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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슬아슬하게 액자 안으로 들어가는 데 성공하고 다시 눈을 떴을 땐 서 있는 자리의 풍경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알 수 없는 카펫 위로 던져진 일행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주변에 다른 길이나 그림이 보이지 않자 이 통로를 한번 꾸준히 걸어 보기로 했다.
성은 웅장하고 고풍스러우며 아주 오래되었다.
성이 지닌 역사를 보여 주듯 즉위한 왕의 취향에 따라 군데군데 보수하고 증축한 흔적들이 고스란히 엿보인다.
예를 들면 창틀의 손잡이는 단정한 고전주의 풍의 장식인데, 천장화는 누가 보아도 그보다 훨씬 이후에 등장할 법한 개성 넘치는 낭만주의 풍의 색감이라든가. 원래는 격자무늬의 타일이었는데, 그게 마음에 들지 않은 어느 왕의 지시에 따라 그 위에 회칠을 하고 새로운 무늬를 덧그린 흔적이라든가.
클로드가 지닌 행운력 때문에 길을 모르고 걸으면서도 그런 재미있는 부분들을 다수 발견해 낼 수 있었다.
성을 돌아다니며 내내 오묘한 감정에 휩싸였던 태리는 문득 커다란 창문 속에 반사된 제 모습을 보게 되었다.
재앙으로부터 성을 탈출해 나왔던 자그마한 공주는 이렇게나 낯선 어른으로 성장해서 돌아왔다.
공주의 어릴 적 모습은 알지 못했지만 과거를 상상하는 게 어렵지 않게 느껴졌다. 어차피 제 얼굴과 똑같이 닮아 있을 테니까.
‘여기가…… 진짜 집.’
태어나고 자란 진짜 집.
집이라는 말의 울림이 뭉클했다. 어렸을 때 떠났던 집을 다 큰 어른이 되어서야 돌아왔다고 생각하니 더욱 그랬다.
한 길로만 나 있던 여정에서 갈림길이 등장한 건 그러고도 한참이 더 지나서였다.
아까 마신 물약 때문인가. 속이 부쩍 메스꺼워진 클로드는 갈림길에 멈춰 서서 양쪽을 한 번씩 번갈아 보았다. 둘 중 한 곳을 골라야 하는데, 맨 처음 하나의 그림을 명확하게 선택했을 때와 같은 강한 확신이 어느 쪽에도 들지 않는다.
다만……
“좌측으로 가면 뭔가가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긴 합니다. 그리고 거긴 끝 방입니다.”
“네 형이 거기에 잡혀 있나?”
“아니, 사람의 느낌은 아니고.”
뭔가를 찾을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그게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면 보물일 수도 있겠는데. 태리는 귀가 솔깃했다.
현재 클로드는 행운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의 감각은 미리엘을 제외하고도 성의 보물창고를 발견할 확률이 매우 큰 상태였다. 여기까지 왔던 길을 재빠르게 머릿속으로 복기한 다음 태리가 얼른 좌측으로 튀어 나갔다.
“뭐가 있는지만 대충 보고 올 테니까 일단 두 사람은 여기 있어 봐요. 빨리 올 테니까 움직이지 말고요.”
“잠깐, 같이…….”
넓어진 시야 속으로 태리가 후다닥 좌측 코너를 돌아 사라졌다. 클로드는 곧장 뒤따라가려고 했지만 순간적으로 현기증이 핑 돌면서 옆에 있던 벽을 손으로 짚고 멈춰 섰다.
두통이 오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빈 벽을 손으로 짚은 순간 어지러웠던 머릿속이 깔끔하게 밀려 나간다. 그러면서 오직 하나의 강렬한 생각만이 뇌리로 몰아치기 시작했다.
‘……있다.’
진짜로 형이 이곳에 있다. 틀림없이 여기에 있어.
갑자기 바다 한가운데에서 깜박이는 등대를 찾아낸 것처럼 아무런 증거 없이도 미리엘이 성안에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확신은 애매모호한 감각이 아니라, 세밀하고 구체적인 장면으로까지 거침없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둥글고 높은 공간. 키 큰 나무와도 같은 책장들이 빼곡하게 채워진 광활한 영역. 창문이나 등불이 없는데도 언제나 낮은 채도로 은은하게 밝혀져 있는 마법사의 거처.
머릿속으로 형이 있을 장소가 거짓말처럼 또렷하게 그려진다.
어딘지도 알 수 없는데 찾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여기서 멀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그가 그것들을 확신한 순간 아까 느꼈던 추적의 빛이 다시금 벽 위로 나타났다.
회색 벽지가 발라진 것 말고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빈 벽에 불현듯 직사각형의 네모난 틀이 생겨나고, 형태와 색깔이 드러나더니 머릿속으로 떠올렸던 장소가 그대로 그림이 되어 나타났다.
빛은 그 속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림이 생겨나기 전부터 그 자리에 손을 짚고 있었던 클로드는 저항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순식간에 그림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안 돼!”
한발 늦게 알아차린 이즈가 잽싸게 클로드의 허리를 붙잡았지만,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마법의 힘을 버텨 낼 재간이 없다. 다리를 버둥대던 그조차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함께 흘러 들어가고 말자 복도는 순식간에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잠시 후 그 고요함 사이로 타닥타닥 뛰는 발소리가 섞여 들어왔다.
“가 봤는데 막혀 있는 곳 맞아요! 기억해 뒀다가 나중에 다시 돌아 와 봐야 할 것 같…… 어? 다들 어디 갔어요?”
왜 아무도 없어요?
어둠 속에 홀로 떠도는 공주의 메아리에 흉상들의 고개가 덜커덕 돌아갔다.
* * *
“없는데…….”
왔던 길을 몇 번이나 왕복하면서 벽을 꼼꼼하게 살폈던 태리는 막막해진 심정으로 다시 남자들이 사라진 자리로 되돌아왔다. 혹시 놓친 액자가 있을까 싶었는데 아무리 봐도 달라진 건 없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들이 이렇게 사라질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결국 따로 떨어져 버렸단 말이지.”
후우, 한숨을 내쉰 그녀는 우선 클로드가 뭔가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언질을 주었던 곳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짐작대로 막힌 곳이 맞았고 완만하게 경사가 진 내리막 끝에 문 하나가 가로막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한 발씩 내려온다. 가까이 내려와서 보니, 문은 마치 선물 박스처럼 리본에 화려한 문양으로 도배되듯이 꾸며져 있었다. 그 정중앙에 뭔가를 끼워 넣을 수 있는 듯한 네모난 홈이 만져졌다.
“역시 맞는 것 같네.”
그럴 것 같더라니. 태리는 재빨리 주머니에서 황금색 카드 키를 찾아서 홈에 맞춰 밀어 넣었다. 헷갈릴 이유도 없었다. 카드에 그려진 리본과 문 앞에 걸린 리본 모양이 똑같았으니.
잠금을 해제하자 문은 열리거나 돌아가는 법 없이 연기와 함께 펑 하고 터지면서 그대로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애초에 문도 아니었잖아.”
문처럼 보이고 느껴졌던 것은 환각이었을까. 안으로 조심스럽게 진입하며 먼지 뭉텅이를 헤치고 나아간 그녀는 잠시 후 입이 벌어지기는커녕 눈썹을 와장창 찌푸리게 되었다.
이게 다 뭐람.
지하실 같은 창고에는 수많은 물건들이 쌓여 있었다.
여우 꼬리털로 묶어 만든 빗자루, 구멍 난 고깔모자, ‘살 빼야 돼 아껴 먹자’라고 손 글씨로 쓴 라벨이 붙어 있는 별사탕 병, 중간이 부러져서 테이프로 칭칭 감아 둔 지팡이, 모양이 고정되어 있는 스카프, 백태가 낀 철제 주전자 등등…….
돈이 될 만한 것, 그리하여 복구가 시급한 폐허와 구시가지에 도움이 될 만한 번쩍이는 무엇들. 금붙이, 다이아몬드, 왕관 따위를 기대하고 왔던 사람의 심장을 산산이 박살 내는 광경뿐이었다.
“장난쳐? 이게 어딜 봐서 보물 창고라는 거야?”
상상하고 온 건 금화가 산처럼 쌓여 있는 보물섬이었는데. 이건 그냥 잡동사니를 모아 둔 만물상이었다.
“으! 도대체가 마법사들이란!”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발언인 줄 알면서도 이 순간만큼은 그 말을 참을 수가 없었다.
마법사들이란! 도대체가 마법사들이란!
보아하니 왕들의 손에서 손으로만 물려받아 전해져 내려온 공간인 모양인가 본데, 아마도 카드키를 빼돌렸던 할아범도 키만 보관했을 뿐 들어와 보진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보물 창고의 이 허접한 상태에 대한 소문이 나지 않았을 테지.
대롱대롱 흔들리는 전등에 마나를 흘려 넣어 불을 밝힌 뒤,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는 그곳에서 태리는 닥치는 대로 상자부터 열어젖혔다.
딱히 상자 안에 뭔가 대단한 게 있을 거라 기대하고 그런 건 아니었고, 열어 보면서 겸사겸사 상자의 표면에 박혀 있는 보석들을 회수하기 위함이다.
도끼날로 가장자리에 살짝 힘을 주어 파내자 라피스 라줄리와 호박석이 떨어졌다. 이거라도 긁어 가겠다는 불타는 의지에 의해 배낭 안으로 보석들이 통통 맑은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한 푼이라도 아까워서 열심히 상자를 까다 보면 가끔씩 비싼 것들도 나오긴 했다.
지금 이 손거울도 마찬가지. 먼지 덮인 상자 안에서 예사롭지 않은 형태의 손거울을 발견했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훔쳐서 넣으려고 했는데 상자 뚜껑이 열리자마자 놀랍게도 그 거울이 그녀를 향해 먼저 호통을 쳤다.
“감히 자격도 없는 자가 나를 만져? 너는 기필코 대가를 치를 것…… 앗, 뭐 하는 거야? 말하고 있었잖아!”
음. 물건이 말을 할 줄 아는군.
태리는 녀석의 잔소리를 끝까지 듣지 않고 바로 상자를 쾅 닫아 버렸다.
“당장 열지 못해?!”
미쳤다고 내가 열까 보냐. 잠금장치까지 찰칵 돌려 버린다. 거울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상자 뚜껑을 발로 차고 소리를 꽥꽥 지르며 난리법석을 떨었다.
“어우 뭐야, 시끄러워. 유령이 여기까지 있나?”
손때가 묻은 오래된 물건들은 주인이 사라지고 나면 유령이 달라붙기 쉽다. 가재가 빈 소라 껍데기를 자기 집으로 삼듯이 주인 없는 자리에 제 보금자리를 틀어 버리는 것이다. 폐가에 귀신이 출몰하는 것과도 같은 이치였다.
“음? 그러고 보니―”
마침 여기 있는 물건들이 그 조건에 딱 알맞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스치면서 가뭄에 콩 나듯 보이던 보물을 파내느라 신경 쓰지 못했던 주위를 그제야 한번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곧 깨달았다. 처음 들어왔을 때와 위치가 묘하게 달라진 것들이 있고 그것들이 자신을 에워싸는 듯한 기분이 든다고.
아니, 기분이 아니라 거의 확신이었다.
그녀가 조용히 한구석에 뉘어 있는 부러진 지팡이를 들었다.
그 순간 창고 안에 이상한 진동이 몰아닥쳤다. 물건들이 저 혼자 달그락거리고 도르르르 바닥을 굴러다니더니 사방에서 온갖 고함소리가 빗발쳤다.
“이 더러운 도둑놈, 무엇 하러 이곳엘 숨어 들어왔지?”
“어떻게 들어온 거지!”
“몇 개를 이미 훔쳤어! 내가 분명히 봤다!”
“무모한 인간 같으니! 너의 죄 많은 영혼을 내가 집어삼켜서…….”
한두 명이 말하는 소리가 아니다. 못 되어도 기백은 넘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