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성의 왼편으로 길게 솟아 있는 탑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그 탑은 오랫동안 왕성의 대서고로 유지되어 왔다.
마법서가 바닥부터 천장까지 쌓아져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고가의 책들이 불에 타선 안 되었을 테니 탑에 사용된 모든 목재는 아이의 말대로 서리나무일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확실히 피신처로 이용할 수 있다.
공주의 어깨에서 쏟아져 나온 피와 식은땀으로 코트가 붉게 젖는 것을 느끼며 태리는 탑으로 통하는 첫 번째 나무문을 지나자마자 손잡이에 판자를 끼워 빗장처럼 걸고, 근처의 무거운 통을 발로 밀어 밖에서부터 문이 열리지 않도록 단단히 막았다.
그런 다음 사경을 헤매고 있는 공주를 한 곳에 앉혀 둔 뒤 힐링 포션 주사기를 꽂아 끝까지 물약을 밀어 넣는다. 주사 바늘이 살을 찌르는 작은 자극에도 공주는 까무러치게 고통스러워했다.
“제발.”
제발 치료가 너무 늦기 않았기를 바랐다. 입에서 몇 번이고 제발이라는 단어가 간절한 기도처럼 흘러나왔다. 주사로도 모자라 태리는 두 팔로 공주의 등을 감싸 안고 보잘 것 없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치유 마법의 주문을 쉬지 않고 되풀이해서 외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익혀 둘걸. 더 많이 공부할걸. 더 열심히…… 내가 더 열심히 노력했더라면 네가 다치지도 않았을 거야.
공주가 잘못된다면 그 모든 원인이 자신의 부족함에 있을 것만 같았다.
기운을 차리려 애쓰는 건지 눈꺼풀이 가물가물하게 뜨이더니, 살려 달라는 듯 작은 손을 뻗어 오다가 도중에 푹 고꾸라졌다.
태리는 떨어진 아이의 손을 힘주어 잡으며 더욱 절실하게 기도했다.
“안 돼. 죽지 마. 내가, 내가 어떻게든 너를 살려 줄게. 어떻게 하면 되는 거야. 어떻게 하면 너를 살릴 수 있니…….”
왜일까. 어째서 나는 너의 상실 앞에 이렇게나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 걸까.
이미 지나간 것들은 바꿀 수 없듯이 그날 이곳에서 죽은 이들의 목숨 역시 구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안다. 그렇게 끝이 나도록 정해진 운명이라는 것도. 하지만 그 운명이란 것이 이 공주에게만은 제발 다른 기회를 주길 바랐다.
“널 살릴 수 있다면 난 뭐든지 할 거야.”
간절했던 기도가 독한 각오가 될 정도로 소망은 깊어진다.
정신이 들었다가 까무러치길 반복하던 공주가 다시 오동통한 손가락으로 태리의 가슴께를 꼬옥 움켜잡아 왔다.
“언니는…… 아주 멀리서 왔지? 나는 성에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데…… 언니 같은 사람은 이제까지 한 번도 본 적 없어.”
“그래, 아주 멀리서 왔어. 여기서 수백 밤을 쉬지 않고 달려도 닿지 못할 먼 곳에서 왔어.”
제 생각이 맞은 게 기뻤는지 공주는 아기처럼 배시시 웃었다. 그 웃는 얼굴이 너무 어여뻐서 더 가슴이 미어졌다. 넌 어쩌면 그렇게 맑게 웃어서 이리 가슴을 아프게 하는지.
“이제 성에는 아무도 없어. 다들 나, 나 때문에 많이 다쳤을 거야. 나를…… 나를 보내 주려고. 전부 나 때문에…….”
그래, 죽었겠지. 공주가 도망갈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 그 많은 궁정 마법사들이 길목, 길목마다 희생되었을 것이다.
아무리 물정에 어두운 어린아이라 해도 그것을 느끼지 못할 리 없다.
또한 그렇기에 더욱더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자신을 살리기 위해 그 많은 이들이 목숨을 걸었으니까. 그 사랑이 너무 무거워서. 그 희생이 이토록 가슴 아파서 어찌 삶이 함부로 포기가 되겠나. 아이는 반드시 살아야 했다.
똑같은 눈물을 떨어트리며 태리는 공주와 함께 서로를 꼭 끌어안았다.
그 마음이 어떤 것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자신도 그랬으니까. 홀로 살아남게 되었을 때 어떻게든 살아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었다. 누군가의 목숨을 빚져서 삶을 잇게 된 순간 제 목숨은 자신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고 여겼었다.
제 뺨도 젖어 있으면서 아이는 조약돌처럼 작고 따뜻한 손으로 태리의 눈에 맺힌 눈물을 서투르게 닦아 주며 부탁했다.
“모두 다 나한테 여기서 멀리로 가야 한댔어. 이자리스에서 먼 곳으로 가야 내가 살 수 있대. 있잖아, 언니……. 나도 언니가 왔던 그 먼 곳으로 같이 데려가 줄 수 있어……?”
멀수록 안전할 거라던, 자신을 보내기 위해 목숨을 던진 마법사들의 마지막 당부를 어린 공주는 지키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더운 숨을 쌕쌕 몰아쉬면서도 그래 주면 안 돼? 하고 구슬프게 매달리고 있다.
제 가슴에 닿은 손을 움켜쥐며 태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게. 내가 너를 여기서 가장 먼 곳으로 데려갈게.”
말했잖아, 널 살릴 수 있다면 난 뭐든 다 할 거라고.
결심한 것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아니 그것뿐이라 말하기에는 부족할지도 모른다. 태리는 공주가 제게로 올 수 있는 모든 문을 열었다. 자신의 어디든 닿을 수 있고 무엇이든 손댈 수 있도록.
그리고 동시에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지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이것은 통하지 않는 길이다.
그러나 물건을 끝없이 안으로 집어넣어 귀퉁이에 구멍이 생겨 버린 봉지처럼, 태리의 안으로 가득 차 넘칠 정도로 깊숙하게 들어올 수 있었던 아이는 존재하지 않았던 통로를 만들어 아주 먼 세계로 멀리멀리 헤엄쳐 갔다.
“제발 살려 주세요! 누가 좀 도와줘요! 우리 딸 좀 구해 줘요!”
고통에 찬 울부짖음이 귓가를 스친다.
공기의 흐름, 날씨, 색깔, 냄새.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것들이 성에서의 그것과 완전히 달라지고 뒤바뀌었다.
이제 눈앞에는 뒤집힌 차 안에 갇혀 버린 엄마와 여자아이가 보였다. 자동차 보닛에는 불이 붙었고, 찌그러진 차 문 앞을 커다란 화물차가 가로막고 있어서 문을 열 수가 없었다. 유리창을 깬 엄마는 어떻게든 딸을 끌어서 그 밖으로 밀어 내려고 애쓰고 있었다.
“여기 사람이 있어요! 살려 주세요! 우리 딸만이라도……!”
구조대가 오려면 한참은 더 멀었다고. 소리 질러도 아무도 우리를 도와주지 못한다고. 이미 겪은 일이기에 저 외침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를 안다.
그러나 엄마의 비명 소리를 들은 태리는 심하게 동요하고 있는 스스로를 알아차렸다.
폐성에 재앙이 불어닥친 게 사실이었듯, 이날 이 도로에서 벌어진 일들도 전부 다 사실이다. 실제로 있었던 사고였다. 그러니까 지금 이것은 제 기억일 것이다.
자신이 공주의 방에서 아이의 구두 한 조각을 주웠듯, 공주 역시 제게서 어떤 한 조각을 떼어 갔다. 왜 하필이면 이날이냐고 따질 필요도 없었다. 아이에게도 마찬가지로 하필이면 그날이었을 테니까.
그리고 이어서 태리는 소름 끼치는 광경을 목격했다.
목이 찢어지도록 외치는 엄마의 가슴 밑에서 시름시름하던 딸의 고개가 푹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엄마의 목을 끌어안고 있던 짧은 팔에서도 생기가 빠져나가 아래로 힘없이 축 늘어졌다.
내가 지금…… 뭘 본 거야?
몰아닥친 충격에 숨이 잘 쉬어지지가 않았다.
그럼 그때 나는, 나는…… 죽었던 거야? 내가 죽었던 거야?
아닌데. 그럴 리가 없는데. 죽은 건 엄마였다. 자신은 살았다. 하지만 차 안에 갇힌 딸아이는 누가 봐도 생명이 꺼진 상태였다.
믿을 수가 없어서 두 손으로 입을 막았는데 다친 어깨를 감싸 쥔 공주가 한 짝만 신은 구두로 절뚝거리며 차 앞의 유리창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엄마는 공주를 보자마자 더 미친 듯이 바깥으로 팔을 휘저으며 외쳤다. 부탁할게요. 살려 줘요. 제발 내 딸을 살려 줘요. 나, 나, 난 죽어도 상관없어! 우리 딸만이라도 꺼내 줘요!
오렌지 빛의 신비로운 눈동자가 이미 고개가 떨어진 비슷한 또래의 소녀에게로 내려앉았다.
바보같이. 이미 죽었는데. 아줌마의 딸은 이미 죽었는데.
하지만 공주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엄마를 슬프게 하지 않았고 절망에 빠트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아이는 약속했다.
태리가 제게 해 주었듯이, 엄마에게도 똑같이 곧은 턱을 끄덕여 약속했다.
“그럴게요.”
“너…… 너는 누구니……?”
“저는 테리예요.”
“태리. 우리 딸…….”
불타는 자동차 앞에서 공주는 제 작은 몸속에 남아 있는 모든 힘을 끌어모아 두 손을 모은다.
그 자리에서 소멸해 버릴 것처럼 몸의 경계가 점차 흐릿해졌다.
마법을 부릴 수 있는 어린 공주는 자신에게서 가장 안전한 피신처를 찾아 본능적으로 그 몸에 제 생명을 의탁했다.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여자애였다.
엄마의 팔에 시체처럼 걸쳐져 있던 아이의 팔이 다시 꿈틀하고 움직였다.
동시에 깨진 유리창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있던 공주의 몸은 지우개로 문질러 지운 것처럼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에 의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아…….”
차갑게 말라붙은 뺨 위로 주르륵 또 한 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랬구나. 그렇게 네가 먼 곳으로 갔었구나.
그렇게 이 세계에서 네 존재가 지워졌구나.
태리는 어느새 메마른 장미원에, 천둥이 내리치는 복도에, 아기자기한 어린 공주의 방에,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지나쳐 서리나무 문이 가로막고 있는 대서고 앞에 홀로 앉아 있었다.
비명으로 가득 찼던 성안의 소란스러움과 거미줄 하나 끼지 않았던 말끔한 창틀은 모두 사라졌다. 사방이 고요하고 컴컴했다.
당연했다. 이제 여기는 다시 모든 재앙이 지나가고 난 뒤의 폐성이었으니까. 일어날 일들은 기어코 모두 다 일어나고야 말았으니까.
피가 묻어 있는 코트의 축축함만이 아주 오래전 두 명의 공주가 이 자리에 함께 있었음을, 서로를 구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던졌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고마워……. 네 덕분에 엄마는 마지막 가는 길에 나를 살렸다고 작은 미소나마 겨우 지었을 테지.
그리고.
“나…… 돌아왔어.”
길 끝에 불타지 않은 서리나무 문이 서 있었다. 모든 것을 보았을 그 문이 그녀에게 묻고 있었다. 이것이 너희의 운명이었는데 그동안 견딜 만했느냐고.
그 앞에 홀로 앉아서 공주는 오래도록 흐느껴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