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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에서 쏟아지는 소리 때문에 태리가 주춤한 그때, 드라큘라 백작의 망토처럼 까맣게 반질거리는 로브가 구석에 걸려 있던 옷걸이에서 소매를 쫙 펼치며 그녀에게로 날아들었다.
“악, 깜짝이야!”
태리는 너무 놀란 마음에 지팡이로 그것을 때려 잡고 말았다.
꽥!
휘두른 몽둥이질에 얻어맞은 까만 망토는 기절한 것처럼 곧바로 늘어졌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다.
눈앞에서 동료가 당한 것을 목도한 다른 녀석들이 치를 떨며 떼로 몰려들기 시작한다. 유리병이나 도자기처럼 몸이 약한 녀석들은 무찔러 버리라며 뒤에서 응원만 했지만 제법 단단한 녀석들은 겁 없이 몸을 굴려 왔다.
대체 왜 보물인지를 모르겠는 고무공이 퉁퉁 힘차게 좌우 벽을 튕기면서 돌격해 오길래 태리는 강화 마법을 걸어 한층 더 단단해진 막대기로 힘껏 후려치는 것으로 맞대응을 해 주었다.
“가, 강하다! 도둑 주제에 몹시 강해!”
“다들 물러서지 마! 힘을 합치면 혼쭐내 줄 수 있다고!”
마법사 왕들이 소지하고 있던 물건들이라 그런지 정말 엉뚱하고 시끄러웠다. 작심을 한 태리가 한 번 더 힘껏 타격하기 위해 자세를 잡았을 때였다.
높은 선반에서부터 낑낑대며 내려온 돋보기안경이 얇은 금테 다리로 바닥을 황급히 기어 오며 만류했다.
“얘들아, 모두 멈춰! 귀인께서도 부디 저희를 아프게 하지 말아 주세요!”
“살다 살다 내가 이제 유령한테 귀인이라는 말까지 다 듣게 됐어.”
“저희는 유령이 아니에요! 보물의 영혼들이라고요! 부디 폭력을 멈춰 주세요!”
태리는 안경의 말대로 확실히 폭력을 멈추긴 했다. 어깨가 놀란 채로 굳어서. 그리고 정신을 수습한 몇 초 뒤에 다시 막대기를 들었다.
“그러면 더 소름인데.”
“안 돼요! 그러지 말아요! 귀인께서는 소네티가 아니신가요? 이곳에 들어온 사람은 모두 소네티의 고귀한 혈통들뿐이라고요!”
“소네티?”
짧은 반문 뒤로 사방에서 기웃거리며 소네티? 소네티? 하며 따라 하기 시작한다. 참여하지 않고 죽은 듯이 가만히 있던 녀석들까지 가세해서 소네티? 소네티? 하며 흥분된 목소리로 되풀이했다.
“맞는데. 왜?”
그러자 이번에는 다 같이 헉! 하며 뒤로 넘어지더니, 어쩔 줄 모르는 것처럼 발을 동동 구르고 몸을 가늘게 떨었다.
얘들이 왜 이래? 태리는 가늘게 뜬 눈으로 노려본다. 그것을 꾸중이라고 여긴 건지 물건들이 무릎을 꿇는 것처럼 한꺼번에 와르르 바닥으로 엎드리며 전과는 전혀 다르게 엉엉 울었다.
“흑흑! 죄송해요! 저희가 주인님도 못 알아보고!”
“내가…… 너희의?”
“도굴꾼처럼 막 저희를 뒤지시고, 지팡이로 두들겨 패시길래 소네티인 줄 꿈에도 몰랐지 뭐예요!”
“아, 그거는 뭐……”
그래, 거기서는 마법을 써 줬어야 했나. 하긴 제대로 된 마법사라면 그 상황에서 지팡이를 잡고 물리력을 행사하려 하진 않긴 하겠다.
“소네티면 진짜 우리의 주인님이신데!”
“주인…… 그래, 주인이겠지.”
“잘못했어요! 혼내 주세요! 아까처럼 더 때려 주세요!”
“뭐어? 됐어. 이거는 쌍방 과실이야. 내 잘못도 있다고.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들어오기 전에 내가 소네티라고 자기소개부터 하고 들어왔지. 미안. 나도 몰랐어. 여기가 처음이거든.”
그녀가 손사래를 치고 지팡이를 내려놓자, 그 지팡이조차도 영혼이었던 건지 친구들을 때린 것과 주인에게 도움이 되었던 것 사이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도덕적 고뇌에 빠진 것처럼 갈팡질팡했다.
힘들다, 정말. 태리는 지쳐서 주저앉았다. 물건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슬금슬금 그녀의 주변으로 빼곡하게 몰려들었다. 물건의 위치가 묘하게 바뀌고 움직인 것 같다고 생각했던 의심은 역시 사실이 맞았다.
다리가 달린 것도 아닌데 참 잘들 걷는구나. 경기를 일으킬 장면 앞에서도 전혀 동요되지는 않는 마음에서 태리는 자신의 변질된 성격을 느꼈다.
“귀인은 왕이시죠?”
“아니.”
“왕이시여, 드디어 오신 거예요. 드디어 저희를 찾으러 오셨어요!”
“아니라니까.”
“아주 오래 기다렸어요. 얼른 저희를 데려가 주세요! 가져가서 마음껏 사용해 주시겠어요?”
내가 미쳤다고 말도 하고 움직이기도 하고 영혼까지 있는 물건들을 가져갈 것 같냐. 몇 개는 팔아넘길 생각이었는데 이걸 대체 누가 살까 싶었다. 고로 다 글러 먹었다. 돈 좀 보태려고 했는데.
“내가 너희를 왜 가져가.”
“네? 왜라뇨? 저희는 왕의 물건들인걸요. 언제나 왕에게 선택되어서 세상을 구하게 되는 위대한 모험을 기대하고 있어요.”
갈수록 가관인 말들에 이젠 골까지 지글지글 아파 오는 듯하다. 잡화점이나 다를 바 없는 창고를 둘러보며 그녀가 따지듯이 근처의 물건들을 잡고 흔들면서 캐물었다.
“난 여기가 이런 곳인 줄 몰랐어. 내가 상상했던 건 이런 게 아니야. 그래, 보아하니 다들 입들이 다 달려 있는 것 같으니까 너희들이 설명해 봐.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여기 있던 보물은 다 어디 갔어? 왕들의 보물 말이야!”
“보물이 어디 있다뇨? 저희가 다 보물이에요.”
좀 전에 싸움을 제지하고 상황을 정리시킨 제법 현명해 보이는 금테 안경이 다시 앞으로 나서며 설명했다.
“보물이란 건 누군가가 소중히 여기는 무언가이니까요. 이곳에 모인 저희들은 모두 저희의 옛 주인께서 아꼈던 물건들이에요. 저희는 그 물건을 몸으로 삼아서 사랑받다가 긴 세월이 흘러서 이렇게 영혼을 갖게 된 거고요.”
“그러니까 그 보물이라는 게 값비싼 게 아니라…… 아아아악!”
마침내 모든 것을 제대로 이해한 태리는 소리를 지르며 머리를 쥐어 잡아 뜯었다.
말도 안 돼. 진짜 말도 안 돼. 어떻게 이게 말이 돼? 아니, 어떻게 하면 별사탕 병을 금딱지보다 소중하게 여길 수가 있는 건데?……라고 외치고 싶기도 했지만 옆에서 순진한 눈망울을 굴리고 있는 그 연약한 병이 상처를 받을까 봐 차마 입 밖으로 외치지는 못했다.
“아아…… 망했네, 진짜.”
시간만 날리고, 클르도와는 떨어지고, 소득은 하나도 없고.
태리는 절망적인 눈으로 다시금 잡동사니로 가득 찬 창고를 둘러보았다. 금은보화가 미어터지는 왕실의 비자금 같은 걸 기대했는데, 그냥 왕들이 아끼던 물건들이 사후에 영혼을 얻고 모여든 장소라니.
그럼 뭐 내가 죽으면 내가 아끼던 클래식 게임기가 여기로 오기라도 한다는 거 아니야.
그녀가 무릎 위에 이마를 대고 숙이며 어질어질한 상황을 정리하려고 애썼다. 그러다가 순간 번뜩 스치는 생각이 있어서 고개를 홱 들었다.
“그럼 혹시 여기 그 사람의 물건도 있어? 그…… 그…… 실리안 소네티…….”
“아! 그 신입!”
말 떨어지기가 무섭게 신입이라고 외친 녀석들은 그녀에게 팔짱을 끼듯이 양 옆구리로 쪼르르 모여들더니 이윽고 한 서랍장 앞으로 데려갔다.
“그 녀석이라면 여기 제일 아래 칸에 들어 있어요. 아직 나이를 얼마 먹지 못해서 저희처럼 영혼이 깨어나진 못했지만요, 마지막 순간에도 주인의 옆에 있었던 녀석이죠. 왕께서는 이걸 찾으러 오신 거였군요?”
말하면서도 다들 꽤나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왕에게 선택받아서 위대한 모험의 길을 떠나는 게 소원이라더니 그 말이 진심이었던 것 같았다.
“저기, 아까도 말했지만 난 왕이 아니야.”
“하지만 소네티잖아요?”
“소네티일 뿐이지.”
“그게 그거 아닌가요?”
“달라. 내가 소네티이긴 하지만 앞으로 이자리스에는 다른 사람이 왕을 도맡게 될 거야. 나보다 더 잘할 거고. 그 사람한테 너희들을 꺼내 써 달라고 언젠가 얘기해 둘게.”
물건들은 그럴 리가 없다는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봤지만, 태리는 그 점을 의심하지 않았다. 어쩐지 좀 미안해서 키가 큰 빗자루의 손잡이를 살짝 쓰다듬어 준 뒤 조심스럽게 아래의 서랍 칸을 열었다.
그곳에는 겉표지를 가죽으로 감싼 두툼한 책 하나가 정말 갓 태어난 아기처럼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테두리가 해져 있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많이 사용한 것 같았다. 얇게 쌓인 먼지를 입으로 호 불곤, 몇 장을 넘겨 본 그녀는 곧 이 책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었다.
6901.08.28.
오늘은 밤바람이 선선하다. 별자리를 보다 잠이 들 것 같은 밤이다. 페가수스의 몸통이 왼 칸으로 두 마디 이동했다. 가을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