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4화 (154/186)


 

154

“드디어 찾았네. 내가 너 잡으려고 여기 눌러앉기 시작했다는 거 아냐? 너 정체가 검정 도마뱀이라며?” 

올 때는 그렇게나 무섭다고 징징대더니 강한 자에게 강하고 약한 자에게 약한 건지, 앞뒤 분간도 없이 이즈는 빌을 보자마자 덤벼들었다. 심지어 검정 도마뱀이라는 모욕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분개함 아래로 공포심을 썩은 휴지 조각처럼 뭉쳐서 처박은 그는 자신을 만류하려는 태리에게 물러서라는 눈짓을 한 뒤 활시위를 퉁퉁 튕기며 소년을 위협했다.

“무모한 건 참 여전해. 내가 좀 더 머리를 쓰라고 하지 않았나, 엘프?”

“내가 머리를 왜 써. 누구 때문에 내 머리 고생시킬 일 있어?”

클로드도 오자마자 태리의 처참한 꼴을 살펴보곤 얼굴이 대번에 흐려지는 것 같더니, 그녀를 빌로부터 떨어트리려는 것처럼 바깥으로 밀어 냈다. 그러곤 누가 보아도 애 같지 않은 표정의 소년을 노려보았는데, 빌은 이즈에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그를 보고 비웃었다.

이 중에서 누구보다도 공주를 보호하고 지키고자 하는 건 바로 자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식으로 경계하지 않아도 난 실리의 딸에겐 어떠한 위해도 가하지 않아. 너희들이라면 얘기는 좀 달라지지만 말이야.”

“닥쳐, 용 대가리. 우리한테 발렸을 때 어떻게 살려 달라고 매달릴지나 고민해라.”

당장이라도 싸움이 벌어질 분위기였다. 태리는 검에 손을 올려 둔 채 언제라도 발검할 준비가 되어 있는 클로드의 팔을 잽싸게 당겼다.

“미리엘을 찾았어요.”

“……!”

“뒤에 있어요. 그리고 뒤쪽으로 나갈 수 있는 출입구도 있고요.”

언젠가는 잡아야 하는 드래곤이지만 그 싸움이 오늘 벌어져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또 미리엘의 상태가 그리 좋지 못했다. 미리엘을 구해야 한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목표는 당장엔 없다고 생각했다.

검 손잡이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클로드가 말했다.

“형을 부탁합니다. 먼저 데리고 나가십시오.”

“안 돼요! 같이 나가요.”

“우릴 그냥 보내 줄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보니 소년은 벌써 긴 대형 낫을 꺼내 들고 있었다. 빈손에서 스르르 나와 생긴 낫은 소년의 키보다 한참이나 더 크고 무거웠지만 그것을 버거워하는 기색은 전혀 없다. 한 손으로 움켜쥔 낫의 긴 손잡이가 등 뒤로 비죽이 솟았다.

‘폴리모프를 풀지 않은 채 전투라고?’

태리는 사고가 딱딱해졌다.

변칙이 생긴다. 아니, 따지고 보면 이 모든 게 다 변칙적이었다.

대서고에 이만큼이나 이르게 온 것도, 미리엘이 납치된 것도, 보스 방에서 전투가 벌어지는데 빌이 드래곤으로 변하지 않고 인간의 모습으로 상대한다는 것도.

그 예상 밖의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이즈가 먼저 암살자의 보법으로 사선으로 움직이는 낫을 쫓아갔다.

휘두르는 갈고리에 걸려서 끌어 내려질 뻔하기도 했지만 옷만 찢어지고 빠져나간다. 자유자재로 움직임을 구사할 수 있는 엘프답게 그는 한 번에 높은 곳까지 튀어 올라갔다가 입에 물고 있던 화살을 쏘아 냈다.

낫을 든 빌이 상체를 틀어 회피하면서 화살은 박히지 않고 스쳐 지나갔지만 벌써 다음번 화살이 출발했다. 그것이 끝나면 또 다른 화살이 날아올 것이다. 공중을 뛰어다니며 속사를 일삼는 하이엘프는 허점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어린애의 외양 앞에서도 양심의 가책 따위 느끼는 바 없이 흔들리지 않고 위험한 위치로 족족 쏘아 대 빌은 이미 서너 방쯤을 맞았다. 살 속으로 들어간 화살촉을 뽑아낼 때마다 소년의 낮은 신음이 울렸다.

그러나 화려한 궁술에 비하여 빌의 대응은 묵직하고 간단했다. 피라미 하나를 제압하는 데에 코끼리가 발을 들어 짓밟는 것 외엔 다른 기술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드래곤에게도 마찬가지다.

기교 하나 없이 낫을 쥐고 단순하게 휘두른다. 오직 강한 힘만으로 제압해 요리조리 빠져나가던 이즈도 결국엔 낫의 반경 안에 걸리고 말았다.

이즈는 급히 몸의 방향을 바꿨으나 적절한 회피가 아니었고, 낫에 걸어 끌어 내리는 힘을 거스르지 못하고 몸에 가해진 압력을 그대로 싣고 추락한다. 호리호리한 체구가 거대한 책장에 그대로 충돌한 뒤 바닥으로 떨어져 굴렀다. 모든 충격을 몸으로 받아 낸 이즈는 고통스러워하며 엎어진 채로 다신 일어나지 못했다.

“……!”

미리엘을 부축해서 입구로 나가려던 태리가 그 참혹한 결과에 발길이 묶였을 때였다. 머뭇거린 그 짧은 순간 뒤돌아본 그녀의 눈과 빌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의 어깨에 실려 있는 미리엘을 확인한 빌은 즉시 그곳으로 날아오려 했다. 하지만 앞서 대기하고 있던 클로드의 검이 그것을 막아선다. 엘프의 화살 속도에는 따라올 수 없었지만 그의 검도 신출귀몰해서 빌은 깜짝 놀라 동시에 낫을 들어 올렸다.

성검과 낫이 카캉 소리를 내며 얽혔다. 금속과 금속이 맞붙은 채로 강렬한 불꽃을 튀기며 미끄러진다. 부딪히면서 일어나는 굉음에 순간적으로 이명이 왔을 정도였다.

한 번 검을 맞대고 뗀 후 클로드는 이를 악물었다. 팔목에서부터 어깨까지 근육이 얼얼했다. 소년에게서 받은 피해라 하기에는 무지막지한 힘이다. 성검을 긁고 지나간 낫에서 검은 기운이 찬기와 함께 어른거렸다.

하지만 소년에겐 방금 전의 일합이 그다지 부담되지 않았던 듯했다.

드래곤의 적안이 흥미로 반짝이더니 오히려 클로드가 잡은 성검을 눈여겨보는 것 같았다. 그러곤 마치 검에 대해 시험하듯이 몇 번 더 칼날을 맞부딪쳐 왔다.

마찬가지로 기술 따윈 없었으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낫을 막을 때마다 클로드는 해일에 덮쳐진 것처럼 어깨가 욱신거렸다. 강철 바위에 칼을 들이미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기엔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이즈의 경우를 이미 눈앞에서 본 그였다. 칼보다 닿는 거리가 월등히 긴 낫으로 인해 공간의 주도권이 빌의 손아귀에 있었다. 그 반경 안으로 아무런 준비도 없이 공격을 밀고 들어갔다간 그도 똑같은 패배를 겪을 수 있었다.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싸움 방식이지만…….’

클로드는 끊임없이 휘둘러지는 낫을 피하지 않고 꿋꿋하게 받아쳐 내며 한동안 오로지 방어에 집중했다. 그것이 부담이 되는 줄 알면서도 피해를 계속해서 검에 쌓아 나아간다. 그리고 충분히 쌓였다고 판단한 순간 모으고 있던 피해를 검기로 바꿔 빌의 가슴으로 한 번에 방출했다. 태리가 피해 흡수라고 했던 그 기술이었다.

촤악!

순식간에 맺혀 퍼진 검기가 소년의 배에 대각선의 긴 자상을 냈다. 명치까지 가르고 지나간 무자비한 일격이었다.

“응?”

분명 제대로 된 공격이었다. 상대의 모든 행동을 그 즉시 주저하게 할 만한 타격이 있었다. 하지만 예상외의 공격에도 소년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힘을 흡수해 거꾸로 반격하는 기사의 재치를 가소롭게 보았다.

“특이한 방식의 요령을 익히고 있네? 게다가 손에 든 건 아가사의 손톱인가? 재밌어. 한 공간 안에 아가사가 아끼는 자식이 둘이나 있다니. 너희 둘을 모두 해치우면 아가사가 내게 복수하러 올까?”

낫을 거두며 여신의 이름을 스스럼없이 입에 올리는 소년은 다친 상처 부위를 대수롭지 않게 내버려 둔 채 클로드를 향해 빙그레 웃어 보였다.

‘자신감.’

클로드는 소년의 여유로운 미소에서 자신감을 읽었다. 아무리 너희 형제가 아가사가 끔찍이 아끼는 자식들이라고 해도 결코 자신은 이길 수 없다는 자신감이다.

더불어서 그를 향한 악의도 은연중에 드러났다.

잘하네. 실력이 있어. 칭찬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바로 직후에 클로드는 불시에 왼쪽 가슴을 얻어맞았다. 온몸의 혈관이 터지는 것처럼 입 밖으로 피가 뿜어졌다. 시야가 어지럽게 흐려진 그는 비틀거리다가 무릎을 대고 쓰러졌다.

“인간은 포식자가 되기엔 적절한 신체가 아니야. 급소가 너무 분명하거든. 한계도 분명하고. 어떤 면에선 숲의 마수들보다도 허약하지.”

심해에서 기어 올라오듯이 클로드가 정신을 집중해 눈의 초점을 되찾았을 때에는 작은 발이 목을 꾸욱 짓누르며 숨통을 조이고 있었다.

언제 이렇게 됐지?

분명히 그의 검에 베인 부위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심지어 이즈의 화살에 맞아 구멍 난 상처도 있다. 그런데 어째서…….

‘못 이긴다.’

소년을 이길 수가 없었다.

갖고 노는 것처럼 발을 눌렀다가 떼며 장난을 치던 빌이 갑자기 뭔가를 느낀 것처럼 음? 하고 머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백발백중의 위력을 지닌 화살이 손목을 관통했다.

퍽!

자신을 누르고 있는 책 더미를 헤치고 일어난 이즈가 부들부들 떨리는 팔로 활을 붙잡고 있었다.

아무리 드래곤이라 할지라도 연이은 치명타다. 하지만 손에서 피를 철철 쏟아 내는 소년의 시선이 돌아간 곳은 화살이 날아온 방향이 아니었다.

태리가 그를 지나쳐 대서고 안쪽으로 뛰고 있었다. 클로드가 빌의 손아귀에 잡힌 그 순간부터 미리엘을 내려놓고 즉시 내달린 그녀는 마치 드래곤에게 보란 듯이 자신의 경로를 훤히 노출하고 있었다.

책상 위로, 눈꺼풀이 감겨 있는 눈동자를 향해 뛰는 것이다. 빌의 관심이 클로드를 떠나 제게로 와 닿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좀 더 분명하게 그의 주의를 끌기 위해 총을 꺼내 들었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소년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안 돼! 손대지 마! 그건 실리의 눈이야!”

마침내 빌의 신경이 클로드를 내버리고 태리에게로 온전히 쏟아진다. 당장이라도 달려갈 것처럼 자세가 흐트러진 사이 클로드는 소년의 다리를 팔꿈치로 찍어서 빠져나왔다.

몸이 기울면서 쓰러질 뻔했지만 빌은 간신히 버티곤 자석이라도 붙은 것처럼 또 태리에게로 뛰어가려 했다. 그를 막기 위해 클로드가 다시 무릎을 들어 가격했다.

이어서 주먹을 휘두르고 다리를 걷어찬다. 그러나 빌은 하나도 막지 못했다. 무수한 공격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그의 시선은 클로드가 아닌 태리에게 가 있었다. 그녀가 그것을 파괴할까 봐. 이것만 사라진다면, 하는 강렬한 유혹을 견디지 못할까 봐.

그리고 언뜻 찌르려는 듯한 동작을 봤다고 생각한 순간 여유가 없어진 빌이 바닥에 떨어져 있던 낫을 거칠게 내질렀다.

“만지지 마!”

지면을 가르듯 떨어진 낫은 일직선의 새까만 얼음 가시 길을 만들며 즉시 태리의 등 뒤를 향해 내달렸다. 그러곤 순식간에 공주를 따라잡아 혹한이 담긴 얼음 가시를 그녀의 등 뒤에 찔러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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