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3화 (153/186)


 

153

“그런데 공주님께선 어떻게 들어오셨습니까. 저쪽 승강기 줄이 끊어졌을 텐데요.”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에는 탑의 꼭대기 부분에 나 있는 또 다른 문이 있었다. 승강기라고 하는 것을 보니 저 위까지 단숨에 오를 수 있는 또 다른 지름길이 어딘가에 있는 듯했다.

“전 아래쪽으로 들어왔어요. 그런데 줄이 끊어졌더니, 나가지 못하게 누군가가 끊어 놓은 건가요?”

“아뇨, 제가 힘을 과하게 쓰다가 망가뜨린 겁니다.”

“어차피 다른 쪽이 정문이에요.”

“아하, 그렇다면 부서져도 상관없었군요.”

하하 소리 내서 웃는 모습이 멋쩍어서 그런 게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엉뚱한 성격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억지로 따라 웃으려고 해도 좀처럼 웃음이 지어지지 않아 태리는 중도에 포기했다.

몇 번 더 그녀를 웃겨 보려 하던 미리엘은 자신만큼이나 성치 않은 공주의 몰골을 보곤 결국 말을 아꼈다. 오는 길에 무슨 일을 당한 건지, 그녀의 한쪽 어깨에는 피가 흥건했고 겉옷과 부츠는 불에 그을어서 해지고 찢어져 있었다. 거기에다가 아닌 척하지만 볼에는 눈물이 말라붙은 자국까지 엿보였다.

“지금 여기서 내보내 드릴게요. 얼른 나가요. 이런 고생을 겪게 해서 죄송해요.”

“아닙니다. 찾으러 와 주셨으니 제가 도리어 감사할 일이지요. 저는 공주님의 얼굴이 더 안쓰럽습니다. 오기까지 고생이 심하셨던 모양입니다. 치유라도 해 드리고 싶지만 제가 지금은 너무 많은 기력을 소모해 버린지라. 당장은 정신을 차리고 말하는 것만이 최선이군요.”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이건 다 제 일이니까.”

“…….”

힘들고 지쳐도 그런 건 원래 내 몫이니까. 그걸 감내하는 건 당연하니까. 성숙이 지나칠 정도로 어른스러운 공주의 대답에 미리엘이 눈가를 쓰게 접었다.

그런 말은 듣기만 해도 너무 슬픈걸. 하지만 도움이 되고 싶어도 당장은 이렇게 말을 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벅찬 체력이다. 지금도 그녀의 부축을 받아 책장 밑에서 무사히 빠져나왔지만 벌떡 일어설 만한 힘은 없어서 결국은 기대앉게 되었다.

힘겨워하는 게 눈이 보였는지 공주가 ‘업어 드릴까요?’ 하고 등을 내보이는 행동이 제 동생과 비슷해서 입술을 실룩거리며 웃었던 그때였다. 어디선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먼저 기민하게 알아차린 태리가 순식간에 경계 태세를 갖추며 미리엘을 보이지 않는 그늘 밑으로 깊숙이 밀어 넣었다.

“여기 잠시만 계세요. 클로드도 곧 올 거예요. 길을 찾아낼 수 있는 주술이 그 사람에게 걸려 있거든요. 저는 안쪽에서 무슨 소리가 난 건지 살펴보고 올게요.”

분명히 그것은 인기척이라고 할 만한 소리였다. 빌일까? 역시 빌이겠지? 상대를 짐작하고 일어서는 그녀의 팔을 미리엘이 붙잡았다. 음성이 진중했다.

“조심하십시오. 이상하게도……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라 제 증언이 명확하다고 할 순 없지만 이곳에 있는 자는 마법사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아주 강합니다. 홀로 상대해 보려 했으나 뜻대로 잘 되지 않았습니다.”

“알아요.”

“그리고 중앙에 있는 책상 어딘가에 커다란 눈이 있습니다. 그자가 그 눈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눈. 태리는 꿈속에서 보았던 그 커다란 눈동자를 회상했다. 저주의 언어를 뱉던 그것.

“역삼각형의 눈.”

그녀가 정확하게 맞추자 미리엘이 놀란 얼굴로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아마 아버지로 인해 생긴 걸 거예요.”

놀란 얼굴 위에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목소리가 더해졌다.

“그 눈이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정확히는 몰라요. 아버지로 인해 생겼고, 그것이 신의 저주를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됐을 거라는 짐작만 하는 거죠.”

“공주님, 그것은 계몽의 눈입니다. 신의 두 눈동자 중 왼쪽의 것이죠.”

그가 식은땀을 훔치며 손가락으로 바닥에 도형을 그렸다. 신의 오른쪽 눈에는 정삼각형 모양의 섭리의 눈이 있고, 왼쪽에는 역삼각형의 계몽의 눈이 있다고.

“모두 신의 것이고 인간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것이 이곳에 있으니 저주인 것입니다.”

그랬구나. 태리는 담담히 원죄를 고하듯 고백했다.

“그렇다면 그건 틀림없이 아버지의 것이 맞을 거예요. 아버지가 저지른 금기란 게 그것이거든요. 신에 가까운 깨달음을 얻은 것.”

실리안은 이곳에서 신격을 얻었고 이곳에서 저주를 받아 죽었다. 책상 위의 커다란 역삼각형의 눈동자가 그 증거다.

체념이 어린 듯 가라앉는 태리의 낯빛과 달리 미리엘의 안색은 하얗게 질렸다. 다급해진 목소리가 힘없이 일어서는 그녀의 귀 끝에 강하게 매달렸다.

“그렇다면 절대로 여기 있는 자와 싸워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절대로 그를 이길 수 없습니다!”

“명심할게요.”

“위험하면 바로 소리 지르십시오. 뭐라도 할 테니.”

“말하는 것만 겨우 하고 계신다면서요.”

“말하지 않고 해 보지요.”

이런 와중에도 웃기려는 건가. 전보다는 조금 더 입 끝을 올려서 웃어 준 뒤 태리가 조심스럽게 안쪽으로 나아갔다.

* * *

소리를 따라서 대서고의 한가운데에 자리한 왕의 책상까지 걸어왔다. 게임 속에선 드래곤에게 막혀서 한 번도 여기까지는 와 본 적이 없다. 실제로 본 것도 지금이 처음이었다.

꿈에서 본 것과 마찬가지로 역삼각형 모양의 눈이 그 자리에 놓여 있었다. 눈꺼풀이 내려앉아 덮여 있는 형태도 똑같다.

꿈에서처럼 저주를 읊는 듯한 언어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저것을 없애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은 조금도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온순해 보여도 저주를 받은 원흉. 무섭고 두려운 마음을 억눌러 가며 태리는 한 발 더, 한 발 더 눈동자 앞으로 다가갔다.

이대로 손을 뻗어 찌르면……. 그런 생각으로 팔을 움찔거렸을 때였다.

끊겼던 바스락 소리가 다시 귓속을 찔렀다. 이번에는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낌새도 느껴졌다.

뭐지? 태리는 깜깜한 어둠 속을 향해 노려본다. 숨으려는 의도조차 없었다는 듯 이윽고 니트를 걸친 말쑥한 소년의 어깨가 컴컴한 음영을 밀어내며 나타났다.

읽을거리를 찾아온 건지 빌은 품 안에 있던 책들을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눈동자 옆,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런 뒤 태리를 바라보며 반갑게 인사했다. 놀라는 기색도 없이.

“왔어?”

왔어……라고?

그 태연자약함이 황당하고 괘씸했던 걸까. 태리는 갑자기 요동치는 속내를 감추지 못했다. 화가 솟구치고 억울함이 치밀어서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이게 무슨 짓이야. 너, 왜 사람을 납치해서 이곳에 가뒀어? 예전에도 이런 적 있었지? 숲으로 들어온 엘프에게 이런 비슷한 짓을 했잖아! 왜 그랬어. 말해, 이유.”

왜 이렇게 화가 나는 건지. 단순히 미리엘을 납치했기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방금 아주 힘든 운명을 만나고 왔기 때문에? 아니면 그냥 화풀이 대상이 필요해서?

그러나 그녀의 쏟아지는 격노를 받고도 소년은 어느 한 군데 흐트러짐이 없었다. 도리어 그녀의 감정이 어느 정도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곤조곤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그 신관과 하이엘프는 모두 고대 신들이 아끼는 이들이야. 한 명은 아가사가 사랑하는 아들이고, 다른 한 명은 세계수의 뿌리에서 태어났지. 난 그들이 가진 신의 지식을 얻으려고 했어. 말했잖아, 저주를 풀 방법을 내내 찾고 있다고. 혹시 도움될 만한 게 있을까 해서. 하지만 납치하진 않았어. 머릿속을 뒤지고 떠나려는 내 뒤를 몰래 밟은 건 저 신관이야.”

화를 내는데도 별 반응이 없다. 빌은 애초에 미리엘 같은 건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오직 그것 하나였다. 저주를 풀 방법.

“도움이 될 만한 건 건지지도 못하고 괜히 힘과 시간만 낭비했지.”

실망한 마음을 추스르려는 듯 빌은 책상 앞으로 돌아가 의자를 빼고 앉았다.

태리는 불길해서 그 눈동자 앞으로 가까이 가는 것조차도 꺼려졌었는데 그는 그 곁에 앉고서도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그것이 날뛰지 않도록 지키는 것 같기도 했다.

어린 공주를 통해 재앙의 날을 겪어 봤으니 상황이 이만큼 진정될 때까지 얼마나 고된 과정들이 있었는지를 이제는 태리도 훤히 다 안다. 그 아비규환 속에서 그나마 이렇게까지 숨을 쉴 수 있는 건 전부 빌의 덕일 터였다. 지금처럼 그가 저것이 눈을 뜨지 않도록 막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왜인지 고맙다는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오히려 전보다 더 명확하게 한 가지의 생각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 시, 싫어. 아무리 그래도 난 그만두지 않을 거야……. 나도 내가 정말 잘못하고 있다는 거 알아. 나만 포기하면 된다는 것도 알아. 그렇지만…… 싫어. 못 해. 그러면 널 영영 잊어버리게 된단 말이야……. 나도 알아……. 나도, 나도 다 안단 말이야. 나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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