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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앞에는 흉측한 괴물이 가로막고 있었다.
숲에서 돌아다니는 몬스터와도 비교할 수 없고, 다리에서 맞닥뜨린 소환수들과도 차원이 달랐다. 그것은 꼭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 같았다.
‘너무 강해. 그런데 수도 많아.’
괴물이 아가리를 벌리고 포효하자 복도의 유리창에 금이 쩌적쩌적 가다가 터져 버린다.
지팡이를 검처럼 꺼내 든 마법사가 공주를 자신의 등 뒤로 감추며 빠르게 말했다.
“공주님, 아무래도 제가 여기서 저것들을 처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공주님께서는 기다리지 마시고 속히 성을 빠져나가십시오.”
“성을 나가야 해? 그렇지만 나 아바마마한테 가고 싶어…….”
“안 돼요! 절대 안 됩니다, 공주님! 전하가 있는 방으로는 절대 가선 안 됩니다! 저랑 약속해요. 무조건 성 밖으로 나가시겠다고. 나가서 바로 숲을 가로지르세요.”
“나, 나 혼자?”
그제야 마법사는 땀과 눈물이 흠뻑 젖은 얼굴로 공주를 돌아보았다. 호흡도 힘들어 보이는데 힘겹게 미소를 끼워 넣으며 우는 아이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여길 막고 뒤따라가겠습니다. 먼저 가세요. 하실 수 있지요? 총명하고 영민하신 우리 공주님.”
“숲에서 그다음에는 어디로 가야 해?”
어디에서 기다리면 다시 만날 수 있어? 라는 물음 같았지만 눈물이 가득 차오른 마법사는 차마 그것만은 약속할 수 없었던지, 어린 소녀를 품에 끌어안고 작은 귀에 각인을 시키듯 속삭였다.
“이 나라의 밖으로. 되도록 아주 멀리. 가장 안전한 곳으로요. 여기서는 절대 닿을 수 없는 아주 먼 곳으로 가세요. 돌아오지 않아도 되는 그런 아득히 먼 곳으로.”
그때 또다시 흉포한 울부짖음이 터지며 괴물들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마법사는 있는 힘껏 공주를 밀어 피신시킨 뒤 지팡이를 들어 재빠르게 허공에 주문을 그렸다. 그로부터 생긴 마법에 의해 달려오던 몇 마리가 하얗게 타올라 죽었다.
밀려난 공주는 끄윽끄윽 울면서 흰 빛 속으로 사라진 마법사를 보다가 무릎을 짚고 일어나서 그의 말대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한 짝이 벗겨진 구두 때문에 덜그럭거리면서도 그 작은 다리로 쉬지 않고 달린다.
살아남기 힘들다는 건 알았지만 마법사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그와 함께 싸우던 태리는 결국 그를 포기하고 공주의 뒤를 따라갔다.
둥근 계단을 미끄러지듯이 뛰어 내려간다. 1층 역시 기억 속의 모습과는 달랐으나 예상대로 그곳이 맞았다. 트롤을 피해 겨우 들어오는 데 성공했던 중앙홀이다.
하지만 홀은 이미 사방이 불바다로 뒤덮여 있었다. 어린아이 혼자 헤쳐 나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도와줄 이를 찾아 아무리 헤매도 보이지 않았다.
무리해서라도 혼자 지나가기로 마음먹었는지 소녀는 자그마한 몸으로 성한 바닥을 골라 가며 다시 용감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잠깐만, 기다려! 같이 가!”
태리는 불길 사이로 움직이는 아이의 등을 발견하곤 재빨리 따라붙었다. 마법사들이 했던 것처럼 손을 뻗어서 안으려고 했지만 불 때문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잘 뛰던 공주의 발이 앞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곤 갑자기 제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잔뜩 겁을 먹은 왜소한 어깨가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기다…….”
기다리라고 외치기 위해 입을 벌렸던 태리조차 채 소리를 내지 못하고 굳었다.
두 사람의 이마 위로 후끈거리는 열기가 덮쳐들었다. 피부에 닿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이것이 얼마나 사악한 기운인지.
목구멍이 턱턱 조일 만큼 지글지글하게 타오르는 불길 너머, 어금니가 머리까지 솟아 있는 거대한 흑소가 크르릉 하는 숨소리를 내쉬고 있었다. 녀석이 불이 붙어 있는 꼬리로 바닥을 내려치면 그 자리가 금세 붉게 익어 녹아내렸다.
달려오던 인기척을 느낀 흑소는 어린 공주를 곧장 표적으로 삼고 아이를 향해 사악한 입을 쩍 벌렸다.
공주가 침착하게 수인을 맺어 제 앞에 방어벽을 세우려고 했지만 정신이 공포심에 잠식당해 있어 연거푸 마법 캐스팅에 실패하고 만다.
막을 수 없었다. 부족하다. 턱없이 부족하고 또 부족하다.
“안 돼.”
괴물의 벌어진 주둥아리 속으로 총탄을 연사해서 갈기며 태리는 주저 없이 앞을 가로막는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부츠와 코트 자락에 불이 옮겨 붙었지만 뜨거움보다는 눈앞의 아이가 더 중요했다.
꽈득!
그러나 그녀가 도착하는 것보다 한발 앞서서 꽈드득, 하고 어깨를 깨무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연약한 살이 씹혀서 으스러지는 끔찍한 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든다.
이어서 찢어지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울리고 입에 물려서 질질 끌려가는 장면들이 느릿하게 흘러갔다.
퍼억!
예리하게 선 도끼날이 아이를 물고 있는 괴물의 앞니 하나를 작살냈다. 연이어서 더욱 강하게 찍어 넣은 공격이 어금니까지도 부러뜨려 놓았다.
휘둘러서 찍고, 또 찍어서 인중 부위의 살을 아예 너덜너덜하게 만들어 버린다.
고통에 몸부림친 괴물이 결국 참지 못하고 물고 있던 공주를 뱉어 낸 순간 태리는 얼른 아이를 받아서 불이 붙지 않은 기둥 뒤로 밀어 넣었다.
그런 다음 다시는 괴물이 그 주둥이를 쓸 수 없도록 앞니가 있는 잇몸에 아예 도끼를 찍어서 살 속으로 박아 버렸다.
분노한 녀석은 도끼가 박혀 있는 그대로 돌진해서 태리의 복부를 콧잔등으로 들이받았다.
순간적으로 숨이 컥 하고 막히는 듯한 통증과 함께 몸이 붕 하늘로 떴다. 그대로 낙사해서 어딘가 부딪혔다면 그녀 역시 큰 부상을 입었겠지만 태리는 이를 악물고 팔뚝에 착용하고 있던 로프 런처를 창틀로 쏘아 손잡이에 매달렸다.
그리고 괴물이 자신의 다리를 물기 위해 정확히 그 아래까지 도달한 순간 로프의 줄을 끊고 괴물의 시꺼먼 등 위로 떨어졌다.
“너, 죽음의 손아귀로 끌려들어 가라.”
이미 마법식이 완성되어 있던 손바닥이 괴물의 등을 지지듯이 압박하며 누른다. 거대한 흑소를 중심으로 검푸른 장판이 생기면서 바닥이 소용돌이쳤다. 그러더니 곧 소의 다리가 무너지고 머리가 땅에 닿고 살이 썩어서 부패해 버렸다.
불에 그을어 너덜너덜해진 부츠가 삽시간에 썩은 시체가 되어 버린 소의 등 위에서 비틀거리며 내려왔다.
기둥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본 공주는 제게로 다가오는 태리의 존재를 알아차리곤 더 크게 몸을 떨기 시작했다. 아이였지만 방금 제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살아 있는 것을 시체로 만들 수 있는 강제 안식이었다. 그것은 곧 눈앞의 여자가 어마어마한 힘을 가진 마법사란 뜻이었으나 공주는 그녀가 누군지를 모른다. 이 성안에서 저가 모르는 사람은 없을 텐데.
하지만 여자가 비틀비틀 걸어서 자신의 앞에 털썩 앉은 순간 두려움은 단숨에 놀라움으로 변했다. 바닥에 떨어진 깨진 유리 조각에 똑같이 닮아 있는 두 사람의 얼굴이 함께 비쳤다.
자신을 향해 커다랗게 떠진 눈동자 앞에 태리가 떨리는 한 팔을 내밀었다.
“얼른 가자.”
시간이 없다. 조심조심 품 안으로 들어오는 아이를 안고 태리는 다시 불 속을 헤치며 뛰었다.
트롤을 피해 힘겹게 열었던 성의 중앙 문은 먼저 나간 사람들이 있었는지 양쪽 도르래에 의해 열린 채로 고정되어 있었다.
저기로만 나가면 당장 위험한 상황으로부터 회피할 수 있다. 우선은 공주의 안전이 가장 시급하다. 부상당한 어깨도 서둘러 치료해야 한다.
태리는 피로를 호소하는 다리를 무시하고 가까스로 문 앞까지 다다랐다. 그리고 곧장 나가려고 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바로 돌아섰다.
왜. 문밖에는 이보다 더 절망적인 광경이 펼쳐져 있었으니까. 마법사들이 불러낸 소환수와 괴물들이 서로 엉켜서 물어뜯고 있는 중이었다. 다리의 난간에는 도망치다가 죽은 마법사들의 시체가 빨래처럼 널려 있었다.
그제야 태리는 알 것 같았다.
그날, 이 성은 무한히 파괴되어 가던 세계였다는 걸. 그 어떤 것도 구할 수 없었다는 걸.
바보같이. 어째서 여기만 빠져나가면 된다고 생각했을까. 왜 그렇게 순진하게 착각했지? 오늘 일이 어떻게 끝났는지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
시름시름 앓는 공주가 손가락을 들어 ‘성 밖으로…….’라고 힘없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지만 태리는 그녀가 바깥을 보지 못하도록 몸을 돌린 뒤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홀 안으로 다시 들어왔다.
저곳으로는 나갈 수 없다.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화재가 진압되지 않은 로비는 점점 더 큰 불길에 휩싸이고 있었다. 이러다간 다른 곳으로도 번지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
그림이 있는 층계로 올라가서 공간 이동을 쓰고 싶었지만 그쪽에도 이미 또 다른 마수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어떡하지. 찾아야 돼. 불에 타지 않는 안전한 곳…….”
어디든 생각해. 빨리 생각해 내야 돼.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며 되뇌는 태리의 음성을 들었는지, 내내 품 안에 힘없이 늘어져 있던 아이가 고개를 들며 핏기 없는 입술로 옹알거렸다.
“대서고의 서리나무 문은 아무리 큰불에도 절대로 타지 않아.”
“대서고?”
대서고라면 드래곤 빌이 지키고 있던 게임의 최종 보스 방이었다. 또한 수십 번도 더 왔기에 태리가 이 폐성 내에서 유일하게 가는 길을 완벽하게 외우고 있는 길이기도 하다.
여기서 대서고로 가려면…….
“네 번째 기둥 사이로 들어간 다음 순서대로 좌우좌좌. 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오른쪽 계단.”
“네 번째 기둥 사이로 들어간 다음 순서대로 좌우좌좌. 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오른쪽 계단.”
우연이었을까. 두 명의 공주가 동시에 똑같이 말했다. 태리보다 더 크게 놀란 아이는 정말 신기하다는 듯이 커다란 눈을 끔뻑거렸다.
“그래, 나도 알아. 아주 잘 알아. 그 문을 여러 번이나 열고 들어갔었거든. 서리나무로 만든 문인 줄은 몰랐지만. 금방 갈 테니까 정신 놓으면 안 돼.”
태리는 다시 아이를 꼭 추슬러 안으며 서두르는 발걸음으로 대서고로 이어지는 길을 향해 달렸다. 헤매거나 헷갈리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