다.
― 저러다가 저놈이 먼저 큰일 날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